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현무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현무뿐만 아니라 다른 사성수들 또한 그리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아틀란티스에서 온 자들만이 의아함을 품었을 뿐이었다.
“허무를 마계로 돌려보냈는데 어째서 파국을 맞은 겁니까?”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세르미네가 현무에게 물었다. 현무는 그런 세르미네를 보며 씁쓸하게 웃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너희는 허무의 능력이 단지 강한 파괴력이라고만 생각하는 모양이군. 사실 그자의 진짜 두려운 점은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말입니까?”
세르미네는 질문을 던지다 퍼뜩 깨달은 점이 있었다. 치르티티샤, 그 또한 이상할 정도로 리슈아에게 분노를 품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치르티티샤 역시 리슈아에게 분노를 하나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신에 의해 그 분노가 증폭되고, 변질되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까지 세상을 없애려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허무는 물러가며 장수들 사이에 불화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
불화는 서서히 터지기 시작했다. 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 등… 봉래도에서는 날마다 싸움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황제와 황족들은 막아보려 애썼지만,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인지라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현무는 결국 말을 멈추고 말았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괴로움을 끄집어내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백호가 말을 받아 이었다.
[별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니 간단히 하지. 결국 공멸해버렸어. 장수들끼리 큰 전쟁이 나 모두가 죽었다. 사황족들도 그들을 말려보려다가 변을 당했고, 남은 것은 살아남은 성수들과 죽은 신수들의 잔해, 그리고 홀로 남은 황제였어.
황제는 더 이상 봉래산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기린을 타고 서방으로 갔다. 거기서 새로운 후계자를 찾을 셈이라고 하더군. 그는 죽은 신수들의 잔해도 가지고 갔다. 신수들의 후예가 새로운 희망이 될 거라면서 말이다.]
가연과 리레시아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그들의 이야기에서 짐작하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아틀란티스의 멸망 전부터 있었던 세르미네와 루아는 꽤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신수의 후예라 함은, 수호룡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루아가 말했다. 그녀의 찻잔이 거의 비워지자, 현무의 옆에 있던 시녀가 쪼르르 다가가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래, 맞다. 그리고 그 기억과 힘을 가장 강하게 이어받은 것이 저기 있는 이아니아라는 아이이지.]
이아니아는 자신이 지목되자 보기 드물게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현재 남은 수호룡들의 리더는 물의 수호룡입니다. 어째서 바람의 수호룡인 이아니아에게 이런 큰 힘이 있는 것이지요?”
[이아니아는 앞으로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을 타고났다. 앞에서 모든 걸 지휘하기엔 미숙하지. 하지만 그것이 꼭 경험의 미숙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나?]
현무의 말에 이번에는 청룡이 끼어들었다. 물의 수호룡이라는 이야기에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이데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네가 가지고 있는 수호석에 물의 수호룡이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이는군. 그녀도 상당한 세월을 살아온 연장자이다. 이아니아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게다가 성격이 드세고 앞서기 좋아하니 우두머리로는 적격이지.]
마이데는 자신의 수호석을 꺼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처음 기사가 되었을 때 들렸던 밝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오는 듯했다.
“신수와 수호룡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그럼 황제는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갔습니까?”
루아의 물음에 사성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현무가 대신해 고개를 젓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서왕모께서도 모른다. 우리는 황제가 떠나고 우리만 남은 후, 섬이 봉인되고 우리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야.]
현무는 그리 말하며 세르미네를 다시 바라보았다.
[네가 이 아이들의 우두머리이지. 허무를 처치하기 위해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자 온 것은 잘 알았다. 그러나 우리도 애석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어째서입니까? 저희는 마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너희의 힘은 부족하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힘을 빌려준다 한들 허무와 싸울 수는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야.]
“그렇다면 때가 되면 힘을 빌려주시겠다는 말입니까?”
세르미네는 조금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다행히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허무는 그 말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 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세상에 허무가 드리운다면 그때는 우리도 나서야겠지.]
이 정도면 수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아쉽지만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 때가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다. 너희를 여기 오래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 바깥세상으로 보내주겠다.]
현무가 눈을 감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갑자기 그들의 발밑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채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긴…?”
익숙한 풍경이었다. 세르미네는 자신들이 처음 출발했던 아파트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3분 경과.”
갑자기 폴라로이아가 중얼거리자 세르미네는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경과했다는 거지?”
그 말을 풀어준 것은 옆에 서 있던 루아였다. 그녀는 폴라로이아의 태블릿PC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세르미네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저희가 봉래도로 떠난 지 3분이 흘렀군요. 바깥 세계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뭐?”
다들 놀라는 가운데 가연만이 유일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울먹였다.
“다행이다. 결석 처리 안 되어서 다행이다….”
“넌 이 상황에서도 그게 걱정이냐?”
리레시아가 면박을 주었지만, 지금의 가연에겐 통하지 않았다. 리레시아는 가연이 반박해오지 않자 어깨만 으쓱했다.
아무리 시간은 흐르지 않았어도 다들 피로가 쌓였기에 리레시아는 루아와 폴라로이아를 데리고 아틀란티스로 돌아갔다. 가연은 학교로 가겠다고 하는 것을 세르미네가 극구 말렸다.
“너도 피곤하잖아. 쉬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수업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봤는데, 자체휴강? 뭐 그런 게 있다던데, 가연아, 너도 한 번 써 보지?”
옆에서 마이데가 끼어들었다. 이전에 학교에 왔을 때 학생들끼리 이야기하는 단어를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연에겐 통하지를 않았다.
“그럴 순 없어! 다음 학기 장학금이 걸려있는걸!”
그리고 가연은 크로스백에 담겨있던 비상식량을 침대 위에 탈탈 털고는 가방 안에 교과서를 넣었다.
“다녀올게!”
쌩하니 학교로 가버린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어쩔 수 없지.’ 하고 맞추기라도 한 듯 중얼거렸다.
*
가연은 학교에 가고, 마이데는 영화라도 보고 오겠다며 나간 터라 집 안에는 세르미네 혼자 남아있었다. 그는 원래 외출을 즐겨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운동이나 목적이 있는 외출 외에는 자진해서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허무… 라고 했지.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이기에….”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퍼뜨리는 힘. 세르미네는 아마 아틀란티스 시절의 배신자 아포피스 또한 마신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옛 기억을 떠올리자 세르미네는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자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어디선가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알고 싶어? 마신이 무엇인지?]
또다시 들려온 정체불명의 소년 목소리였다. 세르미네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그 목소리를 향해 분노를 담아 외쳤다.
“넌 누구냐! 네가 마신이냐?”
그러자 다소 기분 나쁘게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미네는 컵을 내려놓고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며 주위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마신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알려줘야지.]
“뭐?”
세르미네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마신이 현신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짐작한 그는 크게 외쳤다.
“안 돼!”
그러나 때는 늦어있었다.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큰 고함 소리, 그리고 뒤이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런… 설마…!”
세르미네는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사는 층의 중앙 로비에서 두 남자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으로 이상했다. 무언가 계기가 있어서 다투는 것이 아니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마치 죽일 듯 달려드는 모습에 세르미네는 우선 두 사람의 뒷목을 때려 기절시켰다.
‘이게 설마 마신의…?’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쇼핑몰 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수라도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