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 왔다. 여기야.”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백호의 집이라고? 정말?”
가연 역시 휴대폰을 열어 위치를 확인했다. 세르미네의 휴대폰에 떠 있는 지도와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지도가 그의 휴대폰에 떠 있었다. 가연은 자신들이 먼 거리를 단숨에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우와. 대단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내가 축지법을 걸어줬으니 가능한 게다. 요 녀석아.]
동굴 속에서 낮은 산울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연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는 세르미네의 손을 꽉 잡았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겁먹지 않도록 손을 마주 잡아주고는 그를 대신해 물었다.
“당신이 백호입니까?”
그러자 쿵, 쿵, 하고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붉은 눈동자가 동굴 안에서 번뜩였다. 그리고 서서히 검은 줄무늬 섞인 하얀 털을 가진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 내가 서쪽 산의 주인, 백호다.]
“와, 정말 말로만 듣던 거대한 호랑이야!”
가연이 경이로운 눈으로 백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백호는 빨간 눈동자를 굴려 가연을 보더니 호오,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내 사역마가 말하던 것이 너로구나. 투명한 영혼을 가진 자가 있다기에 내 신기해 지켜보고 있었다.]
“투명한 영혼요?”
[그래. 우선 나를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옛 장수와 같은 사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세르미네는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장수, 그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대체 장수란 무엇이기에 서왕모도 같은 단어를 말씀하신 겁니까?”
[장수란 그 옛날, 마족과 싸우던 자들을 말한다. 내 바깥세상의 동향은 잘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세르미네는 그제야 그것이 기사들을 일컫는 옛 단어임을 알았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궁금한 것들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지 세르미네가 고민하는 사이, 백호가 입을 열었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알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저희는 마신에 대해 알기 위해 왔어요! 당신은 마신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가연이 묻자, 백호는 허허 웃으며 몸을 낮춰 가연과 최대한 눈높이를 맞췄다.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는 거침이 없구나. 허나 정확히 말하면, 현무의 지혜를 얻기 위해 다른 세 성수의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이겠지, 안 그러느냐?]
백호는 약간 능글맞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가연은 헉, 하고 세르미네의 옷깃을 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곳의 결계가 흔들리는 순간부터 이미 잠에서 깨어있었다. 서왕모께서 보낸 인간이니 신분은 틀림없겠지만, 그래도 시험해보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동물들이 모두 자네들을 따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먹었지. 만나보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저희에게 축지법인가 뭔가 하는 것을 걸어 여기까지 안내한 거군요.”
세르미네의 말에 백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한 신기하다는 듯 조목조목 그를 뜯어보더니,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는 짊어진 것이 참 많군.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 옆에 이런 자가 있다니, 세상이 크게 변할 징조야.]
그러더니 백호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으르렁거리는 큰 울림 속에 그의 의지가 섞여 새어 나왔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지금쯤 결정을 내렸을 거다. 어떠한가, 나는 현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세르미네는 지도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또다시 깜짝 놀랐다. 분명 거리도 제각각이고, 속도도 제각각일 텐데 벌써 모두가 목적지에 이미 도달해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르미네가 지도를 뚫어지게 보는 사이, 하늘 저편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좋아. 여기 이 시건방진 남자애, 마음에 들었어!]
[나도 찬성이네. 우리의 후손이 와서 부탁을 하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하나는 주작이고, 하나는 청룡임이 틀림없었다. 백호는 그 목소리들을 듣더니 만족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는구나. 그럼 가보도록 하지. 현무가 있는 곳으로.]
세르미네가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주위 풍경이 삽시간에 변했다. 분명 백호의 동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불을 환히 밝힌 동양풍의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옆에는 다른 성수를 찾아갔던 사람들과, 못 보던 얼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르미네의 바로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기에, 그는 물었다.
“당신…, 설마 백호?”
[허허, 그렇다. 이런 좁은 집에서 그 큰 몸집으로 있을 수는 없잖느냐. 그리고 봐라, 저기 앉아있는 자가 너희가 만나고 싶어 하는 현무이다.]
백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아니아만큼이나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진 여성이 검은 도포를 입고 앉아있었다. 그녀 옆에는 사역마가 변한 시종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지?]
우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미네는 그제야 자신들의 앞에 차가 놓여있는 것을 알고, 한 모금 마셨다. 꽃과 약초를 섞은 듯한 오묘한 맛이었다.
둥근 테이블에 모두가 둘러앉아 현무만을 바라보았다. 현무는 그 모든 시선을 받아내고 있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서왕모께 다 들었다. 너희는 허무에 대해 알고 싶어 여기까지 온 거라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현무가 물었다. 그러자 일행 중 대표 격인 세르미네가 모두를 대신해 나서서 대답했다.
“마신, 당신들이 말하는 허무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만 이 섬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기는군요.”
[그것은 너희들 이전 세대의 장수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뜻이겠지?]
[잘됐네. 어차피 허무에 대해 말을 하려면 우리 이야기도 해야 할 거야.]
옆에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소유자, 주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리레시아의 또래쯤 되어 보이는 외모의 소년으로 변한 주작은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너희는 아틀란티스라고 부르는 대륙에서 왔지? 그 대륙은 뭐더라…, 아무튼 이름은 어려운 누군가가 세웠다고 들었어.]
“우라노스 폐하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루아가 짧게 대답했다.
[아, 그래그래. 그 사람 말이야. 근데, 그 사람이 대륙을 만들기 이전에도 당연히 마족들이 침략해왔겠지? 그걸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본거지가 이 봉래도 봉래산, 그리고 곤륜이야.]
“그리고 그들을 상대했던 기사 격의 자들을 장수라 불렀군요.”
[맞아. 역시 우리 후손이 이해가 참 빠르다니까. 그리고 네가 잠들어있던 돌, 너희는 수호석이라고 부르는 그것 역시 장수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었지. 우리는 수호룡이 아니라 신수라고 불렀어.]
이아니아의 말에 어째서인지 바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주작이 한층 더 열기를 띠며 설명을 이어갔다. 딱히 틀린 설명은 아닌지 현무나 다른 성수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우리도 밀려오는 마족과 싸웠지. 너희 기사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는 모르겠지만, 장수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건 사성수를 데리고 있는 네 명의 황족과, 기린을 데리고 있던 황제였지.]
“황족이라면, 황제의 아들이거나 신하입니까? 마치 여기 이 리슈아가 왕의 후계자인 것처럼요.”
세르미네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청룡이었다. 그는 엄하게 고개를 저으며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족이라지만, 황제와 동격이었다. 결코 부하나 자식 같은 것이 아니었지. 복희, 신농, 우순과 당요. 이 네 사람이 황족이었어.]
[그들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전장에서 함께 싸웠다. 그리고 어느 날, 맞닥뜨리고 만 것이지. 허무를 말이야.]
현무의 말에는 아득한 옛날에 입은 마음의 상처가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노려보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허무. 그자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장수 전원이 달려들어도 상대조차 되지 않았어. 그나마 황족들과 황제가 힘을 합쳐 그자를 다시 마계로 돌려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 말인즉, 마계로 돌려놓은 뒤에 무슨 일이 있었단 뜻입니까?”
세르미네가 예리하게 물었다. 현무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찻잔을 꽉 쥐었다. 금세라도 깨뜨릴 듯한 기세에 옆에 있던 백호가 그녀를 말렸다.
[진정하게. 옛일로 화를 일으켜 무얼 하겠는가.]
그러자 현무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한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지. 화를 내도 소용없는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가? 그래. 일이 있었지. 허무를 물러나게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봉래산은 파국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