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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28화 (29/146)

28화

“새 파트너는 잘 있고?”

“집에서 나오질 않는 걸 보면 새집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문을 두드린 도화는 밤새 잠을 자지 않았는지 살짝 피곤해 보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묵범은 도화의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옷이 없나…? 아니면 원래 저렇게 생겨 먹은 옷인가?

‘보기엔 좋군.’

생긴 게 뭐가 문제인가. 눈이 즐거우면 다인 것을.

묵범은 어깨에 걸쳐져 한쪽 쇄골을 훤히 드러낸 도화의 티셔츠에 감사 인사를 했다. 엉덩이와 허리만 예쁜 줄 알았는데 쇄골도 두툼한 게 일직선으로 쭉 뻗은 모양이 빗장 같았다.

도화는 묵범이 제 드러난 어깨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필요한 물품이 적힌 종이를 내밀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잔뜩 날 선 모습만 보던 묵범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도화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셔츠만 그런 줄 알았더니 트레이닝 바지도 오래 입은 티가 났다. 아무리 여름 바지라지만, 너무 오래 입어서 천이 얇아진 탓에 몸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도화의 둥근 엉덩이 굴곡이 묵범의 눈을 어지럽혔다.

“어이. 묵범. 눈 뜨고 자냐?”

오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묵범은 강림 도령이 눈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 뜨고 잔 것은 아니지만, 잠깐 깊은 꿈을 꾼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혹시 도방… 아니, 홍도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왔습니다.”

“허어?”

강림 도령이 기가 찬단 눈빛으로 묵범을 쳐다봤다.

“네가 직접 데려와 놓고 나한테 그걸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저보다는 많이 알 것 아닙니까? 홍도화가 도방이란 이름으로 차사국의 방해했던 기간이 그리 긴데. 도령께서 그에 대해 조사를 안 했을 리 없지요.”

“흠.”

강림 도령은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웃었다.

“네가 아는 것부터 한번 들어 보도록 하지.”

강림 도령의 제안에 묵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홍도화에 대한 정보는 강림 도령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게 뻔한데 이쪽 패를 먼저 다 보이라는 말이 찝찝했다. 하지만, 묵범이 가진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은 또 손해였다.

“도령도 아는 것은 다 말해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다 말해 줄 테니 우선 네가 아는 것부터 말해 봐.”

묵범은 강림 도령의 저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것처럼 하면서도 절대 자신은 손해 볼 짓은 하지 않는다. 아마 지금 저리 말하는 것도 제게서 뭔가 캐낼 게 있으니 그러는 게 분명했다.

“도깨비 혼혈이긴 한데, 반은 어디와 섞인 건지 모릅니다. 다른 귀물과 섞인 것이라면 분명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고… 하지만, 인간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무기는 검. 본래 모습이 뭔진 모르나 크기를 자유자재로 줄일 수 있더군요. 검과 대화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대화? 대화하는 걸 들었어?”

강림 도령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물었다.

“듣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검을 든 상태로 말없이 표정만 바뀌는 걸 보면 대화하는 게 맞겠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묵범은 어쩐지 자신이 하는 말이 강림 도령에겐 없는 정보인 것 같아서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여우족 혼혈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은 도령도 저번에 봤으니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게 다이니, 이제 도령 차례군요.”

“정말 그게 다인가?”

강림 도령의 캐묻는 눈빛에 묵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도령은 들고 있던 술잔을 한입에 탁 털어 넣고 자신이 가진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반도깨비 도방. 이번 계약으로 본명이 홍도화로 알려졌고. 나이는 약 600살. 더 먹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부모 중 한쪽이 도깨비인 건 확실한데 도깨비를 털어 봐도 혼혈을 낳았다는 도깨비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더군. 나머지 반쪽은 아예 무슨 종족인지 감도 못 잡는 상황이야.”

“600살이라. 햇병아리군요.”

“어리긴 한데…. 고생을 꽤 해서 그런가 애다운 맛이 없어.”

강림 도령은 이 자리에 도화가 있었다면 기가 찰 소리를 잘도 했다. 이쪽 세상에서 600살이면 어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애다운 맛이 없단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고생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뭐… 짐작은 갑니다.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지성이 있는 귀물은 핏줄을 중시하고 종족에 큰 의의를 둔다. 그 성질이 강하든 약하든 간에 혼혈을 배척하는 건 동일했다.

그래도 귀물 중 배척이 가장 심한 종족이 있는데, 그게 도깨비이다.

귀물이 생긴 이래 제일 먼저 이성을 갖고 지성을 얻은 종족이기에 그들은 도깨비란 종명에 엄청난 자긍심을 가졌다. 우월주의를 가진 것은 아니나 도깨비의 피에 다른 피가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데 정체도 모를 종족의 피가 섞였다? 이건 도깨비들에겐 배척을 넘어서 죽자고 달려들 법한 사건이었다. 힘 있는 귀물은 귀계뿐 아니라 인간 세상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홍도화가 햇병아리라지만, 하계에서 600년을 살았으면 꽤 큰 부를 쌓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도깨비들의 방해가 컸던 탓일 것이다.

좁아 터진 원룸에 재활용센터에 내놔도 안 받을 가구, 고물 컴퓨터, 낡은 옷 등등. 도깨비의 영향이 꺼지지 않는 이상, 홍도화의 가난은 영원할 게 자명했다.

“그래도 용케 목숨은 부지했군요.”

“용케가 아니라 실력이 있어 살아남은 것이지. 도방이 차사국의 공무 집행을 방해한 세월이 벌써 수백 년이나 됐는데 우리도 정보가 접싯물 정도니, 도깨비는 아예 바닥 수준일 거다.”

“하긴. 성난 도깨비가 그동안 혼혈을 내버려 뒀을 리가 없겠군요. 또 다른 건 없습니까?”

“네가 홍도화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는 그 검.”

“아, 그거요. 대체 그건 무슨 검입니까? 생긴 것은 특별해 보이지 않던데.”

묵범의 질문에 강림 도령은 두 눈을 반짝이며 되려 반문했다.

“오방대제의 무구는 알고 있겠지?”

“설마 오방대제 중 한 명의 무구였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묵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계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신수라 하여 청룡, 주작, 백호, 현무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 중앙을 다스리는 중앙 황제 황룡까지 더하여 오방대제라 부른다.

하지만, 황룡을 제외한 사신은 모두 속계의 굴레에 든 지 오래. 고로 사신이 쓰던 무구도 당연히 봉인되어 전설 속 이야기로 전해질 뿐이었다. 물론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자아를 지닌 신의 무구이기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세상에 나타날 리 없다.

“현무의 무구인 것 같더군.”

“현무? 설마요.”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으나 천지왕이 가끔 고지식하거나 꽉 막힌 자를 두고 ‘현무 같구나.’라는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천지왕이 그리 말할 정도의 성격인데 그런 현무의 무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반도깨비를 받아들이고 대화까지 한다는 건… 믿지 못할 일이었다.

“현천이라 불렀다는 보고가 있었어.”

“그냥 이름을 그리 붙인 것이겠지요.”

현무의 천체명(天體名)은 현천상제. 현무의 무구라서 현천이라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름이 멋있어서 붙여 줬을 수도 있었다.

“형태를 자유로이 바꾸고 소지자와 대화도 가능한 무구가 흔하다면 말이지.”

강림 도령의 조건에 맞는 검이 있던가…?

묵범은 자신이 보고 들은 다양한 무기를 떠올렸다. 형태를 바꾸는 것은 꽤 있으나 대화가 가능한 것은… 역시나 없다.

“나중에 홍도화의 검이 피를 먹는지도 확인해 보면 내 말이 틀린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검은 그렇다 치고.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은 없습니까?”

“불래의 여각주와 막역하게 지내는 건 알고 있을 것이고. 불래에서 받은 의뢰로 버는 돈이 꽤 되는데도 풍족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나?”

“돈을 꽤 법니까? 홍도화가?”

“수습 차사보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용케 도방을 파트너로 삼았네.”

강림 도령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웃었다. 비웃음도 살짝 가미되어 있었다. 하지만, 묵범은 그런 강림 도령의 웃음은 개의치 않고 어서 설명하라고 재촉했다.

“도깨비가 아무리 귀계와 하계에서 영향력이 커도 불래는 예외야. 여강진이 만든 귀맥鬼脈이 워낙 촘촘하거든. 가서 깽판은 칠 수 있겠지만, 뒷수습이 불가능하니 깨갱 하는 거지. 그런데 홍도화가 불래에서 받은 의뢰를 수행 중에 도깨비의 공격으로 다치거나 죽었다? 그러면 어찌 될 것 같아?”

“여강진과 막역한 사이이니, 도깨비는 아예 불래에 발도 딛지 못하겠군요.”

“여강진을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도방의 집까지 같이 갈 수 있던 거냐.”

내가 뭐라고 했더라?

묵범은 잠시 그때로 돌아가 뭐라 말했는지 떠올렸다. 기타 상담 4번을 누르자 상담원이 아니라 여강진 본인이 받았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한 말이….

[도방이 저와 하자고 해 놓고 연락이 되지 않는데, 집 주소를 아십니까?]

여강진이 숨을 참는 소리가 살짝 들렸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여강진은 도방이 그런 연락을 할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강진에게 도방이 보낸 문자를 전송했다. 그 과정에서 여강진의 개인 번호를 따냈다.

[‘하자.’와 ‘할게.’의 차이가 좀 크긴 하지만, 어쨌든 도방이 연락을 한 것은 맞군요. 도방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큰일이니 같이 갑시다.]

그렇게 해서 여강진과 함께 홍도화의 집으려 쳐들어간 것이었다.

“그냥 연락이 안 된다고 했더니 알려 줬습니다.”

굳이 저런 이야기까지 강림 도령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묵범은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여튼. 도깨비는 홍도화가 불래의 의뢰를 계속 받는 이상 손을 대지 못해.”

“그래도 지금껏 궁상으로 살고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거야 홍도화가 불래에서 버는 족족 불래에 쏟아붓고 있으니 그렇지.”

“……?”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저 흥미가 생겨서 곁에 두고 보려고 파트너로 데려왔는데 파면 팔수록 궁금한 게 계속 튀어나온다.

“이건 그의 개인 사정이니 내가 멋대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차사국이 언제부터 개인 사정을 봐줬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이제 와서 발뺌하면 방금까지 나눈 정보들은 개인 사정이 아니게 되나? 묵범이 비꼬듯 말하자 강림 도령은 들고 있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술잔에 남은 술이 사방으로 튀며 묵범의 뺨에도 몇 방울 튀었다.

“뭐? 꼽냐? 꼬와? 꼬우면 니가 국장 하든가.”

“…….”

웬일로 순순히 정보를 털어놓는다 했다. 그래도 이쪽이 털어놓은 정보에 비해 꽤 이득을 봤다. 그래도 좀 더 캐 보고 싶었으나, 더는 얻어 낼 정보가 없을 것 같았다.

묵범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뺨에 튄 술을 손으로 닦아 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바쁘게 일해야 할 거야. 도방을 파트너로 들였으니 썩고 썩은 악귀로 잔뜩 몰아주마.”

악귀가 따로 있나. 저런 게 악귀지.

묵범은 혀를 내두르며 술 창고에서 나가려고 문고리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아, 도령. 그거 압니까?”

“뭘?”

묵범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톡톡 치며 말했다.

“홍도화. 귀령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림 도령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입에서 그게 사실이냐는 고함이 터진 것은 잠시 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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