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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23화 (24/146)

23화

분명 서울숲 공원 주차장을 돌고 있었는데. 앞에 보이는 것은 숲이 아닌 거대한 솟을대문이었다. 솟을대문 양옆으로 늘어진 행랑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행랑채 칸칸마다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냥 격식을 차리느라 세운 행랑채가 아니란 뜻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밤이었다. 방금까지 해가 중천에 뜬 벌건 대낮이었건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너무나도 깨끗한 밤하늘이 별을 품고 반짝였다. 가로등이 없어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워낙 밝아 밤 사위를 훤히 밝혔다.

넋을 빼고 주위를 살피던 도화는 묵범에게 트렁크를 열어 달라고 했다. 여기가 어디인진 모르나 상의 탈의를 한 채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캐리어에서 최대한 멀쩡한 티셔츠를 꺼내 입고 다시 높게 치솟은 솟을대문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곳에서 일하는 하인이 몇이란 말인가.’

이렇게 거대한 한옥을 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저 양반댁이란 말로 설명될 규모가 아니다. 임금이 살 법한 궁궐 같았다. 하지만, 궁궐이라 해도 솟을대문이 너무 높다. 보통 말을 타고 지나가면 행랑 마당이 보일 정도의 높이로 짓는데, 이건 말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 넘을 수 없을 높이였다.

도화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행랑채 벽에 넋을 빼놓고 있을 때 솟을대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묵범 진인?”

아, 깜짝이야.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도화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화에게 안겨 있던 담마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솟을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오방색이 조화로운 한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누구지? 댕기 머리인 것으로 보아 혼인한 여인은 아닌 듯한데….’

요요한 생김새의 아담한 여인은 댕기로 곱게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담청색과 훈색 비단으로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댕기 끝에 화려한 보석이 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복도 그냥 한복이 아니었다. 소매 끝동과 깃, 고름과 치맛단까지 희디흰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생이 듬뿍 묻어난 의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산월.”

묵범이 여인을 산월이라 부르며 끌어안았다. 산월도 반가워하며 묵범의 등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묵범이 워낙 기골이 장대하여 산월의 손은 묵범을 온전히 끌어안지 못했다.

“발길이 너무 뜸하시어 누구신가 했습니다.”

“하하. 쉽게 잊힐 낯을 가진 제 잘못입니다.”

묵범은 도화와 함께 온 걸 잊은 건지 산월의 손을 붙잡고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산월도 손님은 묵범만 보이는 것처럼 도화와 담마에겐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있던 도화는 담마에게 말했다.

“가자. 담마야.”

가자는 말에 담마는 어디로 가냐고 묻지도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화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곳은 불래나 백화대 병원 귀물 병동처럼 인간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인 것 같았다.

‘들어오는 방법이 있으니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

꼭 묵범의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성큼성큼 크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도화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딜 갑니까?”

묵범이었다. 돌아보니 산월도 묵범의 옆에 서 있었다. 말간 눈동자로 도화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더니 부채로 입을 가렸다.

어차피 웃는 걸 다 보여 놓고 가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여인도 선계의 사람 같은데. 선계 출신은 다 이런가?

도화는 인상을 쓰고 산월을 쳐다봤다. 기분 나쁨을 숨길 생각은 없다. 저쪽에서 먼저 무시했는데 뭐가 좋다고 예의를 지키겠는가.

도화가 산월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공손히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별천계 산월관의 관주 산월이라 하옵니다.”

“…도방이라 합니다.”

도화는 본명 대신 별호로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묵범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본명을 처음 보는 여인에게 알려 줄 순 없었다.

도화의 소개를 들은 산월은 눈웃음을 치며 묵범에게 말했다.

“묘한 동행인을 모셔오셨군요.”

“우리 도방 선생이 묘하긴 하지요. 너무 묘해서 가짜일까 봐 자꾸 만져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머. 그 정돈가요?”

우리? 우리이? 네놈이 나와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우리래? 이 새끼가 미쳤나? 도화가 도끼눈을 하고 묵범을 노려보았다. 같이 일하자고 부른 게 아니라 사람 엿 먹이려고 부른 거 아냐?

이쯤 되니 묵범이 말했던 조건들도 다 거짓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의 언행에서 진정성을 엿볼 수가 없었다.

[현천. 여기서 나가는 방법, 알아?]

[허허. 내가 그걸 알면 당장 자네에게 알렸겠지.]

[그러면 여기가 어디인진 알아?]

[이곳은 선계와 하계 사이에 자리 잡은 공간 같구려. 내가 봉인되어 있는 사이에 이런 곳도 생겼나 보군. 기운은 참 좋은 곳일세.]

터가 좋은가?

현천은 도화와 달리 기분 좋은 듯했다. 도화가 느끼기에도 이곳은 공기부터 하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각한 대기 오염 속에서 한참을 살다 이곳에 오니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실례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까는 묘한 손님이라더니. 은근슬쩍 말을 바꾼 산월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도화는 예고도 하지 않고 제 팔을 덥석 잡는 묵범 때문에 흠칫했다.

묵범은 그런 도화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솟을대문 안으로 잡아끌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한 덩치 하는 도화가 질질 끌려갔다.

“우리가 좀 늦었습니다.”

“늦다니…?”

마치 먼저 선약을 잡은 사람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강림 도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

묵범에게 끌려가던 도화가 큰 소리를 내며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도화의 품에 안겨 있던 담마도 놀라서 묵범과 도화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머. 눈이 아주 예쁜 여우군요.”

산월이 담마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보고 감탄했다. 하지만, 감탄은 짧았다. 그녀는 담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찌 여아를 이리도 헐벗겨 다니십니까?”

산월은 담마가 너무 측은해 보였는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가. 이 언니와 함께 예쁜 옷을 고르러 가지 않으렴?”

산월의 제안에 담마가 도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를 따라가도 될지 허락을 구하는 몸짓이었다.

“이곳은 위험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담마도 산월을 저어하지 않는 듯하니 맡겨 보시지요.”

묵범이 괜찮다며 도화에게 말했다. 도화는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산월을 가만히 쳐다보다 조용히 그녀에게 담마를 건넸다.

“신발이 없어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선 신발부터 골라야겠군요.”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랄 것까지요. 아이는 걱정 마시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도령께서는 청운각에 계십니다.”

산월은 도화와 묵범을 행랑 마당으로 안내하고는 담마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산월이 사라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사각 유리등을 든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둘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청운각으로 뫼시겠습니다.”

많아 봤자 10살은 넘지 않아 보이는 남아가 길을 앞장섰다. 도화는 묵범보다 몇 걸음 뒤에서 천천히 뒤따랐다. 발걸음은 느긋했으나 도화의 눈동자는 바삐 움직였다.

[별천지로구나. 별천지야. 기운만 좋은 게 아니라 볼 것도 많구나!]

주머니 속에서 현천이 좋다고 신이 났다. 이곳에서 지내며 좋은 기운을 흡수한다면 현신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행복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현천은 여기서 살아. 난 볼일만 보고 갈 테니까.]

[무슨 말을 그리하는 겐가?]

[내가 여기 머물러 봤자 몇 시간이 다일 텐데. 그동안 흡수한 기운으로 현신이 가능할 리 없잖아.]

[…….]

[원하는 만큼 지내다 오든가.]

들떴던 현천이 조용해졌다. 도화는 현천이 현신하고 싶은 마음을 잘 안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이 강하지 않아서 현신하지 못하는 것도 안다. 그래서 선택지를 준 것뿐이었다.

[아닐세. 내, 현신하고 싶다만… 자네 곁을 떠날 순 없지.]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도화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묵범의 뒤를 쫒았다. 현천은 자신의 대답에 도화가 안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매정하게 원하면 여기 남으라고 했지만, 진짜 남겠다고 하면 당황할 녀석이었다. 도화는 딱딱해 보이는 겉과 달리 속은 한껏 익어 말랑말랑한 홍시 같았다.

[내가 없으면 자네 안위는 누가 지키나? 자다가 비명횡사할 게 뻔한데 말일세.]

[비명횡사는 무슨.]

도화는 웃기지도 않다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도 현천이 곁에 있겠다고 해서 그런지 표정이 조금은 편해 보였다.

청운각으로 향하는 길은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사방을 비추니 풀잎에 앉은 작은 빛이 하늘의 별인지 땅의 반딧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달빛이 닿지 않는 바닥엔 아이가 든 사각 유리등이 놓여 있어 흙길을 은은히 밝혀 주었다.

저 멀리에 거대한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각 아래는 규모가 매우 큰 연지가 자리해 있었다. 수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꽃이 가득 피어 달빛을 듬뿍 받는 게 보였다.

현천의 말대로 이곳이 별천지고 도원향이며 무릉도원 같았다.

“저는 여기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지교를 건너시면 됩니다.”

아이는 도화와 묵범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왔던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묵범은 이곳에 자주 왔던 것인지 익숙한 발걸음으로 연지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이곳의 연꽃은 볼 때마다 하나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습니다.”

묵범은 천천히 다리를 건너며 뒤에서 따라오는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도화도 연꽃이 무척이나 탐스럽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묵범처럼 꺾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꽃 사정은 물어보지도 않고?”

“꽃과 대화가 되는 겁니까? 오… 그런 대단한 능력이-.”

“미쳤냐? 그런 능력이 있다면 내가 하계에서 구르고 있겠어? 서천 꽃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겠지.”

도화가 맞받아치자 묵범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인재라면 꽃감관이 내버려 둘 리 없겠지요.”

도화는 묵범의 실없는 농담과 느릿한 발걸음이 답답했다. 청운각에 강림 도령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이 자식은 뭐가 이리도 태평한지 모르겠다.

‘저 자식… 선계에서 꽤 높은 관직에 있는 놈인가?’

그게 아니라면 저승차사의 총책임자인 강림 도령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묵범은 선계에서 저승으로 파견 나온 상태라고 했다. 저승에서 차사 일을 하고 있으니, 결론은 강림 도령의 아래에 속한 것이 된다.

‘뭐야. 그러면 지금 직장 상사를 엿 먹이는 중이잖아?’

도화는 묵범을 추월하여 연지교를 빠르게 건넜다. 연꽃을 구경하고 저놈과 실없는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차사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초장부터 미운털이 박힐 순 없어.’

물론, 강림 도령이 좋아서 잘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도화는 제 스승의 원수 중 하나가 저승차사임을 잊지 않았다.

저승에 소속된 저승차사의 수가 적진 않을 것이다. 그중 한 명. 어쩌면 스승의 죽음에 연관된 차사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강림 도령도 묵범도 저승차사야.’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모두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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