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묵범은 어서 귀령면에 대해 있는 대로 다 불라는 강림 도령의 닦달을 무시하고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오전 일찍 출근했지만, 자재부와 경리부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강림 도령은 당장에라도 묵범을 현장에 내보낼 기세지만, 사실 새 파트너를 들였어도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계에서만 지낸 홍도화가 차사국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저승차사가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것은 하계의 인간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란 것까지 아는 사람은 소수이다. 홍도화는 오늘부터 열심히 차사국을 파악하여 그 소수에 들어야 했다.
홍도화를 직접 데려온 묵범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내서는 잘 읽고 있으려나.”
출근 전, 신입 차사가 읽어야 할 안내서를 최대한 정리해 주긴 했다. 그래도 권수가 꽤 많아서 오늘 내로 읽기엔 무리가 있을 양이었다.
강림 도령이 이쪽 사정을 봐줄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당장 실전에 투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까.
‘몸이 좋은 건 확실한데… 과연 머리는 어떠려나?’
묵범은 빠른 걸음으로 자재부를 향해 움직였다. 머리야 좀 나빠도 상관없다. 어차피 추혼부는 머리보다 몸이 더 좋아야 하니까.
* * *
“쉽네.”
묵범의 걱정과 달리 도화는 거실 테이블에 쌓인 책을 후루룩 읽고 2차 정독까지 했다. 그리고 아예 정리까지 하던 중이었다. 가방 앞주머니에 굴러다니던 연필과 지우개가 있었다. 아마도 미술 학원을 지나던 중 홍보용으로 나눠 주던 걸 받아 넣어 뒀던 것 같다.
쓰고 있는 종이는 차사 계약서였다. 계약서에 낙서를 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집은 쓸 만한 종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지우면 되니까.’
지우개로 지울 생각으로 손에 힘을 빼서 쓰고 있다. 묵범에게 맡긴 필요 물품 목록에 필기구와 노트를 적어 두긴 했는데… 차사국 조직도를 보니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차사국의 저승차사들은 국장인 강림 도령 아래로 감직부, 추혼부, 정보부, 무구부, 정화부, 치유부, 복상부, 영업부, 경리부, 자재부로 나뉜다.
차사 인원이 가장 많은 부는 감직부. 감재 차사와 직부 차사가 한 팀이 되어 망자를 인도한다. 감직부 내부에는 근무 시간에 따라 일직 차사와 월직 차사로 나뉘고 1년 내내 일을 하느라 항상 피로에 찌들어 사는 연직 차사가 있다.
추혼부는 감직부가 잡지 못하는 탈주 망자, 원귀, 악귀 등을 잡는 부서다. 인원수는 가장 적으나 제일 고된 일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90% 이상 외근을 하기에 부서는 항상 한산하다.
정보부는 1팀과 2팀으로 나뉜다. 1팀은 감직부로 보낼 정보 수집, 2팀은 추혼부로 보낼 정보를 수집한다. 때로는 감직부 담당 망자가 탈주할 때에는 정보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추혼부로 연락하기도 한다.
무구부는 차사들이 쓸 무기와 도구를 제작하는 부서이다. 보통 추혼부와 가장 왕래가 잦다.
추혼부가 무구부만큼 자주 왕래하는 부서가 있는데 바로 복상부이다. 임무를 수행하다 기물 파손이나 인간의 눈에 띄면 복상부가 처리한다. 1팀은 물리 복구, 2팀은 무형 복구이다. 일명 추혼부 뒤처리 담당 부서로 불린다.
정화부는 원귀나 악귀의 기운에 노출된 차사와 무구를 정화하는 부서이다. 치유부와 한 세트로 붙어 있고, 실제로 차사들은 정화부와 치유부의 처치를 동시에 받곤 한다. 물론 처치를 받는 차사의 대부분은 추혼부이다.
영업부는 망자들 중 혼이 맑고 능력 있는 망자에게 차사직을 영업하는 곳인데 실적은 처참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영업부의 첫 멘트-선생님. 혼이 참 맑으셔서 그런데-에 큰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데… 아직 개선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부서마다 부장 차사, 수석 차사, 선임 차사, 평차사, 수습 차사로 나뉘는데 수습 차사는 보통 ‘나비’로 불린다.
“…나비?”
어째서?
나머지는 다 이해하고 머리에 잘 입력했는데 수습 차사를 나비로 부른다는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비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인가. 나도 수습 차사부터 시작일 텐데. 설마…?
“속 안 좋으세요?”
옆에서 우유를 마시고 있던 담마가 도화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도화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마시면 양치해.”
“칫솔이 없는데….”
“우선 손가락으로라도 해. 치과 가는 것보단 낫잖아.”
“아.”
치과란 말에 담마가 인상을 썼다. 이성과 지성이 높은 소수의 귀물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담고 태어난다 하더니. 담마가 그 케이스였다. 딱히 교육을 한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생활 지식을 숙지하고 있었다.
집이 넓으면 모든 게 다 좋을 줄 알았는데. 이 집은 넓어도 너무 넓다.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까지 가는데 이렇게 걸을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다시 원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도화는 가득 찬 냉장고 문을 열며 생각했다.
[저거 상하는 거 아니냐?]
집이 넓다고 신나서 날아다니던 현천이 도화에게 다가와 물었다. 현천이 걱정하는 것은 냉장고 옆에 쌓아 둔 음식 상자였다. 냉장실과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도 저만큼이나 남았다. 냉장고 두 대 분량은 있어야 수습이 가능할 양이었다.
여름이었지만, 다행히 음식은 상하지 않았다. 상자마다 아이스 팩이 넉넉히 들어 있었는데 범상치 않은 인물이 보낸 것이라 그런가 상자에서 꺼낸 식혜에 살얼음이 동동 떠 있을 정도였다.
[이보게. 도화. 나도 배가 고프이.]
[술이라도 마시던가.]
[술 좋지.]
도화는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현천이 병 속으로 쏘옥 들어가 검신을 담갔다.
[크으~ 시원하구만.]
“현천 아저씨는 저게 밥이에요?”
담마가 신기한 눈으로 현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기할 법도 했다. 꽃병에 꽂힌 꽃처럼 술병에 꽂힌 현천은 좋다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한 번 몸을 떨 때마다 병 안의 술이 쭉쭉 사라졌다.
“입이 없어서 몸으로 흡수하는 거다. 딱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술이 좋아서 저러는 거야.”
[캬~ 여기다 자네 피 한 방울만 똑 떨어트려 주면 좋으련만.]
현천의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도화는 담마에게 데운 햇반 두 개를 주고 자리에 앉았다. 현천은 시끄러워서 식탁 구석으로 쭉 밀어놓았다.
바삭하게 구운 김을 집으려고 젓가락을 잡으려는 순간.
띵동- 띵동-.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은 없는데? 있어 봤자 묵범인데, 묵범은 오전에 차사국으로 출근했다. 들를 곳이 많다고 했으니 벌써 돌아올 리는 없을 텐데.
도화는 인터폰을 눌러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묵범?”
묵범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1시 20분. 직장인이라면 점심 시간이지 퇴근할 시간은 아니다. 도화는 방금까지 읽은 차사국 안내서를 떠올렸다. 차사국이 보통의 직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장도 아니었다.
인터폰 화면에서 묵범이 문을 열어 달라고 손을 흔들었다. 무시해 버리자니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 함께 움직여야 할 파트너라, 하는 수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점심 식사 시간에 딱 맞춰 온 듯하군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 묵범은 그대로 식탁으로 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화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집었다.
“뭐야. 네가 왜 내 자리에 앉아.”
“아, 당신 자리였습니까?”
그렇게 말한 묵범은 그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남의 자리인 걸 알았으면 비켜야 정상인데. 묵범은 정상이 아니었다. 도화는 묵범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고 수저 한 벌을 새로 꺼냈다. 다행히 산월이 챙겨 준 상자에 여분의 수저가 여러 벌 들어 있었다.
햇반 하나를 더 데워 식탁에 앉은 도화는 고기 반찬부터 집는 묵범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이지 낯짝이 두꺼워도 이렇게 두꺼운 놈은 처음이다. 얼굴이 잘나서 낯짝이 더 두꺼운 건가. 아니면 태생이 저런 건가. 알 수는 없지만, 도화로서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성격이었다.
묵범의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저 커다란 덩치에 햇반 하나가 끝이었다. 고기 반찬 위주로 먹긴 했으나 고작 햇반 하나에 반찬을 먹으면 얼마나 먹겠는가. 식탁에 모인 사람 중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은 담마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쉴 새 없이 먹었다. 아까 먹은 우유도 1000ml였다.
[쑥쑥 클 때지.]
술을 다 마신 현천이 담마가 먹는 것을 구경하며 말했다. 하긴. 쑥쑥 크긴 했다. 조막만 한 털북숭이에서 사람으로 쑥 컸으니 말이다.
도화는 고기 반찬을 담마 앞에 다 밀어 놓고 본인은 나물 반찬으로 햇반을 비웠다. 묵범은 그런 도화를 빤히 보고 있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도화에게 내밀었다.
“레몬 사탕입니다.”
“……?”
도화가 이걸 왜 나에게? 라는 눈빛으로 묵범을 쳐다봤다. 주려면 담마에게 주는 게 더 맞지 않나? 도화가 손을 내밀지 않자 묵범은 도화의 손목을 끌어 억지로 손을 벌리고 사탕을 올렸다.
“뭐… 하는 짓이지?”
“입가심입니다. 입가심.”
입가심이라는 말에 열심히 밥을 먹고 있던 담마가 묵범을 쳐다봤다. 하지만, 묵범은 도화에게만 사탕을 준 뒤 자신이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넣으러 일어섰다.
도화는 받은 사탕을 담마에게 주려다 묵범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주머니에 넣었다. 저놈이 싫긴 하지만,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는 건 양심이 좀 찔렸다.
“잠깐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간 되지요?”
“잠깐만. 거실에 가 있어.”
방금 밥을 먹었는데 양치도 안 하고 대화를 하는 건 좀 그랬다. 양치 도구는 없지만 손가락으로라도—.
“아, 이거 받으세요.”
“?”
묵범이 서류 가방에서 반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내 도화에게 던졌다. 가볍게 낚아챈 도화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바로 화장실로 갔다. 묵범이 준 것은 칫솔과 치약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