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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81화 (81/87)

81화

깨진 채 마구잡이로 흩어진 물건들, 부서진 진열장,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머리채를 쥐거나 멱살을 잡고 싸우는 사람들…. 쇼핑몰은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등으로 난장판이었다.

“다들 멈춰!”

세르미네가 당장 눈에 보이는 한 무리로 가서 싸움을 뜯어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왜 분노에 차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시뻘건 눈을 치켜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 마치 사람이 아닌 형상이었다.

“젠장, 민간인을 해칠 수는 없는데….”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세르미네는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 마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휴대폰을 열어 모두에게 지금 상황을 알리고, 폴라로이아에게는 마신의 위치를 추적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 중이라 메시지를 보지 못한 가연을 제외한 모두가 모였다. 다들 쇼핑몰 안의 상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리레시아는 벌써 한 무리를 힘으로 말리고 있었다.

“우리가 봉래도에 다녀오자마자 마신이 나타났다고? 이게 우연일까?”

마이데가 분한 듯 중얼거렸다. 이를 갈며 토해내는 그 말에 답한 것은 루아였다.

“아마 전부 지켜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폴라로이아. 마신의 위치가 보여?”

세르미네의 물음에 폴라로이아는 늘 그렇듯 태블릿PC를 두드리더니 좌표 한 지점을 가리켰다.

“건물 밖 상공 500m 지점에 이전과 같은 검은 물질 반응 확인.”

그 말에 모두 일제히 옥상 공원을 향해 달렸다. 그곳만큼 건물 밖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밖에는 어느 틈엔가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있었다. 아니, 아예 하늘이 검은색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분명 아침에 봉래도로 떠날 때만 해도 초봄의 맑은 날씨였지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몹시 숨이 막혔다. 게다가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어쩐지 무기력하고 우울한 감정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기분 나쁜 공간은 대체 뭐지…?”

마치 불쾌한 냄새라도 없애는 것처럼 손을 휘저으며 마이데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공중에서 담담하고 울적해 보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만들었어.]

차가운 물속에서 들리는 듯 음울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하늘에 누군가 떠 있었다.

그곳엔 소녀가 하나 있었다. 보라색의 긴 양 갈래 머리를 하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루아의 또래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루아가 그저 감정을 절제하고, 또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라면 이 소녀는 마치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그녀는 품에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는 구체를 안고 있었다. 소녀의 상반신보다 조금 작은 그 구체를 마치 보물처럼 들고서 붉은 눈동자로 세르미네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 아이가 마신이야?”

마이데가 외쳤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마신이라고 칭하기에 당연히 무섭게 생긴 괴물을 생각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폴라로이아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에 태블릿PC를 두드렸고, 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사람 형상의 개체는 단말로 판명. 검은 구체가 본체일 확률 99%.”

“그럼 저 구체가 진짜 마신인 거지?”

리레시아의 말에 세르미네는 소녀가 안고 있는 구체를 노려보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기류, 저것이 마족들의 우두머리인 마신, 허무였다.

[조사는 끝났어? 그럼, 이제 공격해도 돼?]

소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명백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그 말에 다혈질인 리레시아가 먼저 화가 나 뛰쳐나갔다.

“마신인지 뭔지, 우리를 무시하지 마!”

“안 됩니다, 리레시아! 저 정도의 적은 삼위일체의 힘으로….”

루아가 말렸지만, 리레시아는 듣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수호룡의 기운을 서리게 한 주먹으로 그는 소녀를, 그리고 들고 있는 마신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불의 힘이 휘몰아치는 양 주먹으로 소녀가 들고 있는 마신을 가격하려던 리레시아는 갑자기 난데없이 튕겨져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녀는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평온해보였기에 다들 적잖이 당황했다.

“리레시아!”

마이데와 세르미네가 리레시아에게 달려갔다. 콘크리트가 부서진 틈새로 리레시아가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찰과상을 입은 것은 물론이요, 수호룡의 힘이 깃들었던 손은 검게 변해 있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루아가 치유의 힘을 사용해 리레시아의 부상을 치료했다. 그러나 그녀도 모든 부상을 낫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랜드 크로스의 힘이라면 가능했지만, 그 힘은 짧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만 쓸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들고 있는 구체…, 거기서 뭔가 튀어나왔다 싶더니….”

치유의 힘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린 리레시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대로라면 공격의 주체는 마신의 본체인 모양이었다.

“가연이가 없는 지금, 우리가 삼위일체의 힘을 쓸 수는 없으니 시간을 벌어보겠어.”

마이데가 그리 말하며 자신의 무기인 전투 도끼를 빼 들었다. 수호석을 끼우자 푸르스름하게 빛을 발하는 도끼를 허공에 한 번 휘두른 그는 세르미네에게 말했다.

“세르미네, 방어막으로 엄호해 줘. 저 구체를 두 동강 내고 말겠어.”

세르미네는 자신이 주된 역할이 아닌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신과의 싸움에서 사사로운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검에 자신의 하얀 수호석을 끼웠다.

수호룡의 힘이 검에 서리자, 세르미네는 하얀 날개를 펴고 마신을 향해 언제든 날아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때를 맞춰 마이데가 도끼를 들고 뛰어올랐다.

[고작 개미 같은 힘으로, 둘이 오면 뭐가 달라져?]

소녀는 웃으며 손가락을 슥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안개로 새겨진 마법 문자가 튀어나왔다.

“지금이다!”

세르미네는 방어막을 마이데와 자신에게 두르고는 그와 재빠르게 위치를 바꿨다. 자신이 검으로 막아내는 사이 마이데가 마신을 도끼로 내려치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가 마법 문자를 본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어(머)/막은 유지했지만, 검으로 소녀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검은 무언가가 나타나 세르미네를 집어삼키고, 거머리처럼 순간적으로 달라붙어 상처를 낸 후 사라졌다. 그리고 돌풍이 불어와 그를 멀리 밀어냈다.

“크악!”

세르미네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고꾸라졌다. 그건 마이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가 무엇에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이데의 공격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그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루아는 당장 치유술을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폴라로이아, 그리고 조금 힘을 회복한 리레시아와 함께 삼위일체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루아의 지팡이에서 수호석이 빛나더니 이전에도 본 적 있는 기계 수호룡이 나타나 그녀를 보호막으로 감싸고, 마신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기계 수호룡이여! 적을 포위하라!”

그러자 수호룡의 일부 파츠가 떨어져나와 마신을 들고 있는 소녀를 사슬처럼 묶었다. 그다음은 폴라로이아의 차례였다.

“바람의 수호룡이여, 그대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폴라로이아의 목걸이에 달린 수호석이 깜박이더니 익히 본 적 있는 긴 녹색의 용, 이아니아가 나타났다. 그는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승천하더니, 마신을 향해 휘몰아치는 바람의 감옥을 내려보냈다.

다음은 리레시아의 차례였다. 그는 부상을 딛고 일어나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냈다.

“불의 수호룡이여! 우리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불태워라!”

불의 수호룡은 리레시아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입을 쩍 벌리고 바람의 감옥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바람은 불과 합쳐져 그 무엇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아마 안에 있는 마신이 평범한 마족이었다면 이미 모든 게 끝났을 터였다.

때가 무르익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한 마음으로 외쳤다.

“불의 신 아그니여, 파괴의 신 시바여! 그대들의 화신을 이 땅에 내리사, 수라도를 겁화로 정화하고, 우리의 적을 섬멸하라!”

그리고 눈 부신 빛이 줄기둥에서 터져 나왔다. 불은 붉은색에서 노란색, 그리고 청백색으로 타오르며 온도를 계속 높여갔다. 그리고 정점의 온도가 되자, 기둥은 점점 납작해지며 목표로 하고 있는 마신을 압박했다. 아마 갇혀있는 안은 무엇도 살 수 없는 지옥 불과도 같을 터였다.

하늘에서 갑자기 보라색 번개가 쾅, 하고 불기둥으로 내리꽂혔다.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불기둥은 걷히고, 일대에는 불씨가 흩날렸다.

그 광경을 보며 겨우 숨을 몰아쉬던 리레시아가 중얼거렸다.

“끝… 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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