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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82화 (82/87)

82화

세르미네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일으켰다. 입 안에 고여있던 피를 뱉어낸 그는 삼위일체의 힘이 쓸고 간 자리를 지켜보았다.

‘정말… 마신에게 타격을 준 건가?’

그의 마음에 기대가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유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기라도 하듯, 불안을 현실로 만들어 주듯, 걷힌 불기둥 안에서 나타난 것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소녀와 마신이었다.

[아…, 따뜻해. 이렇게 환대를 해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삼위일체의 힘을 쓰고도 적이 쓰러지지 않자 리레시아는 망연자실하게 마신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폴라로이아나 루아도 마찬가지였다.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마신을 막아서야 했다.

그때였다.

“늦어서 미안해! 메시지를 너무 늦게 보고 말았는데, 이게 무슨 난리… 세르미네?!”

멀리서 가연이 리슈아로 변해 뛰어오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을 보며 반가움과 동시에 어서 피했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삼위일체의 힘도 막아내는 적에게 가연이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연은 부상 당해 쓰러진 사람들, 특히 세르미네를 보고 놀라 달려왔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온 그의 몸 상태는 누가 봐도 좋지 않아 보였다.

“세르미네, 괜찮아? 다들 어째서…?”

[헤에, 네가 그 아이구나. 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갑자기 마신이 가연을 보더니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가연은 그제야 마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건 뭐야? 고위 마족?”

[나를 마족 따위와 비교하다니, 기분이 나쁜걸?]

소녀가 다소 날카롭게 말을 던졌다. 그러더니 가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검은 구체를 두 손으로 치켜들었다.

[너는 특별히 조금 더 괴롭혀 줘야겠어.]

구체에서 검은 광선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9할 이상이 가연을 향했다. 가연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검고 반투명한 유리와 같은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가연아, 안 돼! 피해! 저건….”

방어막으로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가연은 광선 공격에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으악!”

그의 몸 위로 쏟아지는 포격에 세르미네는 온 힘을 쥐어짜 가연의 위로 방어막을 덮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가연의 방어막이 합쳐지자 포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욱했던 연기가 걷힌 뒤 드러난 가연의 몸은 온통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콜록거리며 겨우 정신을 차린 가연을 보자,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아직도 살아있어?]

공격의 전조도 없었다. 갑자기 검게 구름이 드리운 하늘에서 검은 번개가 연달아 가연에게 꽂혔다.

그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온몸에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통증이 내달렸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끝나고, 가연은 땅에 풀썩 쓰러졌다.

“가연아! 가연아…!”

세르미네의 두 눈이 커졌다. 찰나에 일어난 공격이라 세르미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경악에 차 모든 것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가연이 쓰러지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세르미네가 달려갔다. 그러나 가연은 대답이 없었다. 아직도 잔류가 파직, 흐르는 몸에는 여기저기 참혹한 상처가 가득했다.

“아직 희미하지만 숨은 붙어있습니다. 이 이상 공격만 받지 않는다면….”

그들 중 그나마 부상이 적은 루아가 다가와 가연을 살폈다. 그 옆에서는 폴라로이아가 금강저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너, 너 이 자식! 용서할 수 없다!”

상대가 마신이든 무엇이든 이제 세르미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 때문에 가연이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용서할 수 없어? 왜?]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르미네는 그 모습이 더욱 화가 나 부상 입은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이 따끔거렸지만, 가연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들고 날개를 펴 날아올랐다. 목표는 마신의 본체였다. 그는 수호룡의 힘으로 빛에 감싸인 대검을 마신의 본체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그 사이는 검은 방어막으로 가로막혀있었다. 세르미네는 방어막을 뚫고 본체에 타격을 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큭…, 내가 잘못되더라도 네 녀석은 길동무로 데려가야겠어…!”

가연 때문에 세르미네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뒤에는 쓰러진 리레시아와 움직일 수 없는 마이데, 그리고 초조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루아와 상황을 분석하는 폴라로이아가 있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모두가 끝장이었다.

[흐음, 그렇구나. 넌 모든 것을 지키고 싶구나. 다 소용없는 일인데도 말이야.]

“안 됩니다, 세르미네! 물러나세요!”

뒤에서 루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폴라로이아가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려도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 죽어버려.]

소녀는 구체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구체에서 예의 검고 끈적한 물질이 팟, 하고 튀어나오더니 쇼핑몰과 아파트, 온 건물을 감쌌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폭발했다.

*

“으….”

세르미네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 하얀 천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긴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는데, 엄청난 아픔이 몰려와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루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탁탁, 하고 슬리퍼 소리가 이어 들렸다. 세르미네는 겨우 고개만 돌려 루아를 바라보았다.

“루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인가?”

그러자 조금 뒤에서 폴라로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미네의 부상률 92%, 거동 불가능, 장기 휴식 필요.”

“뭐?”

그의 머릿속에 마신과의 싸움이 마치 느린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마신은 검은 물질을 폭발시켰고, 일대가 전부 무너지고, 자신 또한 기억을 잃은 것까지 생각났다.

“루아, 그 뒤로 어떻게 됐지? 리슈아는, 가연이는 어디 있어?!”

“진정하십시오. 천천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리슈아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다만, 치명상을 입어 가사 상태에 준하는 상황이긴 합니다.”

“뭐라고? 리슈아는 어디 있어? 당장 나를 리슈아에게 데려다줘!”

세르미네가 성을 내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함을 지른 탓에 부상을 입은 갈비뼈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세 번째 말씀드립니다. 안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지금 리슈아에게 간다고 해서 그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젠장, 루아! 그랜드 크로스의 힘으로는 회복이 안 되는 건가?!”

세르미네가 묻자, 루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침착하게 벽으로 다가가 자신의 금가고 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와서는 세르미네에게 보여주었다.

“죄송합니다. 제 힘이 미숙해 이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루아는 진심을 담아 세르미네에게 사과했다. 세르미네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 싶어 얼른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공격을 막아준 거지?”

“일단 제가 힘껏 방어막을 펼치긴 했습니다만, 건물 전체는 고사하고 여러분조차 지키기 벅찼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사성수의 환영체가 나타나서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었습니다.”

“사성수가? 그들이 나선 건가? 그럼 마신은….”

세르미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사성수의 힘이라면 마신을 최소한 봉인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신은 일단 물러갔습니다.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어.’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말이죠.”

“그런가….”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세르미네는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복수를 한다면 반드시 제 손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루아. 상황을 설명해줘.”

세르미네의 말에 루아와 휠체어를 탄 폴라로이아가 와서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성수의 힘과 제 힘으로 마신의 공격은 방어했습니다만, 무너진 건물과 이미 죽거나 다친 사람들까지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들의 피해도 막심하지요. 폴라로이아가 기절 직전 실행한 기억 소거 덕분에 마신에 의한 공격이 아닌 의문의 건물 폭발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사망자 열여섯 명, 부상자 쉰일곱 명을 포함해 재신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마이데의 부상률 86%, 거동은 가능하나 전투는 불가능. 리레시아의 부상률 95%, 거동 불가능, 의식 없음. 생명에는 지장 없음.”

“처참하군….”

세르미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아가 그를 달래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나마 방어막을 펼친 저와 이아니아의 힘으로 공격을 막아낸 폴라로이아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희가 힘을 써 여섯 명이서 한 병동을 쓰도록 조치를 취했지요. 여기는 병원입니다. 힘을 다 써 제 지팡이가 부러진 탓에 치유술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리슈아는 어디 있지? 만날 수 있는 건가?”

그 말에 루아는 폴라로이아를 한 번 보았고, 그는 금이 간 태블릿PC에 영상을 하나 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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