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재회의 기쁨에 빠져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있던 마신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세르미네는 옥상 공원에서 마주했던 마신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만큼 그는 강대한 적이었다.
그러니만큼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삼위일체의 힘이 통하지 않는 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인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등, 온통 걱정거리뿐이었다.
“난 이제 괜찮아. 루아에게 가자.”
그러면서 리슈아는 양손을 내밀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에게 일으켜달라는 신호였다. 본래는 제힘으로 일어나 침대에서 벌떡 내려오곤 했지만, 지금은 서로를 화해하게 하려는 리슈아 나름의 노력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리슈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아이에게 하듯 공중에 붕 띄워 바닥에 내려주자 리슈아는 다시 웃으며 좋아했다.
마이데는 실수를 무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더욱 복잡해진 기분을 눌러 삼키며 리슈아의 한쪽 손을 잡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성 밖으로 나가는 길은 들어왔을 때보다 유독 짧게 느껴졌다. 붉은색의 문을 나가니 조금 기울어진 햇살이 그들의 시야를 잠시 가렸다가 이내 돌려주었다.
분수대의 벤치와 똑같은 재질인 탁한 흰색을 띤 돌로 만든 계단을 내려가니 눈앞에는 하얀 꽃이 만발했다. 인간 세계에는 없는, 아틀란티스에서만 나는 꽃들이 성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꽃과 꽃 사이로 난 작은 흙길을 따라 걸었다. 루아가 사는 동쪽 탑으로 가려면 이 길이 지름길이었다.
리슈아는 평소처럼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그 말들을 받아주는 것은 마이데였다. 그는 아까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열심히 리슈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보기 드물게 리슈아보다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바로 마신에 대한 고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신이 만약 평범하게 기사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해왔다면, 세르미네도 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저 강한 마족, 마족의 우두머리라고 취급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의 눈으로 본 마신은 리슈아에게 유난히 강한 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처음부터 리슈아를 알고 있던 것처럼, 그에게 원한을 품은 것처럼, 치르티티샤처럼 말이었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인간이었을 때의 원한이 있었다고 해도, 마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리슈아에게 원한을 가질 수 있지?’
생각에 골몰해있던 세르미네는 하마터면 길가에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나마 리슈아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볼썽사나운 꼴은 면한 그는 멍한 표정으로 생각을 잠시 걷어냈다.
“세르미네, 무슨 생각해? 다 왔어!”
“너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다 있군. 별일이야.”
두 사람에게 한 소리씩 들으며 정면을 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루아의 탑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
“리슈아는 그렇다 쳐도, 넌 마신에 대해 고민도 없냐.”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마이데는 어깨를 으쓱하며 난처하게 웃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마신에 대해 생각은 있지. 그렇지만 그걸 고민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잖아. 지금 나 혼자 끙끙 앓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마이데는 탑의 문을 열며 세르미네에게 마치 훈계하듯 말했다. 세르미네는 몹시 기분이 나빴지만, 리슈아를 옆에 두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꾹 눌러 참았다.
긴 나선형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루아의 기도실 앞에 도착한 그들은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이곳에 오랜만에 오는 리슈아는 계단이 신기해 아래를 내려다보려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조심해야지.”
세르미네가 리슈아의 한쪽 팔을 잡아 자기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동시에 기도실의 문이 열리며 가장 안쪽에서 루아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루아는 평소보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는 폴라로이아도 평소와 달리 태블릿PC를 보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도실 끝에서 들어오는 리슈아를 가장 먼저 바라보더니, 이내 양옆의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보고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리슈아의 등장에 기뻐하지 않는 것은 리레시아 뿐이었다.
“세르미네 님~!”
비어 있는 세르미네의 팔에 폭 매달린 리레시아를 보고도 리슈아는 그저 헤헤, 웃을 뿐이었다. 그것이 리레시아의 열등감을 더욱 자극했는지, 리레시아는 세르미네의 팔에 뺨을 비비며 더욱 친밀함을 과시했다.
“리레시아. 일단 자리에 앉아 마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세르미네는 리슈아의 눈치를 살피며 리레시아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리슈아가 웃고 있다지만, 리슈아 외의 다른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살가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쳇, 할 수 없죠. 알겠어요.”
리레시아는 혀를 차며 기도실의 작은 의자에 뛰어올라 앉았다. 그는 마이데와는 약간 결이 다르게, 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심기가 몹시 좋지 않았다.
모두가 적당히 자신이 좋아하는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리슈아는 특히 볕이 잘 드는 창가를 선호했는데, 그 때문에 바로 옆에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몰려 앉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리레시아는 독기 품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루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럼 마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그녀는 괜한 잡담을 막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운을 뗐다. 리슈아의 각성 덕분에 완전히 원래대로 복구된 지팡이를 들어 중앙의 석상을 향하니, 그날 보였던 마신의 환영이 나타났다.
“여러분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녀는 본체가 아닙니다. 그녀가 안고 있는 검은 구체, 그것이 바로 마신이지요.”
폴라로이아가 태블릿PC에 자판기를 연결하여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쳐내려 갔다. 일종의 서기관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애가 공격을 하기도 하고, 마치 말하는 것을 보면 자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던데?”
리레시아가 그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세르미네가 보기에도 결코 소녀는 단순한 단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역마일 수도 있지 않아?”
이번에는 마이데의 의견이었다. 그는 리슈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날카로운 척 안경을 손가락으로 슥 올려 보였다.
“현재로서는 사역마라는 의견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합니다. 폴라로이아, 그 검은 물질과 소녀, 그리고 소녀가 들고 있던 구체의 일치율은 얼마나 되지요?”
그러자 폴라로이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그는 잠시의 주저도 없이 모두를 향해 고개를 들어 짧게 말했다.
“일치율 99.99%, 오차 범위 0.12%.”
“그렇다는 것은 마신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끊임없이 감시했으며, 치르티티샤라는 자객까지 보내 우리를 죽이려 했다는 말이네.”
마이데가 말하자 리레시아가 한 마디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우리라기보단 리슈아, 저 녀석 아니야?”
리슈아는 제가 호명되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역시 아무리 잊으려 해도 마신과 대적했을 때 느꼈던 고통은 잊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리슈아. 이제 막 각성한 당신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거 같아 미안하지만, 청이 있습니다.”
루아는 리슈아에게 보다 정중하게 말을 했다. 아무리 정예 기사와 무녀가 대등한 관계라지만, 리슈아가 왕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루아에게는 더욱 깊이 박혀있었다.
“응?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
“아틀란티스의 왕과 후계자, 그리고 기사단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금서고에 대해 기억하시겠지요.”
루아는 이전에도 언급한 금서고에 대해 말을 꺼냈다. 리슈아는 아직 기억이 정리되지 않아 잠시 음, 하고 생각하더니 이내 아, 하고 기억해냈다.
“맞아. 금서고. 성의 가장 구석진 방에 있는 그곳 말이지. 그럼. 기억하지.”
“그 금서고에서 혹시 마신이나 다른 전투에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루아의 검은 눈동자가 리슈아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여전히 광채 없는 탁한 눈동자였지만, 오랫동안 함께 알고 지내오면서 그녀가 가진 나름의 배려와 다정함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는 폴라로이아와 함께 마신에 대한 분석을 더 진행하겠습니다. 다른 세 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상의 마족에 대처해 주십시오.”
이제 인간 세계에 거점이 없으니 예전처럼 순찰을 돌며 마족을 찾아내거나 루아가 감지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세르미네나 마이데, 그리고 리레시아 모두 가만히 앉아 루아의 신호만 기다리기엔 좀이 쑤셨다.
“좋아. 그럼 내일 당장에라도 나가서 순찰을 시작하지.”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있기도 했고, 모두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 점을 잘 아는 루아도 더 붙잡지 않고 일행을 해산하게 했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세르미네는 재킷을 벗어 하얀색의 일인용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고는 맞은편의 길쭉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리슈아의 방과는 달리 다소 소박한 느낌의 그 방은 사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멸망하기 전, 이런저런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응접실이었다. 기사들은 본래 기사단 건물에서 머물렀고, 정예 기사들 또한 머무는 처소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대륙이 멸망하고 왕이나 다른 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넓은 성을 리슈아가 혼자 다 쓸 수는 없었다. 때문에 개중 쓸 만한 방을 개조하고, 가구를 들이거나 하여 기사들이 모두 성의 1층과 2층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리레시아와 마이데의 방은 2층에 있었고, 세르미네의 방은 1층의 중앙 조각상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응접실로 쓰였던 탓에 세르미네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장식이나 태피스트리가 잔뜩 걸려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치우거나 하지 않았다. 이 또한 모두 옛 아틀란티스의 추억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긴 시간이었어….”
리슈아를 잃고, 찾아 헤매고, 가연의 삶을 사는 리슈아를 각성하게 하기까지 수도 없이 태양이 뜨고 달이 뜨기를 반복했다. 지쳐 떨어질 법도 했지만, 그는 리슈아를 되찾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아직 마신이라는 강대한 적이 남아있긴 했지만, 목표를 하나 이룬 세르미네는 오히려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세르미네에게 있어서는 목표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일종의 골 사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둥글게 솟은 높은 천장을 보며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이제는 그 허탈함을 리슈아에게 표현하는 애정으로 풀어야 할 때였다.
세르미네는 다시 몸을 일으켜 재킷을 걸쳤다. 느릿느릿 자신의 방을 나와 오른쪽 회랑으로 돌아가는 세르미네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는 리슈아의 방으로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