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벌건 대낮에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집의 어둠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지?’
공가로 들어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현천마저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인간은 아니다. 도화는 다온을 한 손으로 안고 다른 손은 현천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여우족의 꼬리는 요력의 강함을 나타낸다. 어린 여우 다온이 화린의 꼬리를 세 개나 훔쳐 달아난 것처럼 여우끼리도 강한 자의 꼬리를 탐내는 일이 드물지만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옛일이고, 지금은 그랬다간 극형에 처한다. 동의하에 넘기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도 아주 극소수의 일이다.
어쨌든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으니 경계해야 했다.
‘여우 꼬리가 여우에게만 효과가 있으니 다른 여우족일 수도 있어. 다온이 하계에 있다는 것을 아는 여우인가?’
도화는 앞의 남자를 경계하며 다온의 엉덩이 부분을 살폈다. 너무 약해진 나머지 여우 꼬리를 드러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꼬리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여우 귀도 없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여우족의 철칙은 잘 지키고 있었다.
문제는 한시라도 빨리 여길 나가야 한다는 건데…. 이동 수단도 문제지만, 앞의 남자가 더 큰 문제다.
“꽤 재미있는 것을 들고 있군요.”
남자는 웃음기를 머금은 낮은 목소리로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다. 굉장히 매력적인 목소리인데. 어디서 들었지?
“다 죽어 가는 여자가 취향인가요?”
“……?”
정체도 모르는 남자한테 이런 질문을 받을 이유가 있나?
도화는 대답하기도 저급한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 의미 불명인 질문을 던졌다.
“곧 삼도천을 건널 여우보다는 싱싱한 호랑이가 낫지 않겠습니까?”
“대체 그게 무슨…….”
삼도천을 건널 여우는 다온인 것 같은데, 싱싱한 호랑이는 뭐지?
[이보게. 도화. 아무래도 미친놈인 것 같구려.]
주머니 속 현천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떨지 말라고 한 대 때리거나 한 소리를 해야 헸지만, 바른말을 했기에 봐주기로 했다.
“귀물들과 꽤 친근한 모양이야.”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걸음 도화에게 다가왔다.
“저번에는 태아귀를 구하더니, 이번에는 삼미호를 구할 셈인가?”
“태아귀……?”
태아귀란 말에 도화의 사고가 잠시 정지되었다. 그러자 주머니 속에서 현천이 마구 검신을 흔들어 댔다.
[뭐 하나! 정신 차리지 않고!]
매섭게 기운까지 흘려 댄 통에 검 자루를 쥔 손바닥이 따끔거려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설마… 그때 그 변태 저승차사?”
“이런. 변태라니. 오해입니다. 전 변태가 아니거든요.”
“오해? 내 몸을 마구 만져 놓고 변태가 아니라고?”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를 냈다. 밖에서 누가 듣고 들어올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평화롭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허리와 엉덩이만 좀 확인한 것뿐입니다.”
“그걸 변태라고 하는 거다.”
그때 얼마나 기겁했는지 아직도 억센 손 힘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강림 도령도 한물갔나 보군. 너 같은 변태를 저승차사로 부리니 말이야.”
“아, 강림 도령? 지금 저승은 너무 바빠서 손각시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겁니다.”
도화는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요즘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난 통에 망자가 폭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손각시의 손도 빌리고 싶을 정도란 말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도화. 이럴 때가 아닐세. 여우의 기운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네.]
현천이 도화의 주의를 끌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다온을 내려다보니 작은 머리통에 뾰족한 귀 두 개가 솟아난 게 보였다. 금수형 요괴가 본신現身의 일부를 내보이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자의로 보여 주든가, 제 몸을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을 때. 후자는 ‘사망’도 포함한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러면 완수금 3억은 물 건너간다.
당장 살려야 한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 수혈을 해야 할 텐데. 인간이 아닌 여우이니 인간의 피를 받을 순 없다. 귀물 전문 병원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귀물 전문 병원을 가려 해도 이 상태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집에 돌아가면 당장 차부터 뽑아야겠다고 다짐한 도화는 변태 저승차사에게 명령했다.
“비켜.”
“그걸 끼고 어딜 가려고 합니까?”
“내가 어딜 가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아무래도 자신을 공격할 의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현천을 잡으려던 손을 뺐다. 그리고 다온을 좀 더 안전하게 안았다. 화린의 꼬리 세 개를 훔쳤기에 이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이었다면 썩어 문드러졌겠고. 아마, 자신을 이곳에 가둔 남자를 원망하다 죽어 원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상태로 나가면 살인자로 오해받을 겁니다.”
“나도 알아.”
“도와드릴까요?”
“…나를?”
네가? 왜? 라는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저번에 그렇게 만났고 헤어졌으니 이쪽이 누구인지 알 텐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평소에 활동할 때는 귀령면을 쓰고 다니니 저승차사와 마주할 일이 없지만, 가끔 맞닥뜨리면 그들은 도화를 산 채로 저승에 끌고 가려고 했다.
저 자식이 아무리 변태라지만, 저승차사인 이상 도와주겠다는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그래서 대놓고 물었다. 설마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하고.
“왜 모릅니까? 저승 공무 집행 방해 민원 1위 ‘도방’ 아닙니까?”
“그런데 나를 돕겠다고?”
“그러면 안 됩니까? 사람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게 하늘의 이치입니다.”
“다른 저승차사들은 나만 보면 잡아가려고 혈안이던데.”
“그거야 승진에 목숨 건 자들이나 그렇고요.”
승진?
뭔가 익숙하지만, 저승이란 곳에서 쓰이기엔 생소한 느낌의 단어다. 저승이 하계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다고 듣긴 했으나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누구 하나 직접 확인하고 온 사람이 없으니 알 길이 있나.
저승의 녹을 먹는 자와 신이 아닌 이상 저승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없다. 오로지 죽어서 갈 수 있고 죄를 다 씻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곳이 저승이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가 저승에 관해 무슨 말을 하든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을 잡으러 달려들던 저승차사들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날 잡으면 포상 휴가를 준다고 했었지.’
단순히 죄인을 잡아가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보통 차사는 직부와 감재, 둘이 한 팀을 이루어 다니는데 자신만 발견하면 세상 둘도 없는 라이벌이 된 것처럼 먼저 잡으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떨 때는 두 차사가 싸우는 틈에 유유히 도망친 적도 있었다.
‘차사들의 일을 방해한 것은 맞지만, 잡으면 승진을 하고 포상 휴가를 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도화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온의 엉덩이 부분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꼬리였다. 귀에 이어 꼬리까지 나온 걸 확인한 도화는 혀를 찼다. 꼬리까지 나온 이상, 더는 미적거릴 수 없다.
“그 상태로 대중교통은 이용이 불가능할 테니 제 차를 타시죠.”
“그 차로 우리 둘 다 저승에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명부에 적힌 자는 삼미호 다온뿐입니다.”
“젠장.”
저승차사가 할 일 없이 이런 달동네 꼭대기에 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망자가 있으니 온 것이겠지.
도화는 다온을 품에 안고 뒷걸음질 쳤다. 다온의 영혼을 저승차사에게 뺏기면 완수금 3억은 굿바이다.
고작 3억 가지고는 서울에서 살 만한 집을 구할 수 없다.
“그 여우. 살려 드릴까요?”
“…뭐?”
도화의 반문에 묵범은 친절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명부에 적힌 삼미호 다온. 사망 날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정말? 그게 가능해?”
“명부에서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명줄을 늘릴 순 있지요. 너무 티 나진 않게. 3~40년 정도는 가능합니다.”
당장 해 달라고 말하려던 도화는 문득, 이 변태 새끼가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의심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이쪽 세계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함부로 약조하면 안 된다는 것을 3억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뭘 원하지?”
“그건 나중에 말하는 게 좋겠군요. 벌써 꼬리가 두 개나 튀어나온 걸 보면 곧 숨이 넘어갈 것 같거든요.”
묵범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묻어나는 웃음기가 그에겐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젠장.”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저자의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화는 제 통제 밖의 상황이 짜증이 났다. 하지만, 다온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결국, 도화는 변태 저승차사의 손을 붙잡았다.
“좋습니다. 먼저 명부를 수정하겠습니다. 그래야 몸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묵범은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 펼치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혀 망자의 정보가 적힌 부분을 슥슥 문질렀다.
저거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참견은 하지 않았다. 참견도 뭘 알아야 하지. 먹으로 쓴 글씨가 침으로 지워질 린 없지만, 저승차사의 침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아, 번졌네. 침으로 지워서 그런가?”
“…….”
특별한 능력은 개뿔.
“가서 수정 테이프로 제대로 수정해 두겠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사망 날짜와 시간은 얼추 뭉개 놨으니까. 지금 상태에서 더 악화되진 않을 겁니다.”
명부를 다시 돌돌 말아 품 안에 넣은 묵범은 먼저 공가에서 나왔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집에 있다가 환한 밖에 나왔으니 눈이 부실 만도 하건만. 그는 멀쩡한 눈으로 공가의 철제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화가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내가 잡았다.’
창문이고 문틈이고 간에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꼼꼼하게 붙여 둔 부적 덕분에 묵범은 제 표정을 도화에게 들키지 않았다. 만약 도화가 묵범의 표정을 봤다면 절대 그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묵범의 얼굴은 도화가 만났던 예의 저승차사들보다 훨씬 진한 탐욕이 드리워 있었다. 승진이나 포상 휴가 때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감직부를 탈출할 수 있게 되었군.’
약 한 달 전.
김 차사는 강림 도령에게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했다. 더는 묵범 진인과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하는 것도 힘든데 자꾸 쳐 대는 사고를 수습하느라 죽을 것 같다고 매달렸다. 차라리 혼자 하겠다고 말이다.
어찌나 애절하게 매달렸는지, 냉혈한으로 소문난 강림 도령이 김 차사의 하소연을 듣고 위로를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열린 문으로 도화가 나왔다. 축 늘어진 다온을 품에 안고 있었으나, 묵범의 눈에는 도화만 보였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