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디서 저런 인재를 점찍었나?”
고요함을 참지 못한 강림 도령이 적막을 깨고 묵범에게 물었다. 그러자 묵범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제가 촉이 좀 좋지 않습니까? 김 차사님과 망자를 데리러 가는데 빌딩 골목에서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바로 달려갔지요.”
“아~ 그래서 김 차사가 그날 차라리 파트너 없이 혼자 일하겠다고 난리를 부린 것이군. 자네가 오전부터 무단 조퇴를 했다고 길길이 날뛰어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무단 조퇴라니요. 저는 분명히 반차… 아니, 월차를 내고 정당하게 쉰 겁니다.”
“하, 세상에 월차를 출근까지 해서 당일 통보만 하고 빠져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나?”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쉰 게 아닙니다. 저기 유능한 인재를 스카웃해 오지 않았습니까?”
묵범이 열심히 계약서를 보고 있는 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도화는 계약서의 마지막 장을 읽고 있었다.
“마음에 들면 재지 말고 지장 찍지?”
빈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던 강림 도령은 도화가 계약서의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계약하기를 권했다. 도화는 대답 대신 계약서 첫 장만 빤히 쳐다봤다.
‘뭔가… 수정을 요구할 만한 조항이 아예 없어.’
계약서라 함은 갑과 을이 확실하게 적시되어 있고 불공정 항목이 하나쯤은 들어가 있는 게 정석 아닌가?
눈 뜨고 코 베이는 살벌한 세상에 이렇게 무한대로 퍼주겠다는 계약서는 처음 본다. 물론 지켜야 할 조항이 어마 무시하게 많긴 했지만, 도화는 그리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도화가 인간과 부대끼며 살면서 스스로 정한 규칙과 크게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었다. 좀 더 복잡하긴 해도 지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겠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차사국이 인간 기준으로 따지면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야. 아니지. 대기업도 이 정도 복지는 못 해 줄걸? 안 그러나, 묵범?”
“시끄럽고, 우선 지장부터 찍게 하지요.”
“아, 맞다. 지장 찍어야지.”
도화는 강림 도령이 인주를 꺼내 주길 기다렸다. 요즘은 지장보다는 도장을, 도장보다는 사인으로 계약하던데. 저승이 현대화가 많이 되었다고 해도 이런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저어, 인주는…….”
“응? 요즘 세상에 인주를 누가 쓰나. 고리타분하게.”
“……?”
지장 찍으라면서 인주를 안 쓰면 뭐로 찍으라고?
도화가 어이없어하자 강림 도령은 자신의 엄지를 척 올리더니 도화가 들고 있던 계약서를 향해 꾹꾹 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냥 엄지만 갖다 대면 알아서 찍혀.”
‘그런 게 가능하다고?’
도화는 반신반의하며 강림 도령이 하라는 대로 성명: (인) 이라고 쓰여 있는 곳을 찾아 엄지를 꾹 눌렀다. 그러자 종이에 닿은 부분에 종이 질감과는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종이가 아니라 거친 사포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이상해서 손을 떼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도화의 시야에 들어왔다.
“……!”
인주를 찍지 않았는데 (인) 위에 도화의 붉은 지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성명란에 붉은색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이어져 글씨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 저승의 골칫거리 도방의 본명이 홍도화였군.”
“어떻게 내 이름이…?”
지장은 손에 닿는 느낌이 뭔가 달랐으니 그렇다 치고. 성명란에 이름이 자동으로 적히는 것도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했으나, 극소수만 알고 있는 제 본명이 적히자 도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편법이나 불법으로 네 이름을 알아낸 게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불경하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도령께서는 제 본명을 알고 있던 겁니까?”
도화의 질문에 강림 도령은 가소롭다는 듯이 혀를 찼다.
“누구 마음대로 나를 도령이라고 부르지?”
“그야, 이 자식이 그리 불러서 그랬습니다.”
“이 자식이라. 그 호칭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내 앞에서 나를 도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내 위에 계신 분들밖에 없다. 이제 자네는 저승차사가 되었으니 나를 국장님이라 부르면 돼.”
‘국장?’
그러고 보니 아까 강림 도령이 설명 중에 ‘차사국’이라고 했던 것 같다.
“홍 차사. 자네의 본명은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으니 불신 가득한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기분 나쁘니까.”
강림 도령은 도화의 상에서 술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셨다. 어딜 봐도 미성년자인 외모로 술을 병나발로 마시는 모습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편의점 알바를 했었던 도화는 본능적으로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할 뻔했다.
“그 계약서는 대별왕께서 삼승할망께 부탁드려 만든 것이다. 계약 조건을 다 봤으니 알겠지만, 복지가 워낙 좋아서 차사가 될 깜냥이 안 되는 것들도 하겠다고 신분을 속이고 면접 응시를 하는 일이 잦아서 말이야. 수상쩍은 것들은 서류 심사에서 바로 탈락시키지만, 집요한 것들은 아주 가끔, 최종까지 통과하거든. 그래서 만든 게 그 계약서다. 지장을 찍으면 자동으로 본명이 적히도록 말이야.”
도화는 얼떨떨한 얼굴로 계약서와 자신의 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만약 자네가 하계에서 몹쓸 짓을 하고 다녔다면 계약서에 지장이 찍히는 게 아니라 철퇴가 찍혔을 거다.”
“…….”
“그러니 남은 계약서에도 어서 지장을 찍지그래?”
강림 도령은 오싹한 말을 즐거이 웃으며 말하며 도화의 술까지 바닥냈다. 도화는 강림 도령의 강요 어린 권유에 다른 계약서에도 지장을 찍었다.
“신입한테 너무 겁주지 마시죠.”
묵범이 강림 도령을 말리며 자신의 술을 건넸다. 강림 도령은 뻔뻔하게 제 것인 양 술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셨다.
“크. 역시 산월관 연화주가 최고라니까. 이 귀한 것을 세 병이나 독식했으니 내 볼일은 끝났군.”
강림 도령은 계약서 파일 하나를 서류 가방에 넣고는 묵범의 몫이었던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식사는 안 하십니까?”
강림 도령의 상은 술병 하나 빠진 것 외엔 변한 게 없었다. 도화는 계약서를 보느라 먹을 틈이 없었고. 그나마 묵범은 조금씩 손을 대긴 했다.
“밥이 보약이긴 하지.”
그는 옆구리에 낀 술병을 도화에게 흔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내겐 술이 밥이고 보약이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너나 많이 먹어. 몸이 좋아야 차사 일도 마음 놓고 맡길 텐데. 삐쩍 곯아 가지고. 쯧쯧.”
“……?”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가려는 강림 도령에게 인사를 하려고 일어서던 도화는 혹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왔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 말고 또 차사 계약을 하러 온 사람이 있는 건가?’
하지만, 뒤는 물론이고 어딜 둘러봐도 넓은 누각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여기 세 명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하신 말입니까?”
“그래. 여기 비쩍 곯은 놈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냐. 묵범 저 자식은 백년 천년을 굶겨도 절대 안 곯을 놈이야.”
도화는 ‘곯다.’라는 단어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었나, 고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보고 비쩍 곯았다는 말을 할 리 없었다. 아니면 강림 도령의 시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낮다거나.
“어쨌든. 난 해결할 일이 많아서 이만 가겠어. 이봐, 묵범.”
“네. 도령.”
“아, 씨. 도령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네. 국장님.”
불같이 화를 내는 강림 도령을 보고 도화는 앞으로 잊지 않고 국장님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외형과 달리 당장 칼부림이라도 할 것처럼 눈빛이 흉흉했다.
“신입이 도망가지 않도록 잘해.”
“그러도록 하지요.”
“알아서 잘하겠지. 직접 데려온 파트너니까. 그럼 난 간다.”
강림 도령은 바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빠른 걸음으로 누각을 내려갔다. 술을 세 병이나 마셨는데 휘청거림 없이 멀쩡한 걸 보면 연화주라는 술이 도수가 낮거나 강림 도령이 술이 세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신입이 도망가지 않게? 무척 블랙 기업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저 도령.]
주머니 속에서 얌전히 있던 현천이 불쑥 말을 걸었다.
[추혼부라. 꽤 고생 많은 부서라는 건 들어 봤지만, 평차사 만나는 것도 귀한 일이니 무엇 때문에 도망 운운하는지 모르겠구려. 도화, 자네. 괜찮겠나?]
[모르겠어.]
모르니 가만히 있는 것이다. 방금 지장을 찍은 계약서는 추혼부 차사 근로 계약서다. 저승국에 소속된 보통의 저승차사가 쓰는 계약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추혼부 차사’들만 쓰는 계약서였다.
그러고 보니 계약서가 좀 과하게 양이 많았다. 내용도 무력 사용 시 주의사항 지분이 굉장히 높았다. 얌전히 저승차사를 따라 저승으로 오는 망자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어쩐지 좀 찝찝하다. 도화는 옆에 놔둔 개인 보관용 계약서를 다시 살펴 볼까 하다가 내버려 뒀다. 어차피 하기로 마음먹은 거 이제 와 못하겠다고 하긴 싫었다.
‘진수성찬이나 즐기자.’
도화는 젓가락을 들어 아까부터 코끝을 자극하던 음식을 하나 집어 들었다. 도톰한 두께로 편 썰린 송이버섯구이였다. 고소한 참기름 향 속에 은은한 솔향이 도화의 입에 침이 고이게 했다.
입에 넣어 딱 한 번 씹었는데 은은하던 솔향이 입 안 가득 터졌다. 참기름의 고소함은 버섯의 진한 솔향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장이 숯불에 닿아 만든 풍미가 일품이었다.
커다란 상을 번쩍 들어 도화 앞에 내려놓은 묵범은 여러 종류의 고개가 담긴 접시를 가리켰다. 풀떼기 뜯지 말고 고기를 뜯으란 의미였다.
“많고 많은 고기반찬 중에 왜 풀을 드십니까?”
“자연산 송이잖아.”
“그게 왜요? 한여름에 송이 음식이 귀하긴 하지만, 그것은 하계에서나 그렇습니다. 이곳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이라 모든 식재료가 제철이지요.”
도화는 그런 묵범의 말은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다시 송이버섯구이를 입에 넣었다. 오늘 이후에 또 여길 언제 올 줄 모르니 가장 비싼 것부터 입에 넣는 것이다.
‘뭐…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솔향이 먼 옛날 모두에게 천대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심했던 시기는 아예 깊은 산에 고립되기도 했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 해도 끼니는 때워야 하는데, 음식을 사러 민가에도 내려가지 못하게 하니 하는 수 없이 산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때 먹었던 것 중 하나가 송이버섯이었다. 수북하게 쌓인 누런 솔잎 속에 흙을 뒤집어쓴 버섯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입에 넣었다. 솔잎과 흙을 제대로 털지도 않고 씹어 삼켰다.
그땐 어렸어서 무슨 맛인지 음미할 줄도 몰랐고, 오히려 독버섯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했었다. 다행히 탈은 나지 않아 그 뒤로 보이는 족족 송이로 배를 채웠는데.
요즘은 아무 산이나 들어가서 송이버섯을 따면 절도죄로 잡혀 간다고 하여 못 먹은 지 한참이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도화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묵범이 본인 상에 있는 버섯 접시를 집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