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24화 (25/146)

24화

청운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굉장히 높았으니 당연했다. 누각이 땅이 아닌 연지 위에 지어져서 계단 아래로 연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래를 보지 말고 위를 보게. 현혹되어 떨어지면 큰일 날 연지로고.]

도화의 상태를 바로 파악한 현천이 경고했다. 아까부터 은은한 연꽃향에 온몸이 푹 잠긴 기분이 들어 몽롱하던 참이었다. 자신이 계단을 걷는 것인지 연못 속을 걷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향기에 취해 있던 도화는 현천의 경고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화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꽃 향이 더욱 짙어져 제대로 된 사고를 방해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정신을 차리려고 입을 벌리려는데, 앞서 계단을 오르던 묵범이 갑자기 뒤를 돌며 말했다.

“힘들면 제 손을 잡으세요.”

손을 내민 묵범은 도화가 잡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덥석 도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내내 몽롱했던 도화는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화가 놀란 눈으로 묵범을 올려다봤다. 아직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의 눈이었다. 묵범은 상체를 숙여 도화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곳의 연꽃은 청운각에 오르는 자의 정신력을 시험하는 장치입니다. 제가 한 번 도와드렸으니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세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도화의 질문에 묵범이 힐끗 계단 아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연꽃 아래 있는 수많은 시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놀란 도화가 황급히 묵범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묵범이 크게 웃으며 도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왜 웃지? 내가 연꽃 밑의 시신처럼 될 뻔한 게 재미있나? 도화의 시선이 매섭게 변했다.

“시신이 있다는 것은 농담입니다.”

“뭐……?”

“연못이 깊긴 하나, 사람이 빠지면 연꽃의 정령들이 건져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시신이 없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나, 자신을 가지고 논 것에 화가 난 도화는 잡고 있던 묵범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덕분에 정신은 완전히 깨어났지만, 분노도 같이 치솟았다. 도화는 자신을 놀린 묵범을 밀치고 계단을 2칸씩 성큼성큼 올랐다. 가파른 계단이었지만, 길쭉한 도화의 다리는 2칸도 거뜬했다.

길고 긴 계단의 꼭대기에 오르자 탁 트인 전경이 들어왔다. 아래서 볼 때보다 규모가 더 크게 느껴져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저쪽이다.]

[저쪽?]

현천이 방향을 알려 줬지만, 주머니 속에서 ‘저쪽’이라고 말하면 어느 쪽을 말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도화는 현천의 말을 대충 흘려넘기고 누각에서 기다리고 있을 강림 도령을 찾았다.

“여기입니다.”

말소리가 난 곳은 누각 한가운데였다. 묵범처럼 슈트 위에 도포를 걸친 소년이 도화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자가… 강림 도령?’

소문으로만 듣던 강림 도령을 직접 보게 된 도화는 그의 외관이 생각보다 많이 어린 것에 살짝 놀랐다. 도령이라 해서 막연히 댕기 머리를 한 한복 입은 청년을 상상했는데 이게 웬걸? 강림 도령은 15세~16세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TV에 나와도 될 법한 고운 얼굴에 머리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로 손질되어 있었다.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단 말을 질리도록 들을 법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악의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웃는 낯으로 도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무해한 분위기의 사람이구나. 도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긴장과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마 묵범이 아니었다면 먼저 가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을 터였다.

다행히도 뒤따라온 묵범이 도화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누각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어찌나 빠른 걸음이던지 도화는 뛰다시피 그에게 끌려갔다.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도령.”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는 묵범의 표정은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묵범과 함께 고개를 숙인 도화의 얼굴이 더 죄송스러운 표정이었다.

“죄송스럽단 사람의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강림 도령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서 앉으라고 손으로 바닥을 탁탁 쳤다.

“음식은 곧 나올 터이니 우선 이야기부터 나누지요.”

도화와 묵범이 자리에 앉자 강림 도령은 옆에 둔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와 펜을 꺼내 작은 팔각 찻상 위에 올렸다. 그는 친절하게 웃는 낯으로 도화에게 서류 파일 2개를 내밀었다.

“추혼부 차사 고용 계약서입니다. 천천히 쭉 읽어 보시고 둘 다 지장 찍으시면 됩니다.”

도화는 고용 계약서를 받아 들며 생각했다. 참으로 친절한 저승차사구나.

말이 차사이지, 강림 도령이면 국장급 인물이 아니던가. 저승에 대해 잘은 모르는 도화도 강림 도령이 저승 시왕 직속 수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묵범이 그런 강림 도령에게 기함할 말을 던졌다.

“도령. 왜 안 하던 짓을 합니까?”

“?”

[이보게. 도화. 연꽃 향에 미혹된 것은 자네가 아니라 저치인 것 같네만.]

강림 도령 앞이라 조용히 있던 현천도 묵범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에 놀랐는지 입을 열었다.

[미혹이 아니라 미친 거 같은데?]

[흠…. 그래도 미친 것까진 아닌 것 같—.]

“도령도 슬슬 저승 시왕 품으로 갈 때가 된 것 아닌지요.”

[미친 게 맞는 것 같네.]

도화보다 묵범을 좀 좋게 봐주려던 현천은 이어진 묵범의 시비에 미친 게 맞다고 정정했다. 그런데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아~ 신입 앞에서 무게 좀 잡아 보려고 했더니 초를 치네?”

“……?”

강림도령의 낯에서 친절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짜증 어린 표정으로 한껏 일그러졌다.

“오래 유지하지도 못할 거 그냥 하던 대로 하시지요.”

“젠장. 저자가 계약서에 지장을 찍지 않는다면 다 네놈 탓이다.”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영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도령 탓이겠지요. 연봉이나 인센을 상향하든가, 상여금을 저승 시왕급으로 주든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끌어와서 지장을 찍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쭈? 이 새끼 봐라? 네 돈 아니다 이거지?”

강림 도령이 빠득, 이를 갈며 묵범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어찌나 살벌한지 이를 가는 게 아니라 묵범을 갈아 버리고 싶은 눈빛이었다.

“제 돈이면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저라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겁니다. 이런 유능한 인재를 놓칠 순 없지요.”

묵범이 자신 있게 웃으며 도화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순간, 도화의 머릿속에 언젠가 스치듯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상황은…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온 자리 같구먼.]

[닥쳐.]

도화는 할 수만 있다면 현천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으나, 현천은 입이 없기에 손톱으로 현천이 들어 있는 주머니 위를 세게 눌렀다. 후벼 팠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으, 으어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거 같으니까 이제 좀 조용히 해.]

[알겠…네. 그러니까 손 좀 떼시게.]

원귀나 악귀의 귀기 서린 공격은 잘만 막아내면서 엄살은. 고철 덩어리 주제에 연기 하나는 끝내준다며 속으로 생각했다.

현천이 조용해지고 도화가 저승차사 고용 계약서를 딱 한 장 넘겼을 때였다. 산월이 뒤에 하인을 여럿 달고 누각 위로 올라왔다.

“많이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눈썹까지 아래로 늘어트리며 사과를 한 그녀는 뒤따라온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차리거라.”

산월의 명령에 뒤에 있던 하인들이 들고 올라온 상을 세 사람 앞에 하나씩 펼치고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1인 1상이었지만, 상 크기가 4명은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교자상이었다.

하나, 둘, 접시가 올라올수록 도화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게 패었다. 양이 좀 많은 게 아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이란 말이 이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산월은 셋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누각에서 내려갔다. 수십 명 정도 되는 하인들도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저 많은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는데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넓은 누각에 삼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도화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 명은 몇 번 안면은 텄으나 변태였고, 한 명은 스승님의 원수가 속해 있는 집단의 실세이다. 어색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하지만, 제대로 어색할 틈도 없이 강림 도령이 도화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시장할 테니 한술 뜨고 계약서를 보면 좋겠지만, 내가 너무 바빠서 말이야.”

그러니까 식사할 생각은 하지 말고 빨리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라는 소리였다. 도화는 묵범이 미친 게 아니라 강림 도령이 또라이였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쭉 읽어 봐. 연봉이나 지원은 하계의 어느 대기업을 가도 받지 못할 수준이라고 자부하지.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게 아니야.”

강림 도령은 자신이 넘쳤다. 마치 ‘네가 감히 이런 기회를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조건이 진짜 미친 수준인데…? 이게 돈이 다 어디서 나는 거지?’

묵범이 말했던 것은 여러 조건 중 큼지막한 것들이었다. 유류비부터 반려동물 병원비, 의복, 가전제품, 미용 등 아주 기초적인 의식주를 넘어서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지원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쯤 되면 강림 도령이 스승의 원수라 확실하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정신 차려. 홍도화. 넌, 정보를 얻기 위해 잠시 원수와 손을 잡는 것뿐이야. 이런 물질적인 것에 혹해서 넘어가는 게 아니라고. 절대로!’

절대로 아니라고 부인해도 자꾸만 계약서에 눈이 갔다.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조건 관련 페이지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물론 조건이 어마어마하니 제약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제약이라 봤자 망자, 원귀, 악귀를 잡을 때 주의할 점이라거나 평범한 인간 앞에서 해선 안 될 행동에 관한 것일 게 뻔했다.

[계약서는 무조건 꼼꼼하게 살펴라. 도화.]

[알았어.]

도화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차를 마셨다. 어차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시간을 질질 끌 필요는 없다. 그래도 계약서를 아예 안 보는 건 계약서를 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니 속독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강림 도령은 빠르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도화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묵범은 바른 자세로 앉아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술 마시는 소리가 고요한 누각에 울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워낙 넓은 공간이라 소리가 증폭되어 고막을 간지럽혔다.

속독으로 계약서를 훑어도 양이 워낙 두툼해서 생각만큼 빠르게 줄어들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