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혹시, 나 주려고?
도화는 내심 기대했다. 왜 고기를 안 먹냐고 타박했던 놈이니 버섯은 싫어할 것 같았다.
다른 반찬이 많아서 그런가 송이버섯구이는 양이 많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 시절 먹던 맛과 같았다면 그냥 과거 회상 좀 하고 끝났을 텐데. 이건 지금껏 먹어 본 음식 중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우울한 옛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주면 못 이기는 척 받아야지 기다리던 도화는 이어진 묵범의 행동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 이게 정말 맛있습니까?”
묵범은 접시를 든 상태로 버섯을 제 입에 넣어 버렸다. 도화가 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먹은 것 같은데, 영 입맛에 맞지 않는지 인상까지 쓰며 씹었다.
“전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당신이 드세요.”
주면 못 이기는 척 받으려던 도화는 기분이 상해서 묵범이 내민 접시를 받지 않았다.
“미쳤냐? 남이 먹던 걸 먹게?”
“새 젓가락이었고 다른 버섯엔 닿지 않게 제일 위에 있는 것 하나만 집었습니다만…. 제가 손댄 게 싫으면 도령의 것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먹으라고 들이밀 것 같았던 묵범은 쿨하게 제 접시를 내려놓고 강림 도령의 상에 있는 버섯 접시를 집어 도화의 상에 올려놨다.
“…….”
이걸 먹어, 말어?
잠시 고민하던 도화는 버섯 접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다른 나물을 집었다. 가만히 앉아 도화를 지켜보던 묵범은 소리 나지 않게 피식 웃었다.
도화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식사하기 시작하는 묵범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다.
‘무슨 젓가락질을 저렇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무 잘해서였다. 게다가 길쭉한 젓가락 못지 않게 묵범의 손가락도 길쭉하니 보기 좋았다.
‘아니야. 정신 차려. 젓가락질을 아무리 잘해 봤자 변태는 변태인 거야. 젓가락질 서툴고 정상인 게 낫지.’
도화는 자꾸만 묵범의 손으로 가려는 시선을 애써 밥그릇에 고정했다. 시선을 붙잡아 두느라 밥에 있는 밤과 잣 골라 먹기에 집중했다.
달그락.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묵범은 식사를 다 마친 상태였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비워진 접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고기반찬이었다.
“입맛이 없어 보입니다. 산월관이 음식을 어르신들 입맛 위주로 만든다는 걸 제가 깜빡했군요. 다음에 올 때는 요즘 유행하는 하계 음식으로 해 달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딱히 입맛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고관대작들이나 먹던 음식이 한가득해서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묵범의 젓가락질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면 이만 일어날까요?”
“벌써?”
도화는 밥그릇을 아직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남은 지 때문에 진수성찬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지는 배부르다고 일어서?
“혹시 나중에라도 먹고 싶을지 모르니 포장해 달라고 할까요?”
“됐어.”
배는 고팠지만, 자존심이 허기를 이겼다. 모양 빠지게 포장은 무슨. 예전의 도화라면 포장은 물론이고 고깃국물까지 싹싹 부어 달라고 했겠지만, 통장도 두둑해졌고 엄청난 보수와 복지를 자랑하는 직장에 취업한 이상 그런 궁상은 떨고 싶지 않았다.
물론 묵범 앞에서만 그럴 것이다. 도화는 ‘아껴야 잘산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고기를 싫어하나?’
도화는 묵범에게 어떤 오해를 샀는지도 모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앉아 있다간 음식 냄새 때문에 다시 젓가락을 잡을 것 같았다. 도화가 일어서자 묵범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로 가실까요?”
“새로운 보금자리?”
“바로 사택으로 가려고 집을 빼 온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아직은 거기가 내 집인데.”
“그 난장판을 쳤으니 아마 집주인이 먼저 방을 빼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긴. 그 난리를 쳐 놨는데 깐깐한 집주인이 봐줄 리 없겠지. 도화는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금껏 전전해 온 집 중, 가장 살 만한 집이었던지라 아쉽긴 했다.
[그 집일랑 잊어버리고 보증금 받아서 얌전히 통장에 넣어 두시게. 저승차사 일을 하며 열심히 저축하다 보면 한강에 63빌딩이 보이는 근사한 아파트를 살 수 있지 않겠나?]
현천까지 가세해서 아예 보증금을 빼 버리라고 제안했다. 듣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아직 가 보진 않았지만, 수도권 25평형 아파트를 무상 제공해 준다는데 비좁은 원룸을 붙잡고 있는 건 좀 아니긴 했다. 차사 일을 언제까지 할진 모르지만, 월세로 피 같은 돈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어머. 벌써 가시려고요? 후식을 내오라고 할까요?”
때마침 산월이 누각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담마도 보였다.
“후식은 됐습니다.”
후식은 됐다는 묵범의 말에 도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본식도 이렇게 맛있었는데 후식은 얼마나 맛있는 게 나올까. 궁금했으나 차마 먹고 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
“담마. 이리 와. 집에 가자.”
도화의 부름에 담마가 쪼르르 그의 옆으로 와 섰다. 산월이 담마에게 입힌 옷은 노란 개량 한복이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치마는 활동하기도 좋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계좌번호와 옷값을 알려 주시면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도화가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산월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주인 없는 옷이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담마가 입어 주어 제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렇게 말한 산월은 세 개의 교자상을 한번 훑고는 조심히 내려오시라며 먼저 누각을 내려갔다.
“가지.”
“가 볼까요?”
도화는 계약서를 집어 들고 담마를 안았다. 담마가 조용히 도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도화는 그리하라며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도화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혹여 담마가 아까 자신처럼 연꽃향에 현혹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을 보면 담마는 멀쩡한 듯했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어둑한 밤하늘이다. 마치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각 유리등이 밝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어느새 솟을대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는 산월이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비단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싼 상자와 보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묵범이 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보따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산월에게 물었다.
“손님께서 자리가 자리인지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신 듯하여 좀 더 준비해 보았습니다. 강 국장님 앞에서는 물만 마셔도 체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이건 음식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것은 아이 옷이에요. 요즘 하계의 옷은 마감이 시원치 않아서 입을 만한 옷으로 골랐습니다.”
산월이 도화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상자가 아닌 비단 보따리는 모두 담마의 옷인 듯한데 양이 상당했다. 한두 벌이면 모를까. 옷장 하나를 채울 정도로 많은 양은 받기 부담스러웠다. 그런 도화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산월이 말을 덧붙였다.
“모두 새 옷은 아니니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안 입는 제 옷을 수선하여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자투리 천으로 만든 것도 있어요. 아이가 참하여 선물을 주고 싶은데 마침 아이에게 딱 맞는 옷이 있던 것뿐입니다. 사양 말고 받아 주시어요.”
산월의 상냥한 목소리가 도화의 부담을 살살 녹였다.
[거 받지 그러나. 비단 보자기만 봐도 질이 엄청 좋아 뵈는데. 담마도 공장서 기계로 만든 것보다 저걸 더 입고 싶어 할 게야.]
현천도 어서 받으라고 도화에게 말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과한 선물 받는 건 역시나 부담스럽지만, 저걸 돈으로 환산하면…….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요.”
결국, 도화는 돈에 굴복했다.
“은혜랄 것까지야요. 그냥 아이가 잘 입어 주고, 손님께서 제 음식을 맛있게 드셔 주시면 된답니다.”
산월이 부채를 흔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음식이 든 상자와 옷 보따리는 차에 다 실을 수 없어서 따로 보내 주기로 했다.
산월의 배웅을 받으며 묵범과 도화는 하계로 돌아왔다. 내내 밤이었던 별천계에서 빠져나오니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공원 주차장이었다.
“자, 이제 사택으로 가 볼까요?”
“어.”
뒷좌석에서 달그락, 안전 벨트를 매는 소리가 들렸다. 노란색 고운 한복을 입은 난 담마가 내는 소리였다. 옆에 쌓여 있는 비단 보따리들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 게 새 옷이 잔뜩 생겨 신이나 보였다.
* * *
서울숲 공원에서 사택까지는 정말 가까웠다. 도로가 약간 막혔는데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수도권 내에 있는 아파트가… 여기였어?’
도화는 묵범의 차가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천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챘는지 난리가 났다.
[아아니?! 이곳은 연예인들이 산다는 그 유명한 아파트 아닌가?]
[설마…. 그냥 여길 통과해서 다른 아파트로 가려는 게 아닐까?]
이런 아파트가 외부 차량이 지나가게끔 오픈해 둘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화는 현실감이 없어서 되는 대로 말했다.
[아닐세. 분명 저자의 차량 번호가 인식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네.]
[귀도 없으면서 잘도 듣네.]
[이잇…!!]
차량 번호가 인식된다는 건 묵범이 이 아파트에 산다는 건데. 그렇다는 것은 여기가 사택이란 뜻이었다.
괜히 설레발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지 TV나 인터넷으로나 보던 꿈의 아파트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도화의 설레발은 묵범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내리시죠.”
“여기서?”
“여기가 싫으시면 다른 곳에 주차할까요?”
“아니. 내릴게.”
도화는 설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차에서 내렸다. 묵범이 주차한 라인에는 모두 억대를 호가하는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오로지 묵범의 차만이 국산이었다. 묵범의 차도 싼 것은 아니나 저 차들 끝에 세워져 있으니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면 한 대 드릴까요?”
“……?”
“아, 제가 몰던 거라 별로려나. 자재부에 원하는 차량을 신청하면 당일 출고될 겁니다.”
“…???”
“그러면 따라오시죠.”
묵범은 벙찐 도화에게 어서 따라오라며 손짓하며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