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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9화 (20/146)

19화

할게. 라고 문자를 보낸 도화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앉은 곳은 의자가 아닌 허름한 30인치 캐리어였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해야 하는데 망가진 의자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 도화에게 식탁 의자가 있을 리가. 애매한 책상 높이 때문에 서서 컴퓨터를 하는 것도 불가능.

지금 앉은 캐리어가 도화의 것이냐? 물론 아니다. 저것은 의자를 버리러 나갔다가 재활용 코너에 버려진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주워 오긴 했는데 싸구려 캐리어라 그런지 조금만 무게를 실어 앉았더니 바퀴가 박살 나 버렸다. 그래서 지금 도화는 캐리어에 정말 엉덩이를 갖다 대기만 했을 뿐, 다리에 힘을 주고 투명의자처럼 앉아 있는 상태였다.

[쯧쯧. 사서 고생이구먼.]

현천이 가엽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도화의 귀엔 현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문자를 보내 놓고는 후회가 슬쩍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정한 일이지만, 막상 하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좀 더 고민해 봐야 했나.

그래서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두고 책상에 뒤집어 뒀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집어 둔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확인하지 않아도 문자를 받은 묵범의 전화라는 것을 알기에 받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 던져 둘걸. 뒤집어 놓으면 신경 안 쓰겠지, 했는데 책상 표면에 빛이 번져 자꾸만 시선이 끌렸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도화를 지켜보던 현천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하기 싫으면 연락을 하지 말 것을. 하겠다고 문자는 보내 놓고 어찌 전화는 받지 않는 겐가. 참으로 예의 없는 짓이로고.]

도화는 침대 위에서 쫑알대는 현천을 노려보았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전화는 쉬지 않고 왔다. 끊어졌다 싶으면 또 오고, 그래도 안 받으니 문자가 왔다. 문자가 몇 통이나 왔는지 모른다. 이쯤 되니 그냥 처음부터 받을걸, 후회됐다. 지금 받으면 안 받고 뭐 했냐는 질문이 날아들 게 뻔했다.

그때였다. 현천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 쪽으로 날아갔다.

[음? 이게 무슨 기운이지?]

현천이 창문 근처에 떠 있는 것을 본 도화는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가방에서 귀령면을 꺼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도화에게 앙심을 품은 악귀가 습격하는 일이 있곤 했다. 악귀가 아니라면 도화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도깨비일 수도 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귀령면으로 기척을 지우고 습격에 대비를 해야-.

[왔다!]

대비를 하기도 전에 창문이 요란하게 깨지며 무언가 도화의 방으로 날아들었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피하지도 못했다. 간신히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숙인 게 전부였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흉흉하게 달려들었으나, 절반은 귀물인 도화의 피부를 찢진 못했다.

“윽…!”

도화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온 것은 유리 파편이 아니라 가슴으로 거칠게 파고든 검은 덩어리 때문이었다.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인지 방 안을 정신없이 이리 쿵, 저리 쿵 날고 뛰고 부딪히다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도화의 가슴이었다.

[도화! 괜찮은가!]

“으… 뭐야, 이거.”

도화는 가슴에 붙은 검은 것을 떼어 내려고 손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검은 덩어리는 도화의 가슴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악귀는 아닌 듯하네만…. 묘한 물건이로고.]

악귀는 아니라는 현천의 말에 도화는 가슴에 붙은 것을 떼려던 손을 멈췄다.

“악귀도 아닌 것이 왜 날 찾아온 거지?”

긴장을 풀고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그저 검은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세히 살펴보니 털 덩어리다. 그러고 보니 떼어 내려고 움켜잡았을 때 딱딱하거나 따갑지 않았다. 오히려 여우 꼬리를 만지는 것처럼 굉장히 부드럽고 복슬복슬…….

‘여우 꼬리?’

생각에 잠겼던 도화는 여우 꼬리가 떠오르자 다시 가슴에 붙은 털 덩어리를 떼어 내려고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붙잡고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털 덩어리가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안간힘을 쓰고 도화의 티셔츠를 놓지 않았다.

티셔츠를 붙잡은 것은 몽실몽실 검은 털 덩어리에서 삐죽 튀어나온 작은 짐승의 발이었다. 도화를 해칠 생각은 없는 것인지 발톱은 세우지 않았다.

[오호…? 이 냄새는 여우 냄새가 아닌가?]

“여우라고?”

여우라고 묻는 말에 손에 잡힌 털 뭉치가 움찔하는 것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좀 더 힘을 주어 녀석을 붙잡으니 빽빽한 털 속에 가려졌던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제야 도화는 이것이 원혼이나 악귀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해.”

[따뜻하다? 그렇다면 망자가 아니라는 겐가?]

현천도 거기까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현천은 여전히 도화의 티셔츠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 생명체가 신기한지 가까이 날아와 털 뭉치를 관찰했다.

범상치 않은 날붙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털 뭉치는 더욱 기를 쓰고 도화에게 달라붙었다. 긴장한 짐승이 발톱을 꺼냈다.

찌이익-.

도화의 얄팍한 티셔츠가 걸레짝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내 옷.”

몇 벌 없는 여름 티셔츠 중 하나가 회생 불가가 되어 버렸다. 도화는 티셔츠 하나를 버리고 나서야 정체불명의 털 뭉치를 단호하게 떼어 낼 수 있었다.

도화는 털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손가락으로 털 뭉치 앞에 선을 그었다. 보이지 않는 선이지만, 여길 넘어오면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털 뭉치는 똑똑하게도 도화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얌전히 책상 위에 웅크렸다.

“낑.”

“낑은 무슨. 너, 정체가 뭐야.”

“끼잉.”

정체를 묻자 작고 뾰족한 것 두 개가 튀어나왔다. 워낙 검은 털이 복실거려서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저것은 분명 귀였다.

“여우냐?”

“낑.”

아주 미세하게 귀가 흔들렸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몸통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작고 동그란 털 뭉치였지만, 그나마 귀가 생긴 덕분에 지금 녀석이 맞다고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어린 여우가 어찌 홀로 돌아다닐꼬.]

현천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걱정보다는 골치가 아팠다.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종족이 여우족이다. 화린이 제 꼬리를 세 개나 훔쳐 간 다온을 찾으러 제게 의뢰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말 여우가 맞을까? 화린은 여우족에 중 다온이 가장 어린 여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흐음. 이상한 일이구려. 화린, 그 여우가 그걸 모를 리 없고. 일부러 속일 이유도 없을 터.]

[그렇다면… 이 여우는 여우족도 모르는 여우라는 건가?]

[그런 것 같구려.]

도화가 현천과 귀물의 언어로 대화하자 털 뭉치가 머리를 들었다. 작은 귀가 뒤로 넘어가고 대신 금빛 홍채가 도화를 직시했다.

[금안이군. 흔치 않은 색일세.]

현천이 여우의 금안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싶었는지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나름 자신은 안전하다고 어필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나, 여우는 털을 바짝 세우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왜, 왜 그러지?]

[왜긴. 네가 현천검이라서 그렇지.]

은장도 크기로 줄이고 검집에 몸을 숨겼어도 여우는 본능적으로 현천이 위험한 무기임을 느낀 듯했다.

악귀를 베는 현천검. 본래 오방대제 중 하나인 현천상제-현무의 검이었으나, 오방대제가 모두 윤회의 길에 들며 각자의 무구를 자유로이 풀었다. 오방대제의 무구는 자아가 있어 자유를 얻었어도 자신이 인정할 만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스스로 봉인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워낙 긴 세월이 흘러 주인을 찾았는지 여전히 봉인된 상태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은 현무의 검-현천검이 반도깨비 홍도화를 제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대단한 검이 다가오니 갓 태어난 듯한 여우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건 저 새끼 여우 사정이다. 자신의 방을 둘러본 도화도 기겁했다.

“우선 네 부모를 알아봐야겠다. 그래야 네놈이 파손한 내 집 수리비를 받아 낼 수 있으니 말이야.”

검은 털 뭉치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낑낑댔으나, 창틀까지 박살 나 버린 창문, 미세한 유리 조각이 콕콕 박혔을 침대 이불과 매트리스, 방 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튀어 다니며 떨어트린 시계, 박살 난 모니터와 키보드, 깨진 형광등…. 피해 규모가 상당하다. 한 주먹도 안 되게 생긴 새끼 여우가 금붙이를 가지고 있을 린 없고, 변상을 받기 위해선 새끼 여우의 부모를 찾아야 했다.

“우선 화린에게 연락은 해 둬야겠군.”

어린 여우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화린이 모르는 새끼 여우가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자손이 귀한 종족이니 이걸 알리면 고맙다고 사례비를 줄 지도.

도화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썼다.

-안녕하세요. 도방입니다. 제가 지금 새끼 여우 한 마리…

‘아, 여우한테 보내는 건데 새끼 여우 한 마리라고 하는 건 좀 예의가 아니려나?’

사례금을 받을 생각에 도화는 문자를 좀 더 정중히 쓰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도방입니다.’만 남기고 싹 지우는데, 시커먼 털 뭉치가 화면을 가렸다.

“…?”

그리고 짧은 발로 문자 창을 아예 꺼 버렸다. 동물의 발도 터치가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실제로 당할 줄은 몰랐던 도화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예 휴대폰 전원까지 끄고 있는 새끼 여우를 쳐다봤다.

“뀽…”

뀽………?

휴대폰 화면이 제 털 색처럼 완전히 까맣게 변하자 털 뭉치가 할 일을 다 했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화를 올려다봤다. 금빛 홍채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참으로 귀여웠으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도화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여우 자식이?”

새끼 여우에서 여우 자식으로 강등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급하게 화면을 터치하다 액정을 발톱으로 벅벅 긁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액정 보호를 위해 보호 필름을 붙였지만, 여우 귀물의 발톱에 한낱 보호 필름이 버틸 리 없었다.

[휴대폰이 망가졌는데?]

[알아.]

새끼 여우는 자신이 전원 끄기로 휴대폰을 껐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발톱으로 액정을 찍고 긁다 못해 내부 부품을 파손시켜서 꺼진 것이었다. 도화의 휴대폰은 새끼 여우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하… 미치겠네. 다 버리고 이사 가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이렇게 망가질 줄 알았다면 묵범에게 답장이라도 할 것을. 지금 자신을 얼마나 예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할까. 후회해 봤자 망가진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우의 발톱에 찍힌 부품은 다시 고칠 수도 없을 터.

“당장 휴대폰부터 사야겠네.”

한숨을 내쉰 도화는 귀령면을 백팩에 넣었다. 그리고 망가진 휴대폰을 꼭 잡고 있는 새끼 여우도 가방에 넣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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