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르미네는 폴라로이아가 띄워준 영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분명 리슈아, 가연이었다.
“가연이는 지금 어디 있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폴라로이아는 세르미네의 발아래에 마주 놓인 침대를 가리켰다. 움직일 수가 없는 세르미네는 마주 보고 있는 침대를 볼 수 없었다. 폴라로이아는 그래서 영상을 띄워준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가연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위에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환자실로 가야 하는 것을 저희가 설득했습니다. 단,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전부 저희 책임인 것으로 말이죠.”
루아가 설명했다. 어차피 인간들의 치료 기술로 이런 중상을 완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치유 능력을 쓸 수 없다면 아틀란티스인의 자연치유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세르미네, 당신의 치료에 전념하세요. 마신은 간신히 물러나게 했지만, 마족은 언제 또 침략해올지 모릅니다.”
루아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가연에 대한 걱정을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
‘여긴… 어디지?’
가연은 낯설지만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곳에 와 있었다. 대리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내부, 덩굴과 꽃으로 장식된 기둥, 회랑마다 걸린 초상화들을 보며 그는 여기가 어딘가의 성임을 깨달았다.
‘꿈인가?’
분명 조금 전까지 마신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성의 복도 한가운데에 붉은 융단을 밟고 서 있었다.
“후계자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에 가연은 돌아보았다. 전형적인 중세의 검은 시녀복을 입은 여성 두 사람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후계자님? 그게 누구…, 어?”
손을 저어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리려던 가연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리슈아로 변하면 늘 바뀌는 딱 달라붙는 검은 소매가 아니었다. 연보라색의 하늘하늘한 소매에는 작고 파란 보석이 점점이 박혀있었고, 금줄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갑자기 눈앞이 빙글 돌더니, 그는 마치 전지적 시점처럼 하늘에 둥둥 떠서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가 방금까지 빙의해 있던 몸은 다름 아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 리슈아였다.
“후계자님. 몸이 불편하시면 오늘 일정은 쉬시는 게….”
“아니, 아니에요. 불편하지 않아요. 오늘은 기사들의 대련을 참관하는 중요한 날인걸요. 왕께서도 제가 참석하길 바라십니다.”
리슈아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가연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는 리슈아를 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전의 리슈아는 저랬던 걸까?’
자신과 리슈아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가연은 잠시 고민했다. 그 사이 리슈아는 시녀들과 함께 회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앗, 놓치면 안 돼!’
왠지는 모르겠지만 리슈아를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가연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마음먹자, 의식은 점차 리슈아를 뒤쫓기 시작했다.
‘이게 꿈이 맞구나. 자각몽인가? 그런데 여긴 어디고, 저 리슈아는 언제쯤의 리슈아지?’
분명 자신의 전생일 터인데,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문에라도 리슈아를 놓치면 자신은 여기서 길을 잃고 영원히 헤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슈아는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기사들이 열어주는 문을 따라 나간 뒤, 바깥 회랑을 쭉 걸어갔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품위가 있었다.
‘놀라운걸. 내가 예전에 저랬었다니….’
그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리슈아는 예복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팔을 부축해주어 겨우 고꾸라지는 것을 면한 리슈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 고마워요. 아이참, 왜 이러지….”
‘아, 내가 맞구나. 저런 실수를 하는 걸 보니까 확실하네.’
리슈아만큼이나 가연도 당황했다. 어쩜 저런 면까지 전생과 다를 게 하나 없는지, 가연은 천성이란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리슈아 일행은 성을 빠져나가 정원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가연은 정원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이런 정원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 식물들의 종류도 종류지만, 어쩜 이렇게 잘 가꾸어놨지?’
일부러 모양을 내지 않고 자연 형태 그대로 두면서도, 색과 특성에 따른 식물의 배치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적절한 장식품들로 이루어진 정원은 마치 천상의 낙원을 그대로 따온 것만 같았다.
“리슈아 님의 정원은 언제 봐도 정말 아름다워요!”
발랄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시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그러자 리슈아는 헤헤, 하고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이게 전부 리슈아의 작품이란 말이야? 세르미네가 리슈아는 정원을 잘 가꾼다고 했지만, 진짜인가 보다….’
이곳의 지금 계절은 초가을인지 여름꽃과 가을꽃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리슈아와 시녀들은 꽃이 만발한 길을 지나 어디론가 계속 걸어갔다.
‘정원은 참 예쁜데, 어디로 가는 거지? 이 성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사념체일 뿐이라 걸어가는 데 힘은 들지 않았지만, 가연은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다 문득 리슈아가 고개를 돌렸다.
‘…!’
가연은 자신이 보일 리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리슈아나 다른 시녀들은 가연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지금, 리슈아와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고 가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가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리슈아는 살짝 미소 짓더니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정원의 허리만큼 오는 넝쿨 담장 너머로 흙이 깔린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야? 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크고, 이상한 것들이 굉장히 많은데?’
곳곳에 놓인, 나무로 만든 대련 인형과 갖가지 무기들, 그리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천조각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연무장의 한구석에 대충 쌓여 있었고, 넓은 중앙은 텅 비어 있었다.
리슈아는 연무장 둘레에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2층 높이의 관람석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휘장을 두르고, 양옆으로 깃발을 내건 관람석의 2층으로 리슈아는 올라갔다.
“왔느냐.”
갑자기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 가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2층의 관람석에는 이미 누군가 와 있었다.
“예, 우라노스 폐하.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폐하라고?’
가연은 그 말에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기품있는 금색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쓴 초로의 노인은 허리에 예식용 검을 차고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지만, 빛나는 푸른 눈동자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이 사람이 우라노스라니, 그럼 여기는 아틀란티스가 맞구나. 그것도 옛날의….’
가연은 그렇게 짐작했다. 리슈아는 우라노스가 앉아있는 옆자리, 고풍스러운 금테 장식의 붉은 벨벳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두 사람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앞을 주시하자, 가연 또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앞에는 텅 빈 연무장만이 있었다.
“기사들을 들게 하라!”
갑자기 우라노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하얀 갑옷에 문양이 새겨진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가 자신의 동료에게 지시하더니 나팔을 불었다.
‘아이고, 귀야….’
나팔 소리가 어찌나 큰지 가연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그러나 리슈아는 이 소리가 익숙한 듯 그저 미소 어린 표정으로 앞만 주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끝나자, 어디선가 철컥거리는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연은 왼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 우와. 저게 다 뭐야?!’
회색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까지 쓴 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나팔을 분 것과 똑같은, 하얀 갑옷의 기사가 아마도 아틀란티스의 깃발로 추정되는 것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연무장 한가운데, 관람석을 마주 보고 서자, 깃발을 든 하얀 기사는 관람석의 1층으로 물러났다.
‘서른두 명이나 되네…. 저 사람들은 다 누구지?’
갑옷의 색이나 형태로 미루어보아 하얀 갑옷의 사람보다는 급이 낮아 보였다.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며 우라노스가 일어나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그대들, 평기사들의 대련을 통해 정예 기사를 뽑는 영예로운….‘
말은 길었지만, 서두에서 가연은 핵심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자리는 기사들의 대련 자리였다. 세르미네가 늘 말하던 정예 기사를 뽑는, 일종의 시험과도 같았다.
길고 긴, 마치 교장 선생님의 훈화와도 같은 우라노스의 연설이 끝나자 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사념체라 다리가 아플 일은 없다지만, 이런 긴 연설은 역시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서른두 명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자리였다. 투구를 쓴 채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여러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면서도, 기사들의 얼굴을 왕에게 각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차피 여기 있는 서른두 명이 기사의 전부는 아니겠지. 이들도 실력이 괜찮은 자들일 거야. 그러니 왕의 눈에 들어두면 좋겠지.’
조금 전 나팔을 불었던 기사가 긴 종이를 들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희한한 발음의 이름들이 불릴 때마다 기사가 한 명씩 투구를 벗고 우라노스와 리슈아에게 예를 표했다.
그 광경을 가연은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
갑자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 불리자 가연은 누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때린 것 같았다.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그리고 연무장을 바라보니, 한 기사가 투구를 서서히 벗고 있었다. 짧고 하얀 머리카락, 금색의 눈동자, 분명 자신이 아는 그가 맞았다.
세르미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