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27화 (28/146)

27화

도화는 엘리베이터를 자주 이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도 타지 않았다. 어쩌다 고층 건물에 가야 할 일이 생겨도 계단으로 이동했다. 체력 단련이 그 이유였다. 따로 돈을 내고 헬스장에 갈 여유가 없어서 선택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은 좀… 아니, 많이 어려울 듯싶다.

[대체 여긴 몇 층짜리 건물이길래 끝도 없이 올라가는 거지?]

현천도 도화와 같은 반응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30층을 지나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더 올라갈 데가 있는 거야?

도화는 긴장하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아파트 30층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계산하고 있었다. 1층 높이가 대략 3미터라고 하던데. 30층이면…….

간단한 계산인데 점점 땅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살면서 땅과 이렇게까지 멀어져 본 적은 처음이다.

이러다 엘리베이터가 건물을 뚫고 올라가는 거 아냐? 웃기지도 않은 상상을 하던 그때. 중력을 거스르는 묘한 감각을 주던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멈추는 게 느껴졌다.

-42층입니다.-

‘42층…?’

도착 층수를 알리는 안내음에 도화는 캐리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3미터씩 42층. 그러니까….

아, 모르겠다. 도화는 계산하길 멈추고 우선 이 답답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리기로 했다. 먼저 내린 묵범은 도화가 내리길 기다렸다.

“여기야…?”

“그렇습니다. 42층은 추혼부에서 사택으로 매입한 곳인데 입주한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이제 당신까지 둘이 되었군요.”

“그러니까 여기가 내가 지낼 곳이라는 거네?”

도화는 어느 문이 자신이 살 집의 문인지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넓은 공간에 현관문이라고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 있는 긴 복도를 돌면 하나 더 있을 것 같은데, 저쪽인가?

그런데 현관문치고 문이 너무 크고 웅장했다. 보통 외방향 문인데 저건 양방향 문이었다. 멋지지만 부담스러웠다.

“맞습니다. 저기가 제가 사는 집이고, 당신도 같이 살 집입니다.”

“같이 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따로 제공하는 거 아니었어? 도화의 눈썹이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관만 공동 사용이니까요.”

“……?”

그런 집이 있어? 도화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묵범을 노려보았다. 집을 지을 때부터 설계를 그렇게 한 집이라면 모를까. 이런 아파트에 그런 게 될 리가.

“비밀번호는 들어가서 알려드리지요. 지문 인식은 나중에 추가 설정하고요.”

묵범이 지문으로 문을 열며 말했다. 도화는 가방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원룸 열쇠를 떠올렸다. 웅장하게 생긴 현관이 열리는 광경을 보자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다.

“이쪽이 제집으로 가는 문이고, 당신과 담마는 저쪽 집에서 지내면 됩니다.”

현관문을 지나니 두 개의 현관이 또 나왔다. 아,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는 거구나. 묵범의 말을 뒤늦게 이해했지만, 저 거대한 현관문이 두 거주지를 한데 묶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안에서 갈라져도 어쨌든 현관문 하나는 공용이란 소리니까.

“기본적인 가구는 다 채워져 있습니다. 바꾸고 싶거나 더 살 것이 있으면 적어 두었다가 신청서를 작성해서 자재부에 제출하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에 있을 테니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요.”

묵범은 직접 확인해 보라며 더는 설명하지 않고 뒤로 빠졌다. 자신이 이것저것 알려 주겠다며 도화의 집으로 먼저 들어갈 것 같던 묵범이 내일 보자며 본인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뭐지?”

도화는 묵범이 들어간 현관문을 잠시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지금 저 자식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당장 새로운 집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었다.

“가자.”

도화는 한 손에는 담마의 손을, 다른 손에는 낡아 빠진 캐리어를 끌고 오늘부터 자신의 집이 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거실 소파에 앉은 묵범은 자꾸만 현관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가구를 더 채워 둘 걸 그랬나.”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게 기본적인 집기는 넣어두었다. 나머지는 취향에 맞게 채워 넣으면 될 테지만, 너무 휑한 풍경에 놀랄지도 모른다.

“알아서 하겠지.”

내가 거기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으니까.

묵범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파에 눕듯 기대었다. 먼저 문자를 보내 놓고 감히 연락을 안 받는 괘씸한 녀석을 쫓으러 집을 나설 때는 그토록 목이 타더니 지금은 괜찮아진 것을 묵범은 인지하지 못했다.

“옆에 잡아다 뒀으니 슬슬 일이 밀려들겠군.”

감직부와 추혼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때는 워낙 감직부 직무량이 살인적으로 많아서 추혼부 일이 적게 배정되었었다.

추혼부도 감직부와 마찬가지로 2인 1조로 움직인다. 현재 묵범은 공식적으로 파트너가 없는 상황. 김 차사와 그리 틀어지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감직부에서 잘렸음에도 묵범이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 강림 도령에게 자신의 파트너가 될 자를 직접 소개하고 계약서까지 쓰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 추혼부 일이 밀려들어 온 것은 당연했다.

-띠링.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물건을 현관 앞에 두었다는 산월의 메시지였다.

‘물건 가져다주면서 살짝 들여다볼까?’

비좁은 원룸은 비교도 못 할 만큼 큰 집으로 온 소감도 물어볼 겸 도화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 일어난 묵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 같은 자인데 첫날부터 영역 침범을 하는 우를 저지를 순 없었다. 호랑이든 고양이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결투 신청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고양이도 할퀴면 아픈 법이지.”

그는 조용히 바깥 현관으로 나가 쌓여 있는 상자와 보따리를 도화의 현관으로 옮겨 두었다. 상자에 ‘묵범 님’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은 몇 개만 들고 돌아온 그는 도화에게 현관을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한동안 저 큰 집을 채우려면 고생 좀 할 것이다.

* * *

“현관을 보라고?”

묵범의 메시지를 받은 도화는 텅 빈 냉장고를 보고 멍하니 서 있는 담마를 뒤로하고 현관으로 갔다. 첫 만남부터 묵범에게 당한 짓을 잊지 않은 도화는 현관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탁.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무언가에 걸린 게 느껴졌다. 뭐지? 좀 더 힘을 주어 여니 지익- 하고 바닥에 밀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만 빼서 밖을 살피자 눈에 들어온 것은 산월관에서 보았던 비단으로 포장된 상자와 보따리였다. 그리고 보이는 곳에 종이 하나가 붙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렇게 문을 빼꼼히만 열고 살필 것을 예상하고 붙여둔 듯한 위치였다.

산월이 보낸 게 도착하여 옮겨 둡니다. 담마 옷도 같이 가져왔어요. 냉장고가 자리가 부족하면 한 대 더 주문하세요.

“…냉장고를 더 주문하라고?”

저승차사들은 씀씀이가 원래 이런가? 자재부에 신청만 하면 다 내어주니 경제 관념이 엉망인가 보다. 마지막 문장을 보고 혀를 찬 도화는 좀 더 현관문을 밀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건 무슨 신종 괴롭힘 방법이냐고 짜증을 내며 안 열리는 문과 씨름을 했을 테지만, 도화는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산더미네.”

문이 묵직하게 밀린다 싶더니 상자로 안에서 못 열게 막아둔 것처럼 바리케이드를 쳐 놨다. 도화는 한 번에 몇 상자씩 들어 주방으로 옮겼다. 순식간에 대형 아일랜드 식탁이 비단 상자로 점령되었다.

[이, 이게 다 무어냐?]

[뭐긴. 아까 산월관에서 보내온 거지.]

우선 담마의 옷이 든 비단 보따리만 따로 모아 담마가 쓸 방에 옮겨 두었다. 도화는 휴대폰 메모 어플에 ‘담마가 쓸 옷장’을 적었다. 묵범이 말했던 것처럼 집은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아주 기본적인 가구만 있어서 난감했다. 담마의 방도 침대만 덜렁 있고 옷장은 없었다. 그나마 침대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다 뭔가요?”

텅 빈 냉장고를 닫고 식탁으로 온 담마가 물었다.

“산월관에서 보내온 건데… 아마 음식이 들어 있을 거다.”

[이잉? 이보게. 도화. 나한테 설명했던 것과 너무 온도 차이가 나는 거 같은데?]

[네가 애냐? 다 늙은 고철 주제에.]

[허어. 비통하도다. 젊은… 아니, 어린 것이 들어왔다고 찬밥 신세가 되다니.]

애초에 넌 찬밥이었다고 말하려던 도화는 현천이 의외로 뒤끝이 길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리하고 밥 먹자.”

“네. 도와드릴게요.”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아니지만, 산월관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배가 고팠다. 담마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던 걸 보면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그래서 빠른 손놀림으로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도화의 메모 어플에는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 그리고 냉동고까지 추가가 되었다.

* * *

저승으로 향하는 묵범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앞서 걷던 차사들은 묵범이 옆을 지나갈 때 흠칫흠칫 놀랐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서였다. 묵범은 이름처럼 거대한 흑호가 발소리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파트너가 드디어 생겼다면서요?”

맞은 편에서 오던 차사 하나가 묵범에게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벌써 소문이 다 났군요. 도령께서 그리 말씀했습니까?”

“예. 국장님이 드디어 당신을 부려 먹을 수 있겠다며 아주 신이 나셨더라구요.”

“이런. 절 부려 먹으려면 앓는 소리를 할 부서가 하나둘이 아닐 텐데.”

“하하.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요. 우리야 망할 것들을 때려잡기만 하면 되니까요.”

“맞는 말입니다.”

짧게 대화를 나눈 묵범은 좋은 하루 되시라는 인사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국장실. 강림 도령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 왔나?”

들어가니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가려져 목소리만 들렸다. 묵범의 방문에 그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 돌릴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이야기 많지?”

“많지요.”

“좋아. 한잔하면서 말해 봐.”

창문 밖을 보니 훤한 대낮이다. 백주부터, 집무 시간에 술을 마시자는 강림 도령의 행동은 차사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일상이었다. 묵범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림 도령은 집무실과 이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간 묵범은 익숙하게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이곳은 강림 도령의 술 창고였다. 집무실과 붙어 있는 게 이상한 방이지만, 주인이 강림 도령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했다.

강림 도령은 양손에 길쭉하고 반투명한 병을 하나씩 들고 테이블로 왔다.

“새 술이 들어왔는데 맛 좀 볼래?”

“운전해야 해서, 향기만 즐기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대리 부르면 되지.”

술은 즐기지 않지만, 강림 도령의 술 취향은 썩 괜찮아서 가끔 어울리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국장실뿐 아니라 자재부와 경리부도 들러야 했다. 그의 주머니 속엔 아침에 도화가 맡긴 필요한 물품 목록이 들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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