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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20화 (21/146)

20화

현천은 새로운 휴대폰을 산 도화에게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일세.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고민도 하지 않고 쓰다니 말일세.]

[돈도 있는데 필요한 곳에 쓰는 게 뭐가 어때서. 있는데도 아끼는 건 멍청한 짓이야.]

전과 같이 통장이 홀쭉해서 월세 내기도 빠듯했다면 어디서 중고폰을 사거나 알뜰폰으로 개통했을 것이다.

도화는 나온 김에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주머니 속에서 현철이 놀라서 큰 소리를 냈다. 귀물의 소리가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사람들의 이목이 도화에게 집중될 뻔했다. 문제는 현천이 아니라 가방 속 새끼 여우였다.

벅벅벅벅벅.

안에서 벅벅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도화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화는 가방을 돌려 가슴으로 맸다. 그리고 지퍼를 살짝 열어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작고 따뜻하고 복실거리는 것이 도화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더는 가방을 북북 긁지 않았다. 마치 도화가 제게 관심을 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이걸 손에 쥐고 다닐 수도 없고. 난감하네.’

도화는 그렇게 가방에 손을 넣은 상태로 백화점을 돌아다녀야 했다.

[뭘 사려고 백화점엘 온 겐가? 내 살다 살다 머리털 나고 자네가 백화점에 들어가는 걸 보게 되다니. 믿기지 않는구먼.]

현천의 말에 도화가 비웃으며 대꾸했다.

[살다 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너와 내가 긴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너한테 머리카락이 어디 있다고.]

[그, 그건! 자네가 날 현신시킬 정도의 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실제 내 모습은 자네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매우 잘났단 말일세!]

현천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화에게 자신의 사람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도화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평소, 현천이 은장도 형태로 지내는 이유도 도화의 힘을 최대한 절약하려고 선택한 결과였다.

[그게 불만이면 나보다 강한 사람을 찾아가든가.]

[허허.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하나.]

[사람 모습으로 현신하고 싶다며. 나는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까, 새 주인을 찾고 싶다면 보내줄게.]

도화는 신발 매장에 들러 신발을 둘러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현천은 아니라는 대답 대신 도화에게 들리지 않게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자존심도 적당히 세워야 귀여운 법이다. 도화는 그 적당히를 조절하지 못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귀엽게 보일 생각도 없을 테지만.

[이 몸이 떠나면 엉엉 울 게 뻔한데 어찌 자넬 버리고 다른 이에게 가겠나.]

[한 번만 더 헛소리했다간, 가방에 넣어 버리는 수가 있어.]

[헛… 그건 사양하겠네.]

컴컴한 곳은 질색이란 말이야. 현천이 부르르 떨며 싫다고 말했다. 현천상제가 윤회의 굴레로 돌아간 뒤, 현천은 스스로를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봉인했다. 직접 새 주인을 찾는 것보다 주인 될 이가 자신을 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현천이 봉인된 동굴이 세월이 지나 입구가 무너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현천이 택한 동굴은 하필이면 해마다 수해를 입는 지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천은 서서히 물에 잠겨 버렸다. 하늘이 변덕을 부려 물난리가 아닌 가뭄이 들어도 워낙 축축한 동굴은 수위가 조금 낮아질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 주인을 찾아다닐 것을. 후회해 봤자 워낙 단단하게 봉인된 터라 물로 가득 찬 동굴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나 여기 있소!’ 외치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귀엔 들리지 않겠지만, 귀물의 귀엔 들릴 터.

하지만, 그건 더욱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필 동굴 근처에 천 년 묵은 지네가 살고 있던 탓이었다. 인간에게 큰 배신을 당해 정신이 돌아 버린 지네는 인간이고 귀물이고 간에 제 영역에 다가오는 것이라면 공격했다. 그때에는 저승이 지금 같지 않아서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던 때라 인간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죽지 않은 요괴의 만행에 차사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걸 아는 지네는 더욱 흉포하게 날뛰었고, 덕분에 현천은 수옥水獄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내 주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현천은 어두운 곳이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 바지 주머니 속도 어둑하긴 하나, 따뜻해서 좋다고 했다. 좀 신경 쓰이는 말이지만, 급할 때 꺼내 쓰기 편하기에 자주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편이다.

“이걸로 주세요.”

도화는 가장 눈에 익은 브랜드 로고가 박힌 운동화를 골랐다. 가장 무난하고 저렴한 운동화였다. 아까 큰마음 먹고 비싼 휴대폰을 샀더니 저도 모르게 다음 소비는 절약하고 있었다.

새 운동화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집 안이 난장판인 것을 깨달았다. 침대로 간 그는 유리 파편이 튄 이불을 걷어내고 앉았다. 방이 개판이라 그런가 싸구려 매트리스가 이제 자신도 곧 수명이 다할 것 같다는 비명을 질렀다.

“이봐. 꼬마.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봐.”

가방에서 새끼 여우를 꺼내 무릎에 올린 도화는 개판인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사람 말을 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난장판의 원인에게 책임을 물고 싶은 마음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낑…….”

예상대로 돌아온 대답은 짐승 소리였다. 한숨을 내쉰 도화는 침대에 벌렁 누워 새로 사 온 휴대폰 설정을 하기 시작했다. 메인 보드까지 완벽하게 망가지는 바람에 저장했던 모든 데이터는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도화의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번호가 적어 정말 다행이었다.

불래와 집 주인 번호는 외우고 있어서 바로 입력했다. 화린의 번호는 불래에 가서 여강진에게 물어보든가 하면 될 것이고, 묵범의 번호는 그가 준 명함에 적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 도화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 원 한 장과 천 원 세 장 사이를 뒤적여 묵범의 명함을 찾아냈다. 도톰한 검은색 종이에 금색으로 이름과 번호만 적힌 명함은 심플하면서 고급스러웠다.

‘나도 이거 비슷하게 명함 하나 만들까?’

그런데 이거 금인가?

도화는 명함에 적힌 금색 글씨를 유심히 관찰했다. 금박이라고 하기엔 색이 진하고 묵직해 보였다. 종이도 무광이라 그런가 시크해 보이는 것이… 보면 볼수록 탐나는 명함이었다.

‘저승차사들은 다 이런 명함을 쓰나? 나도 차사가 되면 이런 명함을 받으려나? 명함에는 도방이 아니라 본명을 써야겠지?’

도화는 묵범에게 연락하는 것도 잊고 명함 하나로 자신이 저승차사가 되는 것까지 상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승차사라면 스승님의 원수라며 치를 떨고 어찌해야 복수를 할지 궁리하던 것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뭐… 저승차사 모두가 원수인 것은 아니니까. 다온의 명부를 바꿔 준 은혜를 갚을 때까지만 함께 일하는 거야.’

얼마나 함께해야 그만큼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대충 1년 정도만 빡빡하게 일하면 되지 않을까.

도화는 어느새 책상에 올라온 새끼 여우의 낑낑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녀석… 관심종자인가? 왜 자꾸 내 이목을 끌려고 하지?

검은 털 뭉치를 손으로 톡톡 치며 이 녀석을 어찌할지 고민하는데, 주머니 속에서 현천이 말을 걸었다.

[도화. 이쪽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네.]

[누구지? 집주인인가?]

집이 워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난장판이 되었으니 층간 소음으로 집주인에게 연락이 갔을지도 모른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방을 빼겠다고 말을 해 둬야겠다.

[인간이 아닐세.]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이 아니란 말에 도화는 현천을 꺼내 들었다. 원귀나 악귀면 싸우면 되지만, 귀물이라면 골치 아프다. 그런데 귀물이 날 찾아올 이유가 있나? 의뢰는 불래를 통해 하면 될 텐데.

‘아니면 도깨비?’

자신을 종족의 수치라고 여기는 도깨비일 수도 있다. 밖에서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집까지 쳐들어온 건가?

[문 앞.]

[나도 알아.]

두 사람의 기척이 계단을 오르는 게 느껴졌다.

도화는 재빨리 귀령면을 얼굴에 썼다. 그리고 현천의 검신을 길게 잡고 현관 벽에 붙었다. 언제고 공격이 들어오면 받아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새끼 여우도 털을 잔뜩 부풀린 채로 도화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때였다.

똑똑똑—.

문 앞에 도착한 둘 중 하나가 현관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도방 선생. 안에 있나?”

‘……여강진?’

불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도화는 들고 있던 현천을 아래로 내리고 현관문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현관문에 있는 작고 동그란 외시경으로 밖을 살폈다.

문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보이는 것은 화려한 금색 문양이 그려진 옷이 전부였다.

“도방, 안에 없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외출했나 보군.”

한 명은 불래의 사장, 여강진의 목소리가 맞는데 다른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서 몇 번 들어 본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지? 어디서 들었더라?’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둬서 그런가 목소리의 주인이 생각날 듯 말 듯하다. 도화가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느라 잠깐 경계가 흐트러진 틈을 비집고 이해 못 할 대화가 파고들었다.

“이, 이봐. 당신 집주인 허락도 없이 그래도 되는 거야?”

“집주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안에 없는 것 같으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응…? 뭐가 어쩔 수 없고 뭘 실례하겠다는 거야?

도화의 머리가 둘의 대화를 이해하기도 전에 우지끈!!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뜯겨 나갔다.

“이…게 무슨?”

도화는 현천을 든 상태로 문이 사라진 현관을 쳐다봤다. 철제 문이 너무나도 깔끔하게 떨어졌다. 현관문을 뜯어낸 남자는 묵범이었다.

“아니, 집에 있으면서 왜 문을 안 여나?”

“연락을 하고 와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현관문이 뜯겨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이쪽인데 되려 여강진이 성을 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 하고 여강진을 노려봤다.

“똑똑, 노크도 했는데?”

“누구라고 말을 했으면 순순히 열었겠지요.”

도화는 묵범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여강진이야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안다. 그러니 도화가 문을 열지 않은 이유는 이 남자, 묵범 때문이었다.

‘아주 기깔 나게 차려입으셨구만.’

색 짙은 검은 한복감 위에 돌금박으로 모란문이 어지러이 찍혀 있는 도포는 한 눈에도 귀하고 화려해 보였다.

‘그런데 저리 차려입고 왜 우리 집엘 온 거지?’

잔뜩 화가 서려 있었던 도화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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