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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30화 (31/146)

30화

묵범은 레몬 사탕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 크기에 비해 작은 테이블 밑에는 자신이 읽으라고 준 차사국 안내 서적이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딱 봐도 계약서로 보이는 종이가 뒷면을 보이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그는 도화의 계약서 뒷면에 쓰인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그의 눈에는 작은 이채가 어렸다.

“뭐 해?”

양치를 끝낸 도화는 물기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슥슥 닦으며 묵범에게 다가갔다. 그는 묵범이 자신의 계약서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빼앗을까 하다가 그냥 보게 내버려 뒀다. 어차피 저놈도 똑같은 계약서를 썼을 테고, 지금 보고 있는 건 계약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차사국 안내 서적을 읽고 요약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들, 다 읽은 겁니까?”

“읽었으니까 정리했지.”

나머지 부분까지 읽은 묵범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류 가방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도화에게 내밀었다.

“뭔데.”

“추혼부 나비 전용 안내서입니다.”

“…나비 전용?”

나비란 말을 들은 도화의 머리에 아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떠 올랐다. 수습 차사를 보통 ‘나비’라고 부른다는 내용이었다.

“차사와 사자의 차이를 압니까?”

“차이? 저승차사나 저승사자나 똑같은 거 아냐?”

인간들은 차사보다는 사자로 부르긴 했다. 그래봤자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건 똑같으니 다를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묵범의 설명을 들으니 차이가 있긴 있었다.

“사자(使者)는 심부름꾼. 차사(差使)는 벼슬 이름입니다.”

심부름꾼보다는 벼슬 이름이 더 나아 보이긴 하다.

“수습에게 ‘차사’란 직책은 무겁다는 도령의 말에 수습 사자라고 부르던 것이 말장난으로 그리 변한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하면 사자가 나비가 되는 건데.”

꽤 긴 설명을 들은 것 같은데 여전히 이해 불가다. 발음이라도 비슷하다면 모를까. 사자와 나비의 차이는 글자 수가 같고 받침이 없다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사자(使者)를 사자(獅子)로 여겨 수습이 무슨 사자냐, 고양이지. 고양이라 부르기 귀찮으니 나비라고 부르자-가 된 거라더군요.”

“…….”

도화의 눈빛이 냉담하게 가라앉았다. 저승차사들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경멸도 미세하게 담겨 있었다.

“당신의 수습 기간은 매우 짧을 것입니다.”

“왜?”

“제가 손을 써 두었거든요.”

“깍두기가 무슨 힘이 있어서?”

국장인 강림 도령이 손을 썼다고 하면 믿었을 텐데. 방금 본인 입으로 자기는 깍두기라고 소개해 놓고 손을 써 뒀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오늘 막 깍두기에서 벗어났거든요.”

“?”

묵범이 명함 한 장을 도화에게 내밀었다. 전에 준 걸 잊었나? 아니면 깍두기에서 벗어나서 새로 팠나? 도화는 묵범의 명함을 받아 살폈다.

도톰한 검은 종이에 금색으로 박힌 이름과 번호는 저번에 받은 명함과 다를 게 없었다. 달라진 점은 딱 하나. 저번 명함에는 없던 직함이 추가되어 있었다.

“수석 차사?”

“네. 저번 명함은 버리셔도 됩니다.”

“그 명함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하하…. 깍두기라고 적을 순 없어서요.”

묵범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변명했다. 하긴 직책에 깍두기는 웃기긴 하지. 수긍한 도화는 명함을 계약서 위에 올려 두었다. 지갑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묵범 앞에서 그 지갑을 꺼내기가 좀 그랬다. 너무 오래 써서 그런지 인조 가죽이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찢어진 상태였다.

“명함은… 저승차사라면 다 가지고 다니는 건가?”

도화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슬쩍 물었다. 만약 다 가지고 다닌다면 자신도 묵범과 같은 명함을 갖고 싶었다.

“수습 기간이 지나면 나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 영… 올드해요.”

“올드하다고?”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가 끝입니다. 심지어 종이 질도 별로라 전 따로 맞춘 겁니다.”

“아…….”

도화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 같았다. 그 반응을 본 묵범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과 같은 명함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크게 실망한 게 한눈에 보였다.

“수습 차사 기간은 원래 석 달인데 당신은 제 권한으로 한 달로 줄였습니다. 명함은 제가 맡긴 곳에 미리 주문해 두었는데, 괜찮겠습니까? 싫으면 취소하면 됩니다.”

“아, 아니. 괜찮아. 귀찮게 구, 굳이 취소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다행이고요.”

도화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막으려고 입가에 힘을 줬다. 좀 있다가 나가서 지갑을 사야겠다. 명함도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신청한 물품은 내일 도착할 겁니다. 설치 서비스까지 신청해 뒀으니까 어디에 배치할지 정해 두세요.”

“알았어.”

“그러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바로 옆집인데 잘 가라는 배웅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도화는 대충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잘 가란 인사를 마쳤다. 하지만, 묵범은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 한 가족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닙니까?”

“가족?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한 지붕 밑에 사니까 가족이지요.”

“그러면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도 다 가족이게? 어쨌든 한 지붕 아래니까?”

“흠. 정정하지요. 같은 현관문을 쓰니까 한 가족이라 칩시다.”

“현관은 1층에도 있어.”

“쳇.”

안 넘어오네. 묵범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시답지 않은 농담에 맞장구쳐 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재미없는 반응이었다.

“어서 꺼져.”

“이런, 매정해라. 앞으로 함께 붙어 다녀야 하는데 좀 더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네가 하는 짓을 봐서.”

“제가 왜요?”

묵범은 도화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이 도화의 짜증을 북돋웠다.

“그 눈깔부터 치우고 말하지?”

아까부터 묵범의 시선은 도화의 어깨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요한 시선 속에는 아쉬움이 묻어난 이유는 저번처럼 목이 늘어난 티셔츠 차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옷도 꽤 늘어나 있어서 툭 튀어나온 빗장 관절 부분이 훤히 보였다.

‘나 혼자 보기엔 괜찮은데…….’

저대로 차사국에 출근하는 건 영 달갑지 않다.

“옷 좀 사는 게 좋겠습니다.”

“옷은 갑자기 왜?”

“첫 출근을 그렇게 입고 할 순 없잖습니까? 아무리 차사복이 제공된다고 하지만, 흑립과 도포가 전부입니다.”

“다른 옷 입으면 돼.”

“목이 안 늘어난 티셔츠가 있긴 합니까?”

묵범의 순수한 질문에 도화는 화를 내는 대신 거친 발걸음으로 거실 구석에 세워 둔 캐리어를 끌고 왔다. 어찌나 낡았는지 화가 난 도화의 거친 손길에 부욱 소리를 내며 지퍼 부분이 뜯겨 나갔다.

“여기 셔츠도 있고 터틀넥도 있고—.”

“고도로 발달한 구두쇠는 환경운동가와 다를 바 없다더니….”

“뭐?”

“홍도화 씨. 혹시 환경운동가입니까?”

“…….”

한 박자 늦게 묵범의 말을 이해한 도화는 들고 있던 셔츠를 묵범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졌다. 묵범은 얼굴에 닿은 셔츠에서 은은한 복숭아 향기를 맡았다. 옷은 다 낡고 해졌는데 세탁은 열심히 한 듯했다.

“보통 도포 안에 슈트를 입지만, 추혼부는 움직임이 편해야 해서 자유로이 입으면 됩니다. 뭐… 악귀를 유혹할 목적이라면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됩니다.”

“당장 꺼져!”

결국, 묵범은 도화의 불같은 축객령에 제집으로 도망쳤다. 묵범이 사라지고 조용해진 집안은 도화의 거친 숨소리만 한참 동안 맴돌았다.

한참 뒤. 분노를 가라앉힌 도화가 담마를 불렀다.

“담마. 다 먹었어?”

“설거지까지 다 끝냈어요.”

“나가자.”

“어디를요?”

“옷 사러.”

“아하.”

담마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병 속에서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현천이 웃음을 참는지 덜그럭거렸다. 긴 시간 도화와 함께 지낸 현천의 눈엔 지금 그가 얼마나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이거 선계에서 상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닌가? 도깨비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구를 위해 환경 운동을 하니 말일세.]

[앞으로 쭉 금주하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보시지.]

[…….]

금주란 말에 현천은 소주병에 남은 몇 방울의 술을 쪽쪽 빨며 대꾸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담마의 차림새는 캐쥬얼했다. 산월이 챙겨 준 옷 보따리 속에는 개량 한복 외에도 평범하게 입을 수 있는 옷도 많았다.

“어디로 갈 건데요?”

“백화점. 그리고 휴대폰 대리점도 들러야 해.”

“휴대폰?”

담마는 도화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쳐다보며 물었다. 업무용으로 하나 더 개통하려나?

“요즘 초등학생도 휴대폰은 필수야.”

“제 걸 사 주시게요?”

“저기 술에 전 고철한테 사 줄 순 없잖아?”

[뭐, 뭐? 고처얼? 자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가자. 들를 데가 많아.”

도화는 가방에 귀령면을 챙겨 넣고 현관으로 갔다. 현천이 후다닥 병에서 빠져나와 도화의 주머니로 쏘옥 들어갔다. 술 냄새 난다며 손으로 주머니를 퍽퍽 치자 현천이 아이고 나 죽는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담마가 작게 웃었다. 무뚝뚝한 도화와 수다쟁이 현천의 조합은 가만히 구경만 해도 재미있었다.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내부 현관을 나온 담마는 슬쩍 묵범의 현관을 쳐다봤다.

‘안 보이네?’

밖이 소란스러우니 무슨 일인지 내다볼 만도 한데. 묵범의 현관은 등도 꺼진 상태였다. 담마의 눈에는 묵범이 도화에게 진한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내다보지도 않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흥미가 있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서 나와!”

“네! 갈게요!”

도화의 부름에 담마는 후다닥 엘리베이터로 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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