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삼미호 다온의 핏줄.
그렇다는 것은 반은 여우고 반은 인간인 혼혈이란 의미다. 다온이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이유가 인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아무런 케어도 받지 못하고 오랜 시간 감금되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면 그때 본 게… 원귀가 아니라 생령(生靈)이었다는 건가?’
손 위의 새끼 여우는 어딜 봐도 망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콩닥콩닥 맥이 뛰는 것까지 느껴졌다.
평범한 인간 여자의 태내에 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텐데. 다온이 여우라 천만다행으로 죽지 않고 태어나, 어미인 다온을 감금한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생령 상태로 돌아다닌 듯했다.
생령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면 원귀가 된다. 점점 정도가 지나치면 육체는 생령을 거부한다. 육체는 혼이 빠져나가면 빈집이 되어 그대로 죽어 버리거나 다른 원귀나 악귀에게 빼앗길 확률이 높다.
[자네가 생명의 은인이라 자네에게 온 것 같구려.]
[내가 생명의 은인?]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이선후의 몸에서 저 녀석을 떼어 내지 않았더라면 얼마 안 가 악귀가 되었겠지. 게다가 저승차사에게서 구해 주었잖나.]
[그거야 귀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현천은 도화, 너라서 그리 한 것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세상 누가 저승차사가 앞에 떡하니 있는데 원귀를 도망치게 한단 말인가. 그 차사가 도화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옆의 남자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차사였다면 당장 윗선에 보고가 되어 당장 명부에 홍도화의 이름이 올랐을지도 모른다. 저승차사의 공무 집행 방해도 모자라 차사를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갓 태어난 새끼 여우가 거기까지 알 리는 없을 테지만, 도화가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제 몸에 돌아가자마자 도화를 찾아온 것이고.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아버지란 놈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어머니인 다온이 있으니 그녀에게 가면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새끼 여우는 다온에게 가지 않았다. 다온을 책임지는 화린에게 연락하는 것도 거부했다.
[웬만하면 이름은 부모에게 받는 게 좋을 텐데.]
[남보다도 못한 핏줄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하긴. 부모도 부모 나름이지.]
도화는 얼굴도 모르는 제 부모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상황을 떠올리니 새끼 여우가 왜 여우들이 아닌 제가 온 것인지도 이해가 되었다.
[인간은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라도 하지. 이쪽 판은 조금만 저들과 달라도 대놓고 차별을 해 댄단 말이야.]
[그러게. 호골에 가서 나처럼 박해당하며 사느니 그냥 내가 거두는 게 낫겠어.]
[잘 생각했네. 통장도 두둑해졌겠다, 수저 한 벌 더 놓아도 모자람 없지 않겠나.]
새끼 여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던 도화는 녀석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름이라.’
평생 불러야 할 이름을 갑자기 정하려고 하니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명 공부라도 해 둘 것을. 도화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끼 여우의 금색 눈을 쳐다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뜻 좋은 단어를 떠올렸다.
‘눈이 금색이니까 금돌이? 아니면 금복이도 괜찮고.’
도화의 시선이 여우의 눈에서 검은 털로 이동했다.
‘털 색이 검고 콩처럼 작으니 서리태? 서리태… 귀엽긴 한데 여우한테 콩 이름은 좀 별론가?’
도화의 머릿속은 점점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애완동물에나 붙일 법한 이름으로 가득 찼다. 새끼 여우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작은 몸을 부르르 떨며 털을 곤두세웠다.
“‘담마’는 어떻습니까?”
조용히 운전을 하던 묵범이 도화의 생각을 끊고 끼어들었다.
“담마?”
담벼락과 말을 떠올린 도화는 얘가 어딜 봐서 말과 비슷하냔 눈빛을 던졌다. 묵범은 피식 웃으며 담마의 뜻을 설명했다.
“올바른 인과와 사람이 지켜야 할 정도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갓 태어난 녀석인데 너무 무거운 이름 아닌가?”
도화는 아무리 봐도 무해하고 귀엽기만 한 새끼 여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담마. 담마…. 입에 담기 괜찮은 발음이긴 한데, 어울리지 않았다.
“겉보기에 무해해 보이나 저 여우는 생령인 상태로 악귀까지 될 뻔했습니다. 개심하여 다시 몸으로 돌아갔다 한들 한번 타락했던 혼은 환경에 따라 쉽게 변질될 겁니다. 지금도 원귀였을 때의 기운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방금까진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뿐, 아무 문제 없었는데 묵범의 설명에 갑자기 차 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기엔 상대가 저승차사다. 심지어 선계에서 저승으로 파견 나온 차사. 그런 자의 말이니 무시하기 어려웠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름에 함축된 의미를 부르는 것입니다. 담마라고 부를 때마다 녀석에게 올바른 인과와 정도를 따르라는 의미가 쌓여 중요한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담마…….”
듣고 나니 꽤 그럴싸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승님께 좀 더 멋진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 볼 것을.
도화는 옛날 옛적, 먼 과거를 떠올리며 새끼 여우에게 물었다.
“담마라는 이름, 괜찮니?”
그러자 여우가 좋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담마다.”
도화가 이름을 확실하게 정한 순간, 손 위에 있던 여우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담마?”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작은 여우가 하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대신 도화의 무릎에 6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앉은 상태로 나타났다.
“담마?”
아까는 새끼 여우가 걱정되어 불렀다면 지금은 담마가 맞냐는 뜻으로 불렀다. 작고 복슬거렸던 검은 털 뭉치가 사라지고 나타난 아이이니 담마가 맞겠지만, 여자아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생각했던 이름들도 여우가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떠올렸던 것이었다.
“너… 여자애였냐?”
도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담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도화는 담마가 아무것도 안 입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옷이라도 입고 변해야지!”
“아직 그거까지는 할 줄 몰라서…….”
담마가 미안하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도화는 안전 벨트를 풀고 티셔츠를 벗어 담마에게 입혔다. 도화의 커다란 덩치를 감싸고 있던 티셔츠는 담마에겐 너무 커서 라운드 부분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입으나 마나였다.
성별을 떠나서 벗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도화는 티셔츠 라운드 부분을 담마의 목 뒤로 잡아당겨 묶었다. 그러자 모양새는 볼품없어도 훌렁 벗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아랫단이 훌렁 뒤집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도화의 걱정도 모르고 담마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한강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묶을 끈이라도 줄까요?”
묵범이 도포 소매를 흔들며 도화에게 물었다.
“어. 줘 봐.”
임시방편으로 허리에 둘러 묶으면 되겠지. 도화는 묵범이 내미는 끈을 받아 들었다. 목 뒤로 묶은 부분이 불편한지 담마가 자꾸 손을 뒤로 뻗는 통에 묵범이 준 끈이 무슨 끈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담마가 불편하지 않게 좀 느슨하게 묶고 허리에 끈을 두르려던 도화는 끈 색이 붉은 것을 보고 멈칫했다.
‘붉어?’
묵범은 저승차사다. 저승차사의 기본 무기는 부용삭. 감직부는 탈주 망자를, 추혼부는 원귀나 악귀, 사람을 해한 귀물을 잡는 데 쓰는 밧줄이다. 그리고 그 색은 붉은색. 지금 도화가 쥐고 있는 것과 같은 색이었다.
“으….”
담마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허리에 두르지 않았는데도 부용삭의 기운이 담마를 억누르는 듯했다. 재빨리 끈을 거둔 도화는 그대로 묵범의 얼굴에 냅다 던졌다.
“장난해?”
운전 중에 얼굴로 날아든 부용삭을 가볍게 피한 묵범은 서운하단 표정을 지으며 도화를 쳐다봤다.
“끈이 필요할 것 같아서 드린 건데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군요.”
“너 같으면 부용삭에 묶이고 싶겠냐? 묶여 볼래?”
원귀였을 때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 놈이 부용삭을 건네?
도화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는데도 묵범은 개의치 않고 핸들을 돌렸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흠…. 당신이 묶어 준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뭐?”
“밧줄도 전문적으로 묶는 기술이 있다는데. 혹시 묶는 기술을 배우기라도 했습니까?”
“미쳤냐? 내가 왜 그딴 걸 배워?”
“묶여 보겠냐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이 새끼 이거…….”
제대로 변태잖아?
도화는 새삼 묵범이 변태라는 것을 새삼 자각했다.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것도 모자라 밧줄로 묶어 달라니. 질색하던 도화는 문득 무서워졌다. 과연 만지고 묶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놈일까? 그거 말고 또 다른 변태적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도화는 무릎에 앉아 있는 담마를 품에 꼭 끌어안아 최대한 묵범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은 저 변태와 맞설 무기가 있지만, 갓 태어난 담마는 저 자식이 변태라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아니, 변태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지도.
“대체 어딜 가는 거지?”
도화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묵범에게 물었다. 방금까진 대화 나누기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부용삭 덕분에 믿음이 깨졌다.
담마와 자신을 저승으로 보낼 생각인가? 아니면 은밀한 곳으로 가서 묶어 달라고 하려나? 그것도 아니면 저번처럼 내 몸을 만지는 게 목적인가?
깨진 믿음 위로 의심이 자리 잡았다. 도화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눈빛만 봐도 도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다. 도화의 손이 현천을 넣어 둔 주머니로 향했다. 여차하면 묵범을 공격하고 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묵범은 도화가 저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여유롭게 공원 주차장으로 핸들을 돌렸다.
“다 왔습니다.”
‘다 왔다고?’
묵범의 말에 그제야 주위를 돌아본 도화는 이곳에 서울숲 공원 주차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설마 공원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하자는 건가? 애 옷이 이런데? 이런 땡볕에? 미쳤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선지에 도화는 차가 멈추면 내리려고 준비했다. 대화는 나중에, 묵범이 제정신일 때 하자고 해야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담마의 옷부터 사러 가야겠다.
멈추자마자 문을 열려고 조수석 손잡이를 잡고 기다리는데, 어찌 된 일인지 묵범은 텅 빈 주차 공간을 계속 지나쳤다.
“주차 자리 많은데 뭐 하는 거야.”
“거의 다 왔습니다. 살짝 어지러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
주의를 준 묵범은 몇 번째인지 모를 화단을 돌아 살짝 솟은 방지턱 위를 지났다. 그와 동시에 앞 유리로 보이던 휑한 주차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여긴 어디지?’
묵범이 주의한 것처럼 어지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른 의미로 도화를 어지럽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