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아, 아니. 세르미네가 왜 저기에 있지…?’
가연은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또 다른 기사들을 호명하는 사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지금 시기는 세르미네가 평기사였던, 아직 아틀란티스가 멸망하지 않았던 한참 옛날의 어느 날일 거라고 추측했다. 가연은 리슈아일 당시 보았던 장면을 제3자의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게다가 세르미네와 리슈아가 서로를 좋아하던 시기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투구를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슈아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리슈아 또한 세르미네를 보고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으니, 아마 이때의 두 사람은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을 터였다.
서른두 명의 기사들을 전부 호명하자 우라노스 왕은 대련 시작을 알리는 선언을 했다. 나팔이 다시 한번 크게 울리고, 기사들은 일단 전원 퇴장했다.
그 뒤로 두 기사가 짝을 지어 등장해 왕과 리슈아에게 한 번 인사하고는, 서로 무기를 맞대고 싸우기 시작했다.
‘으, 아무리 죽이거나 큰 부상을 입히지는 않겠지만…, 역시 못 보겠어.’
가연은 한 기사가 다른 기사의 창에 맞고 쓰러지자 질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시선이 닿은 리슈아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까지 돌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창을 든 기사의 승리로 첫 시합이 끝나고, 다음 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가연은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세르미네는 언제 나오나 싶다가도 이런 위험한 경기에 세르미네가 나오지 말았으면 싶었다.
세르미네는 네 번째 시합에 등장했다. 그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대검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키와 거의 흡사한 크기의 검을 휘두르는 그는 매우 용맹해 보였다.
그의 상대는 쌍검을 사용하는 기사였다. 체구가 작아 마치 리슈아처럼 속도전으로 승부하는 기사였다.
대검은 힘과 파괴력은 엄청났지만, 그런 만큼 움직임도 커 빈틈을 보이기 쉬웠다. 상대 기사도 그걸 노리고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세르미네의 시야를 교란하려 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대검의 날을 눕혀 마치 방패처럼 쌍검을 흘려보내더니 가볍게 상대 기사를 제압했다.
“우와….”
가연의 심정처럼 리슈아도 탄성을 내뱉었다. 세르미네는 그만큼 굉장한 실력이 돋보였다.
게다가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이겼든 졌든 투구를 완전히 벗어 왕에게 정중하고 깊이 인사했다. 특별히 예를 차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얼굴을 기억해달라는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저 투구의 눈가리개 부분만 열고는 꾸벅, 인사하고 물러난 게 전부였다. 정말 말 그대로 예의상 인사했다, 이런 느낌이 훨씬 강했다.
‘지금도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저 때는 정말 무뚝뚝했네.’
가연은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옆의 리슈아를 돌아보니 그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슈아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때의 리슈아는 미래의 세르미네를 모르지.’
가연은 그리 생각하며 시합을 쭉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일던 싸움도 계속 보고 나니 차츰 기사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게다가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까지 가능해졌다.
시합은 토너먼트처럼 이루어졌다. 서른두 명의 기사 중 시합에서 이긴 자들이 16강, 8강, 그리고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오래 걸리는 시합이 있는가 하면 단번에 끝나는 시합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시합은 각각 채 5분을 넘기지 않았다. 만일 5분을 넘기는 시합이 있다면, 정예 기사 다섯 명의 판단으로 승자를 결정했다.
세르미네는 준결승까지 순식간에 올라왔다. 적을 제압하는 속도, 움직임, 그리고 심지어 미적인 부분까지 점수가 상당히 높았다.
“저자, 세르미네라고 했던가? 제법이군. 그렇지 않느냐?”
우라노스 왕은 감탄하며 리슈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리슈아는 점점 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왕이 묻기에 애써 목소리를 밝게 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세르미네가 이기면 좋은 거 아닌가?’
가연은 처음엔 리슈아가 어디 아픈가 싶었지만, 다른 기사들의 시합을 볼 때는 그저 무덤덤하게 관람할 뿐이었다. 오로지 세르미네의 시합만 복잡한 감정을 담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세르미네는 준결승에서 안타깝게 패하고 말았다. 실력은 비등했지만, 상대와의 상성이 굉장히 나빴다. 원거리 공격을 사용하는 적을 세르미네는 필사적으로 막으며 접근해봤지만, 수호룡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규칙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
‘아마 날개를 쓸 수 있었다면, 그리고 활을 쓸 수 있었으면 상황이 달랐겠지.’
가연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더욱 분했다. 하지만 세르미네 본인은 그저 무덤덤하게 흙을 털고 일어나더니 또다시 투구 덮개를 열고 꾸벅, 인사하고 돌아갈 뿐이었다.
‘저 때 심정이 어땠을까. 우승하면 정예 기사가 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가연은 유유히 사라지는 세르미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리슈아를 돌아보았다. 리슈아는 시녀 중 급이 높아 보이는 자와 무어라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응? 뭐지?’
가연은 엿들어보려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리슈아는 금세 자세를 고쳐 앉더니 앞을 응시했고, 얼마 남지 않은 시합은 곧 끝이 났다.
승자는 삼지창을 쓰는 키가 큰 기사였다. 그는 우라노스 왕의 축사와 함께 정예 기사가 되었고, 모두의 축복을 받았다.
리슈아도 일단 우승자에게 축복을 내리며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하지만 가연은 그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날이 어둑해졌다. 우라노스 왕을 비롯해 모든 기사들도 일제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고, 리슈아만이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눈 계급 높은 시녀와 함께 연무장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연무장 저편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가연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세르미네였다.
“당신, 분명 세르미네였지.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어.”
투구를 벗고, 갑옷을 갈아입은 그는 아틀란티스 기사단의 평복 위에 예를 차리기 위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당연히 왕의 후계자와 독대하는 자리였기에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다.
“이번 시합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질책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세르미네는 점찍어둔 자신이 우승하지 못하자 리슈아가 화내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쯤은 가연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아니야! 우승 같은 건 하지 못해도 괜찮아. 세르미네는 최선을 다했잖아.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어. 다만….”
리슈아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나 싶어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제, 제가 결례를 범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야, 세르미네. 나는 그저…, 세르미네는 무얼 위해서 기사가 되었고, 무얼 위해 싸우는지 묻고 싶었어.”
“그건….”
세르미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가연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싶었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세르미네는 생각을 하다 결국 사과로 일축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명예나 부, 혹은 마족에 대한 분노로 싸우고 있었어. 그 때문에 정예 기사가 되기 위해, 혹은 폐하께 잘 보이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저 너무 공허해 보였어.”
“그렇습니까. 제가 후계자님께 심려를 끼쳤군요.”
세르미네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러나 리슈아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며 강하게 반박했다.
“물론 마족과의 싸움도 중요해. 하지만 세르미네에게 바라는 건, 조금 더 자신을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저 전투 기계처럼 싸우는 게 아닌, 세르미네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리슈아는 자신이 예복 가슴에 달고 있던 로제트 모양의 브로치를 뺐다. 그것은 루드베키아 꽃을 잘 말려 하얀 천으로 장식한, 매우 아름다운 브로치였다.
“루드베키아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래. 나는 세르미네가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그 말을 남긴 리슈아는 세르미네의 손에 브로치를 쥐여 주고는 답도 듣지 않고 성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마 그것이 리슈아의 최선이었을 것이라 가연은 추측했다.
‘영원한 행복…. 세르미네의 행복….’
가연은 그 말을 되뇌자 또 한 번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시야가 확 바뀌었다.
그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었다. 가연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리슈아의 옛 기억이 가연에게 전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