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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21화 (22/146)

21화

“허허. 손님이 왔는데 밖에 세워 둘 참인가? 날도 더운데 말이야.”

묵범을 빤히 쳐다보던 도화에게 여강진이 투덜대며 말했다. 현관을 경계로 안과 밖의 온도가 심각하게 차이 나긴 했기에 도화는 하는 수 없이 들어오라고 말하며 묵범에게서 현관문을 빼앗았다.

도화의 허락에 묵범이 먼저 현관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려던 묵범은 난장판인 방 안 꼴을 보고는 뒤에서 어떻게든 현관문을 달아 보려는 도화에게 물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됩니까?”

어디 예의 없이 신발을 신고 들어가려고 하냐고 따지려던 도화는 이미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간 묵범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도화의 침묵을 무언의 허락으로 받아들인 여강진도 신발을 신고 방으로 들어갔다.

“당신까지 그러깁ㄴ—.”

우드득. 우드득.

유리 파편이 두 남자의 신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도화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충이라도 치워 놓고 나갈 것을. 도화의 눈에도 자신의 방은 철거 직전의 폐가 수준이었다. 창문과 형광등만 깨졌다면 모를까.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의 상태가 누가 돈을 준다 해도 쓰지 않을 만큼 낡고 망가져서 더욱 그러했다.

결국, 도화 본인도 슬리퍼를 신고 방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경첩이 완전히 망가진 탓에 벽에 비스듬히 세워 놨다.

“도둑이라도 든 겁니까? 강도?”

“몰라.”

새끼 여우가 집에 쳐들어온 이유를 몰라 도둑이 아니라고 하기 애매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해치려고 온 것 같지도 않고.

도화는 어느새 가방 속으로 숨어 버린 새끼 여우를 이 둘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선 몸을 숨기는 것을 보면, 분명 숨기는 게 있었다.

“도방 선생은 워낙 적이 많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여강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난장판인 상황을 묵범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여강진, 당신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저자는 어디서 만났고요?”

도화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자 여강진이 아닌 묵범이 나서서 대답했다.

“제가 불래에 연락하여 당신의 주소를 물었습니다.”

“내 집 주소를 네가 왜?”

“제 제안을 수락한다고 문자는 보내 놓고 전화를 받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작 전화 좀 안 받았다고 함부로 남의 집까지 찾아와?”

도화는 묵범에게 말하며 여강진을 노려보았다. 왜 묵범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냐고 따지는 눈빛이었다.

“하하. 내 어찌 저승차사의 취조를 거부할 수 있겠나?”

여강진은 어쩔 수 없었으니 좀 봐달라고 두 손 모아 사과했다. 그리고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이쿠! 오늘 VIP 손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깜빡 잊었네. 차사님, 원하는 대로 해 드렸으니 나는 이제 빠지겠수다!”

그는 도화의 노려보는 눈빛을 흘려 넘기며 빠르게 집에서 뛰쳐나갔다. 하여간 조금만 불리할 것 같으면 귀신같이 내뺀단 말이야.

[쯧쯧. 도깨비가 배짱 좋단 말은 저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군.]

어느새 은장도 크기로 줄어든 현천이 혀를 찼다. 여강진은 참으로 도깨비 같지 않은 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도깨비 사이에서 깨나 인망이 높다.

한때 도깨비 무리에 끼고 싶어 도깨비처럼 행동했던 도화는 저런 여강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입 안이 썼다. 자신은 무슨 노력을 해도 도깨비에게 배척받는다는 현실만 자각하게 했다. 도깨비 중 도화를 편견 없이 대하는 사람은 여강진이 유일했다. 그래서 그가 이런 돌발 행동을 해도 미워할 수 없었다.

“사택에 들어간다고 미리 처분 중이었습니까?”

“미쳤어? 내가 뭐 하러 내 물건을 다 부숴?”

“그게 아니라면 집이 이렇게 난장판일 리 없지 않습니까. 강도가 든 것도 아니고. 도깨비가 혼혈을 배척한다 해도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서 개판을 만들 리도 없고.”

“나도 몰라. 잠깐 나갔다 왔더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

“당신이 모른다면 저기, 가방 속에 있는 놈한테 물어보면 되겠군요.”

“…뭐?”

묵범은 자기 집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책상 옆에 떨어진 가방을 들더니 거꾸로 뒤집어서 탈탈 털었다. 그러자 가방 속에 숨어 있던 검은 털 뭉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건, 그러니까….”

“새끼 여우군요.”

새끼 여우는 자신을 떨어트린 묵범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도화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어깨에 매달렸다. 솜털 같은 여우의 털이 도화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작게 콧바람을 씩씩대는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바닥에 떨어져서 놀란 것 같았다.

“저 여우가 그런 겁니까?”

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묵범이 여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어깨가 아니라 등에 매달리게 했다.

“흠. 혼을 낼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묵범은 도화가 새끼 여우를 지키려는 것을 보고 여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묵범의 시선이 멈춘 곳은 도화의 얼굴이었다. 정확하게는 얼굴에 쓰고 있는 귀령면을 흥미롭다는 듯이 관찰했다.

“왜 기척을 느끼지 못했나 했는데… 귀령면을 쓰고 있었군요. 오래전에 사라진 옛 물건인데, 어디서 구했습니까?”

“스승님의 유품이다.”

“스승? 이름이 뭡니까?”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내 스승을 네놈이 왜 알아야 하지? 도화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하긴. 제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요.”

묵범은 이번에도 빠르게 호기심을 거뒀다. 새끼 여우도 그렇고 귀령면도 그렇고. 저 남자는 진짜 알고 싶어서 물어봤다기보다 그냥 질문이 생각나서 한 느낌이었다.

“우리 사이에 귀령면을 쓰고 대화할 필요는 없으니 이제 벗으세요. 그런 재미없는 가면 말고 도방,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요.”

순간, 도화는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가라앉았다. 내 얼굴을 보고 싶다…? 이 자식.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나? 상대가 여자였다면 플러팅이라고 여길 만했다.

‘잠깐. 저 새끼. 내 엉덩이를 만졌었잖아?’

엉덩이뿐인가? 허리도 만졌다. 그냥 스치듯 닿은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주물럭댔다. 설마, 혹시…….

“너. 남자 좋아하냐?”

“제가요? 남자를?”

묵범의 눈이 살짝 커졌다.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는 반응이었다.

너 내 엉덩이랑 허리 만졌잖아. 따지려던 도화는 저 말을 입 밖에 내는 게 수치스러워서 입을 다물었다. 아닌 것 같은 반응이니 아니라고 믿어야지.

“여기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자리를 옮깁시다.”

“어디로?”

“좋은 곳이 있습니다.”

“…?”

좋은 곳? 어디 조용하고 맛 좋은 음식점이라도 골랐나?

도화는 묵범이 몸에 걸친 옷과 시계 등을 훑어보며 그가 말한 곳이 어디일지 은근히 기대했다. 비록 단 한 번도 넉넉한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는 도화였지만, 묵범이 걸친 것들이 중저가 제품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시계 하나가 집 한 채일 것이고 걸친 옷은 중형 세단 한 대 값은 나올 것이다.

그러니 기대할 만했다.

“보아하니 멀쩡한 집기는 없어 보이는데, 그냥 챙길 것만 챙겨서 아예 집을 나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 집을 나오라고?”

“못 할 것도 없지요. 흠… 챙길 건 없어 보이는데. 통장이나 인감, 지갑이나 챙겨요. 컴퓨터는 본체만 챙기면 되려나?”

묵범은 도화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컴퓨터 본체를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차에 실어 놓겠다며 먼저 나가 버렸다.

“…….”

고작 컴퓨터 본체 하나만 들고 나갔는데 방이 너무 휑해졌다. 방에서 유일하게 멀쩡했던 -내부는 몰라도 외관은- 본체가 사라져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실은 도화보다 큰 덩치의 묵범이 나가는 바람에 가득 찼던 방이 텅 빈 느낌이 든 것이었지만, 도화는 애써 본체 때문이라고 우겼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군. 더는 이 집에서 지낼 수 없으니, 어디 한 번 저승 물 좀 먹어 봅세나.]

저승차사 일은 안 된다고 반대하던 현천은 정작 집 안 꼴이 엉망이 되자 먼저 차사 일을 하자고 나섰다.

[내 전용 침대를 잊지 말게.]

푹신한 침대가 그리도 갖고 싶었나 보다. 도화는 알았다고 작게 대답하고는 서랍에서 통장과 도장을 찾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밖에서 주워 온 캐리어에 옷과 책 몇 권을 챙겨 넣었다. 600년을 넘게 산 도화의 짐은 고작 30인치 캐리어에 담긴 게 전부일 정도로 단출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검은색 중형 세단이 공회전을 하며 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넣고 뒷좌석 문을 열려던 도화는 저번에 묵범이 예의 운운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조수석에 탔다. 그런 도화의 행동에 묵범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디로 갈 건데.”

“가 보면 압니다.”

어련히 둘이 대화할 만한 곳으로 가겠거니 생각한 도화는 어깨에 앉아 있는 새끼 여우를 잡아 무릎 위에 올렸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한다? 화린에게 연락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보면 짐승 모습이면서도 사람 말은 똑바로 알아듣는 게 분명했다.

“이름은 지었습니까?”

“아직 안 지었어.”

지어 줄 이유도 없고 말이다. 현천처럼 자신의 무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짐승 소리만 내니 대화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산에 방생할 생각이었다. 알아서 산짐승을 잡아먹고 살아남든가, 도태되든가.

“불쌍한 녀석이군요. 이름을 받는다면 좀 더 멀쩡한 몸이 될 수 있을 텐데.”

“멀쩡한 몸?”

지금도 멀쩡한데?

도화는 무릎에 올려뒀던 새끼 여우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폈다. 주먹만 하긴 해도 눈코입 다 제대로 박혀 있다. 꼴에 여우랍시고 세모난 귀와 짤따란 꼬리도 하나 달려 있었다. 작다 뿐이지 있을 것 다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더해야 멀쩡하다는 거지?

도화가 새끼 여우를 만지작대는 것을 지켜보던 묵범이 이유를 설명했다.

“저것이 작은 이유는 이름이 없어서입니다.”

“이름이 없어서?”

다시 보니 비정상적으로 작긴 했다. 하지만, 그게 이름과 무슨 상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신도 사람에게 이름이 불려야 신위가 유지되는 법. 신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낱 귀물이 그 법칙을 빗겨 갈 순 없겠지요. 악귀가 악명이 자자해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이유와 같은 겁니다.”

“아…….”

이름 없는 잡귀가 자연 소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건가.

도화는 묵범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새끼 여우가 왜 이렇게 조막만 한지 이해했다.

하지만, 이름을 함부로 지어 줄 순 없었다. 인간들도 평생 불릴 이름을 한참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 짓는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는 귀물의 이름을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을 순 없다. 게다가 자신은 이 여우와 아무 연관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도화는 화린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보아하니 저번에 그 삼미호의 핏줄인 듯하군요.”

“저번의 그 삼미호라면… 설마, 다온?”

다온이란 말에 손바닥 위의 새끼 여우가 작은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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