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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8화 (19/146)

18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주상 복합 아파트는 한강뷰로 유명하다. 한강이 보이는 벽은 전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여름인 타 죽고 겨울엔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 거주하는 이들은 냉난방비를 걱정할 리 없었다. 여름에는 긴팔을, 겨울에는 반팔을 입는 사람들이나 살 수 있는 집이니까.

저녁인데도 태양은 유리를 녹여 버릴 기세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창문 앞에 선 묵범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계의 오염된 공기는 최악이다. 거기에 인간들의 정제되지 않은 온갖 욕망까지 섞인 공기는 끔찍했다. 그럼에도 묵범이 저승에서 제공한 아파트에 사는 이유는 단 하나.

노을 진 한강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매일 보는데도 질리지 않는단 말이야.’

하늘에 있을 때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었다. 저승으로 파견 가면 한동안은 못 보겠거니 했는데. 다시 볼 수 있게 된 게 작은 선물 같았다. 그리고 하계에서 보는 한강은 하늘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았다. 선계와 비교하면 모든 것이 최악인 곳이건만. 어째서 노을 진 한강만큼은 더 좋은지 모르겠다.

집에서 한강을 구경하는 것 외에 하계와 저승 생활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선계에서 놀던 버릇이 있어 한껏 높아진 눈은 하계의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렇다고 귀물과 어울릴 순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나 따분한 묵범의 나날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존재가 나타났다.

‘도방….’

하계에서 도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혼혈로 저승에서도 깨나 유명한 사람인지라 묵범 또한 그 이름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워낙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그는 저승차사의 일을 방해하는 공무 집행 방해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사에게 해를 입힌다거나 위험한 악귀를 잡지 못하게 방해한 적은 없다. 차사가 보기에도 안타깝고 불쌍한 원귀를 도망치게 하고, 사람의 이름이 명부에 적히기 전에 꼼수를 써서 저승의 눈을 속이는 정도의 말썽만 피웠다.

하지만, 말썽도 한두 번이어야 웃고 넘기지. 그게 수백 년 동안 지속되니 저승차사들의 피로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하면 강림 도령이 ‘도방’이란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떤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 도방을 실제로 만났다. 그것도 차사 입장에서 골치 아픈 짓을 저지르는 현장을 적발했는데, 가서 막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저걸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탔다. 묵범은 한강에서 시선을 거두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한 물이 입 안 가득 채우고 식도로 넘어갔지만, 이상하게 입 안은 사막처럼 메마른 기분이다.

단번에 비운 생수병을 분리수거 통에 넣은 그는 도방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처음에는 하계의 미쳐 날뛰는 더위 때문에 갈증이 심한 것이라 여겼지만, 시원한 집에서도 이러는 것을 보면 갈증의 원인은 그 청년 때문인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지우려면 다른 생각을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가 왜 문제겠는가. 이론은 쉬워도 제어가 되지 않으니 문제였다.

생수 한 병을 더 꺼내든 묵범은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안에 흥미 있으면 연락하라고 번호도 알려 줬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싫으면 거절 문자라도 남기라고 했었다. 물론, 도방의 번호를 따기 위함이었다.

묵범은 생수병을 들고 거실 소파에 눕듯 기대어 앉아 중얼거렸다. 마시려 꺼낸 생수였지만, 마신다 한들 이 갈증이 사라질 리 없으니 그냥 테이블에 올려 뒀다.

“도방. 도방…. 진짜 이름은 아닐 텐데.”

처음, 도방을 만난 뒤로 그는 도방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었다. 묵범의 눈에 도방은 인간이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귀물인 것도 아니었다. 귀물 기운은 느껴지는데 묘하게 청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귀물의 기운도 그저 그런 하급이 아니라 조금만 더 정진하면 선적仙籍에 오를 수 있을 법한 기운이었다. 쉽게 비교하자면 여우족의 왕 자선, 늑대족의 왕 이리운, 우공족(소)의 왕 도림과 같은 자들의 후계자 수준이었다.

그래서 혹시 귀계에 가출한 후계자가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그랬다면 3계에 체포령이 내렸을 것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붙잡히면 머리털 빡빡 밀고 수련에 정진하도록 한다나. 가장 난장판일 것 같은 귀계도 자식 교육 엄하긴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날 동안 묵범이 도방에 대해 얻은 정보는 그가 약 400년 전부터 도방이란 이름으로 하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저승차사를 지독히도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귀물 간의 혼혈 같은데 어떤 귀물인지는 모르겠단 것이 전부였다.

묵범은 제일 마지막에 얻은 정보는 자체 수정했다. 귀물 혼혈은 맞는데 인간은 아니다. 인간의 기운이 귀물의 기운을 완벽하게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형 귀물과 섞였다면 조금만 놀라도 귀나 꼬리가 튀어나올 것이고, 귀신과 섞였다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을 것이며, 선인과는 만날 일이 없으니 혼혈이 태어날 일도 없다.

‘분명 인간 모습 그대로였어.’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고 다가가 과격하게 몸을 만졌다. 놀라라고 한 짓이었지만, 사실 사심이 듬뿍 담긴 행동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본 묵범은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듯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던 단단한 근육. 그리고 옷 위로 눌렀는데도 뜨겁고 쫀득하게 눌리던 피부를 떠올리니 또 목이 탔다.

테이블에 올려 둔 생수병을 또 단번에 해치우고 공처럼 둥글게 구겨 분리수거 통으로 던져 넣었다.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게 이런 것이구나.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에 묵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생소한 느낌이지만, 적응 못 할 만큼 힘들지도 않다. 오히려 이게 해소가 되면 얼마나 짜릿할지 기대가 됐다. 그러나 갈증을 풀 열쇠인 도방이 연락을 하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흠. 내가 먼저 연락해 봐?’

묵범은 잠잠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려고 잠금을 풀려는 순간.

띠링-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미리 보기 설정도 하지 않아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문자가 올 데가 없는데……?”

묵범은 제 번호를 아는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의 직속상관 천지왕. 그리고 부재중인 대별왕을 대신하여 저승을 관리하는 염라대왕과 강림 도령. 저승에 내려와 함께 일을 했던 김 차사. 일주일 전 먼저 연락처를 준 도방까지 더하면 다섯이다.

천지왕은 휴대폰보다 전서구를 애용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을 선호한다. 염라대왕은 자신이 직접 연락하는 것보다 강림 도령을 시키는 편이고. 강림 도령은 급한 성격 탓에 문자로 간단히 끝낼 일도 반드시 통화를 했다.

김 차사와는 완전히 찢어졌으니 연락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도방……?”

묵범은 서둘러 휴대폰 잠금을 풀고 문자를 확인했다. 도방의 번호는 모르지만, 도방인 게 분명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자 어플을 누른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휴대폰 액정을 빤히 쳐다봤다.

할게.

앞뒤 다 잘라먹고 무작정 ‘할게.’라는 짧은 두 글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묵범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한다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차 키를 챙겨 바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연결음이 묵범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두 번, 네 번, 일곱 번의 연결음이 지나도록 도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열 번을 채우고 결국 먼저 전화를 끊은 묵범은 묘한 눈으로 휴대폰 액정을 쳐다봤다.

‘문자, 방금 보낸 게 아니었나?’

그는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xxxx년 9월 29일 화요일

할게. 오후 7시 12분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15분.

고작 3분 지났다고 전화를 안 받는다?

중요한 문자를 보내 놓고 고작 3분 사이에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의 일이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묵범은 도방이 일부러 제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구미호가 울고 갈 정도로 수준급의 밀당이다.

‘생긴 것은 세상만사 무심하게 생겨서는.’

허리와 엉덩이로 사람을 현혹하는 정체불명의 귀물.

아니, 얼굴이 무심한 것도 유혹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허리와 엉덩이가 돌부처도 넘어갈 만큼 유혹적인데 얼굴마저 그렇다면 세상 살기 힘들 테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얼굴 표정은 지운 것일지도. 하지만,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더욱 불을 붙이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묵범은 어떤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묵범은 다시 도방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으면 문자를 보냈고, 문자를 전송한 다음에 또 전화했다.

우선 차를 몰고 나온 다음에 도방과 통화하며 어디서 만나 이야기를 할지 정하려고 했는데 도통 연락이 닿질 않으니 괜히 나왔나 싶었다. 집 주소라도 알면 쳐들어갈 텐데.

‘어쩔 수 없군.’

묵범은 아까 전화하려다 못했던 곳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도방의 주소는 모르지만, 주소를 알 만한 사람은 안다. 도방이 하계에 머무는 귀물인 이상 반드시 ‘불래’에 드나들 터.

통화를 누르자 요란한 배경음과 함께 발랄한 여자 목소리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행복한 귀물들의 여각. 불래입니다.

위탁 판매는 1번, 대리 구매는 2번, 숙박 예약은 3번, 기타 상담은 4번입니다. 다시 듣기는 별표, 전 단계로 가시려면 우물 정자를 눌러 주세요.

“…….”

불래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으나 용건이 있어 전화를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귀물들이 귀계에서 하계에 드나들기 시작할 무렵 생긴 굉장히 오래된 여각이었으나 인간의 첨단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기도 했다. 저승이 망자 정보를 전산화하기 시작한 계기도 불래 때문이다. 볼 일이 있어 불래에 들린 강림 도령이 옛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불래의 시스템을 보고 감명받아 ‘저승 전산화 100년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망자 정부 관리부는 조기 출근, 주말 출근, 야근을 무려 100년이나 했다. 심지어 휴가도 100년간 반납해야 했다. 그토록 고생한 만큼 저승의 전산화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뭐 하나. 아직도 망자 명부는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써서 가지고 다니는데.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묵범은 기타 상담 4번을 누르고 다음 안내 멘트를 기다렸다. 이용 고객이 많아 상담이 지체될 수 있다는 안내가 채 끝나기 전에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불래 사장 여강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깝쇼?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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