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3화 (4/146)

3화

강진을 통해 돈을 보내겠다길래 며칠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대화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Web 발신]

신화은행 08/20 02:21

132-946-76582

입금 300,000,000

잔액 324,000,000

화린-불래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눈을 비비고 봐도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3억이 통장에 들어왔단 문자가 맞았다.

휴대폰을 들고 굳어 있는 도화에게 강진이 다가와 툭 치며 속삭였다.

“불래에서 받은 의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거, 잊진 않았지?”

도화가 무슨 의뢰를 받았는지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진이 불래의 주인이라곤 하나 이용객의 의뢰까지 모두 꿰뚫을 순 없다.

“여우가 돈 버는 재주가 끝내 주긴 해. 3억은 돈도 아니지. 안 그래?”

도화는 잘하라는 강진의 경고 같은 응원을 받으며 불래를 나섰다.

불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꿈만 같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느라 땀을 흘려도, 볼을 스치는 바람이 후끈해도, 방지턱이 너무 높아서 자전거가 크게 들썩여도 행복했다.

‘이런 의뢰로 몇 개만 더 받는다면 일은 그만두고 호윤의 흔적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겠어.’

우선 새로 이사 갈 집을 찾아봐야지. 고물상도 안 가져갈 세간 살림도 바꿀 생각에 도화의 자전거는 도로 위를 날듯 빠르게 달렸다. 자전거가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도화는 더욱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의 머릿속은 중고 경차를 장만할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 * *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대형 종합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을 찾은 사람들로 정신없는 1층 로비를 일직선으로 거침없이 가로질렀지만, 신기하게도 남자와 부딪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상하다? 왜 춥지?”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이 풀 가동 중이라지만,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해 열려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출입구 탓에 여전히 더웠다. 어딜 봐도 부채질을 하거나 손 선풍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뿐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남자 근처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춥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는 흑립을 쓰고 있었다. 흑립뿐인가?

남자만 과거에서 온 것 같은 옷차림새였다. 잘 차려입은 양반처럼 보였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도포는 보기만 해도 한여름 온도를 1도는 상승시키는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 누구도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남자가 향한 곳은 1층에 있는 응급실이었다. 병원 로비와는 차원이 다른 분주함과 긴장이 녹아든 곳으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신은 검은 구두도 운동화도 아닌 코가 위 솟구친 옛 신발이었다. 정말이지 조선 시대 한 장면을 뚝 떼어다 현실에 붙여 놓은 이질감이었으나, 병원 로비와 마찬가지로 응급실에서도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성큼성큼 걷던 남자는 한 병상 앞에 멈춰 섰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불룩 튀어나온 의자가 안에 보호자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촤악-.

남자가 거침없이 커튼을 걷어 냈다. 아무리 환자를 찾아왔다 해도 왔다는 언질은 하고 커튼을 열었어야 했는데, 참으로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누, 누구세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던 30대 남자가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머리를 다친 것인지 응급처치로 둘둘 둘러 놓은 붕대에 피가 묻어나 있었다. 녹색 티셔츠도 온통 붉다.

흑립을 쓴 남자는 냉담한 눈빛으로 다친 남자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더니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 읽었다.

“정묘년 계묘월 무인일 갑인시에 출생한 이재성.”

“…네? 저, 정묘년? 계모… 계모?”

“맞으시오?”

“제가요?”

이재성이라 불린 남자는 이상한 옷차림도 모자라 옛날 사람들이나 쓸 법한 말을 하는 남자를 미친놈처럼 쳐다봤다. 그리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엄마를 흔들었다.

“어, 엄마. 저 남자 누구야? 엄마가 불렀어?”

“…….”

“엄마?”

다급하게 흔들며 물었지만, 그녀는 참담한 눈빛으로 응급실 침대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남자는 다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묘년 계묘월 무인일 갑인시에 출생한 이재성이 맞는가?”

“네? 제가 이재성인 건 맞는데, 정묘년 계묘월… 대체 그건 뭡니까? 그리고 누구신데 온 거예요? 엄마 연락 받고 오셨어요?”

“네 어머니는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았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여긴 정신과가 아니라 응급실이니까, 저기 의사한테 정신과가 어디인지 물어보세요.”

이재성은 정체 모를 남자가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를 질문을 해 대니 점점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노가다를 뛰다 5층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크게 다친 것 같은데 생긴 건 꼭 저승사자같이 생긴 놈이 자꾸 이상한 걸 물어 대니…….

‘저승사자?’

저승사자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피를 많이 흘려서 추웠던 게 아니었나?

이재성은 다급히 엄마를 흔들었다. 그러자 눈 뜨고 자는 게 아닌가 싶던 엄마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데… 어쩌면 좋누.”

“…엄마?”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엄마의 말은 이재성에게 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냥 혼잣말,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아들 상태에 의미 없이 흘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재성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재성은 엄마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줄 알았지만,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폭 좁은 응급실 침대였다. 시트에 흘린 피가 마르지 않아 그녀의 손끝에 축축이 묻어났다. 그걸 본 그녀의 입에서 길고 무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저, 저기… 저 진짜… 죽은 겁니까?”

“죽었으니까 저승사자가 왔지.”

그때였다. 뒤에서 시커먼 남자가 소리도 없이 합류했다.

‘헉…! 무슨 사람이 저렇게 커?’

갑자기 나타난 남자 역시 흑립과 도포 차림이었다. 하지만, 먼저 온 남자와 다른 점은 도포 안 차림새였다.

‘슈트?’

앞선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선 시대에서 온 남자 같았다면 이 남자는 고급스러운 슈트 위에 도포만 툭 걸친 모습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머리에 쓴 흑립 때문에 절대 평범해 보이진 않았으나, 그나마 슈트를 입은 사람이 조금은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저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용기를 내어 늦게 온 남자에게 물었으나, 남자는 이재성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먼저 온 남자의 어깨에 팔을 툭 올리며 말했다.

“이봐요. 김 차사. 요즘 시대가 어떤데 정묘년이니 계묘월이니 하는 말로 망자에게 대답을 요구합니까?”

“이건 저승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온 육십간지로 망자의 정보를 기록하여-.”

“1987년 3월 30일 새벽 3시 35분에 태어난 이재성 씨. 맞으십니까?”

남자는 김 차사의 말을 뚝 자르고 이재성에게 직접 물었다. 이재성은 드디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질문에 화색이 돌았지만, 질문 내용이 자신의 출생 정보인 것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 맞습니다만….”

이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덩치 큰 남자가 팔꿈치로 김 차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러자 내내 냉랭했던 김 차사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했다.

“묵범 진인. 당신은 천계의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저승 일을 돕기로 한 이상 저승의 법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어디 나가서 아무 망자나 붙잡고 물어봅시다. 흠… 저기 저 망자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군요.”

묵범 진인이라 불린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갓 20대가 된 듯한 여자가 맞은편 침대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물에 빠졌던 것인지 온몸이 푹 젖은 꼴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김 차사의 품속에 손을 쑥 집어넣어 둘둘 말린 붉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여자를 향해 말했다.

“임오년 계해월 정유일 기묘시에 출생한 조인영 씨.”

‘조인영’이란 말에 여자가 살짝 움찔했지만, 그게 다였다. 묵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까 이재성에게 했던 것처럼 양력으로 다시 말했다.

“2002년 11월 12일 오전 7시에 태어난 조인영 씨?”

그러자 이름을 불린 여자가 묵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 풀렸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자신의 출생 정보와 이름에 반응한 것이 분명했다.

“거 보세요. 요즘 사람들은 양력만 알아듣는다니까요?”

“흠, 흠흠.”

이재성은 멍하니 두 남자를 쳐다보다 자신의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여전히 피 묻은 응급실 침대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찌 보내누. 으응? 세상에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어디 있다고. 암, 그렇고말고. 우리 재성이 거뜬히 이겨 낼 거야. 그래야지. 그렇지, 재성아?”

“엄마…….”

“검사받으러 갔으니 좋은 소식 있겠지. 어휴, 이 양반은 왜 이렇다 저렇다 소식이 없어?”

아들의 검사에 따라간 남편을 탓하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꾸민 목소리는 얼마 가지 못하고 눈물에 젖어 축축한 소리로 변했다.

“저… 죽었나요?”

묻고 싶지 않았지만, 물었다. 이렇게 정신도 또렷하고 말도 하고 있지만, 엄마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엄마뿐인가? 중증의 환자가 피를 흘리며 이렇게 서 있는데 바로 옆을 지나가는 의사며 간호사며, 누구 하나 자신에게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제게 말을 건 사람은 저승사자인 게 분명한 온통 검은색의 두 남자와.

“아저씨도 죽었어요? 나도 죽은 거 같은데.”

그리고 조인영이라 불린 어린 여자. 이렇게 셋이 전부다.

“이봐요. 1팀 김 차사. 앞으로는 그런 고리타분한 출생시로 묻지 말고 양력으로 물읍시다. 알겠어요?”

묵범은 김 차사가 어이없단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주장을 펼쳤다. 그런 묵범 진인을 두 망자는 넋 나간 눈으로 쳐다봤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죽었다는 충격에 빠져 묵범 진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물론 충격은 여전했으나 묵범의 얼굴은 그 충격을 상쇄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김 차사는 묵범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듯 가져와 다시 품에 넣고는 두 망자에게 다가왔다.

“망자는 예정된 생의 모든 시간을 소진하여 이승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순순히 나를 따라오면 저승 시왕 앞에 나가 윤회의 업보에 대한 판결을 받을 수 있다.”

“따라가지 않으면요?”

조인영이 맹랑하게 물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업보에 공무 불복종이라는 업보가 하나 더 붙게 될 것이다. 저승의 순리를 벗어난 망자는 악귀가 되는 법.”

“악귀? 그럴 생각까진 없는데….”

“악귀가 되고 싶으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악귀가 된다는 섬뜩한 말이 돌아왔다. 그런데 묵범은 악귀란 말에 뭐가 그리 신났는지 싱글벙글이다. 심지어 어서 도망치란 듯이 몸을 옆으로 비켜서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악귀가 없어서 너무 따분했었는데 잘되었군요. 당신이 악귀가 되어 준다면 제가 친히 잡으러 가겠습니다.”

묵범이 굵직한 붉은 밧줄을 꺼내며 말했다. 밧줄에서 흐르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엇… 아니, 아니에요.”

조인영은 아니라고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김 차사 옆에 딱 붙어 섰다. 덩달아 이재성도 그녀 옆에 섰다. 묵범이 붉은 밧줄을 꺼내 든 순간, 저 밧줄에 묶이면 안 된다는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부용삭에 묶인 악귀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던져지니까요.”

김 차사의 말에 두 망자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갑시다.”

가자는 김 차사의 말에 이재성은 뒤늦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의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자신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엄마이지만, 이렇게라도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다.

“요즘 영혼들은 패기가 없단 말이야. 재미없게.”

뒤에서 어이없는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재성은 애써 무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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