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봉래산에는 해가 지지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늘 밝은 그곳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떠다녔고, 이따금 금빛 햇살이 지면을 비췄다.
가연의 머리 위로 긴 꽁지깃을 가진 파란 새가 날아갔다. 가연은 그 새를 눈으로 쫓았지만, 이내 나무 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여기는 정말 신기하네. 이런 곳은 전설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뭐,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전설은 맞지 않겠나. 아틀란티스도 인간들에겐 전설이니 말이다.”
세르미네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을 게 분명한 봉래산에서도 메신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더욱 신기했다.
애초에 그들의 휴대폰은 아틀란티스와 인간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폴라로이아가 개조한 것이었다. 이것이 봉래산에서도 작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르미네는 추측해보았다.
‘이아니아는 봉래산에 대해 알고 있었지. 그가 폴라로이아에게 언질했을 수도 있겠군.’
다른 수호룡들은 각성할 당시를 제외하면 기사와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기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이아니아뿐이었다. 그는 이아니아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신기함을 느꼈다.
‘성수들을 만나면 의문이 풀리겠지, 아무래도.’
그는 폴라로이아가 보내주는 메시지로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 그는 서쪽으로 쭉 직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세르미네와 가연은 그에 맞추어 두 시간 넘게 걷는 중이었다.
세르미네는 지금 상황이 마치 옛날, 리슈아와 함께 여행하던 시절처럼 느껴졌다. 마른 육포 중 가장 부드러운 것을 리슈아에게 주고, 자신은 딱딱한 부분을 씹어먹으며 함께 길을 걸었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연은 건조한 망고를 먹으며 주변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붉은색의 풀과 진주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나뭇잎,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리슈아로 각성이 가까워져 오는 증거인지, 가연은 오래 걸었음에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세르미네는 메시지를 꾸준히 주고받으며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우왓, 세르미네! 저, 저기!”
갑자기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세르미네에게 가연이 달려들어 안겼다. 세르미네는 얼른 화면에서 눈을 떼고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그들 몸집의 두 배만 한 곰이 서 있었다. 세르미네는 혹시 습격해올지 모르겠단 생각에 당장에라도 무기를 겨눌 태세를 취했다.
“이곳의 생명을 해하고 싶진 않지만, 습격해 온다면 공격할 수밖에…!”
세르미네는 적의를 드러냈지만, 곰은 어쩐 일인지 그들을 한 번 바라본 후 갑자기 그 큰 몸을 비틀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 어째서?!”
가연이 놀라 세르미네의 품에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세르미네는 우선 검을 집어넣고, 곰이 날아가는 방향을 주시했다. 그 방향은 놀랍게도 폴라로이아가 안내한 좌표와 거의 일치했다.
“가연아, 네가 안기는 것은 기쁘지만 지금은 저 곰을 빨리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세르미네는 아쉬움을 달래며 가연을 떼어놓았다. 곰은 굉장히 느린 속도로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몸짓과 같이 느껴졌다.
세르미네와 가연은 곰을 따라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한없이 달렸다. 곰은 그들의 속도에 맞추기라도 하는 듯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날며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나타났다.
“이, 이건…!”
세르미네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는 사이, 하늘에 떠 있던 곰은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잠깐!”
세르미네가 막아보았지만, 실로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연은 호숫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법 깊은 호수인데, 이 안에 백호가 살고 있다는 걸까?”
가연이 추측하며 중얼거리는 사이, 세르미네는 휴대폰을 열고 지금의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했다. 폴라로이아는 봉래도의 지도와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보내주었고,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목적지까지는 아직 꽤 남은 상태였다.
“그건 아닐 거다. 아마 이 호수를 건너가야 하는 모양인데….”
하지만 호수는 상당히 커서 건너편이 아득하게 보였고, 주변에는 나룻배 하나 없었다. 헤엄을 쳐서 가자니, 물이 깊어 가연은커녕 세르미네조차 헤엄을 칠 수 없었다.
“날아가는 수밖에 없겠군.”
마침 날 수 있는 세르미네와 가연뿐이었다. 잘됐다 싶어 세르미네는 얼른 날개를 펴보았다.
“어…?”
그러나 이상하게도 날개가 나타나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세르미네는 더욱 힘을 강하게 실어 날개를 펴보았지만, 수호룡은 응답하지 않았다.
“가연아, 너도 날개를 펼 수 없나?”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 또한 날개를 펴보려 애썼다. 그러나 세르미네가 할 수 없는 일을 가연이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고개만 저어 보였다.
“안 되는데?”
“으음….”
세르미네는 고민에 빠졌다. 휴대폰이나 태블릿PC 같은 전자기기는 사용할 수 있으면서, 수호룡의 힘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사성수가 모든 걸 알고 자신들을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역시 그런 건가….’
“세르미네! 여기 봐! 잉어가, 무지개색 잉어가 올라오고 있어!”
“뭐?”
처음에는 가연의 말이 황당했던 세르미네도 연못 속을 보자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연의 말대로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색깔의 비늘을 가진 잉어가 수십, 수백 마리 떼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우와악!”
이윽고 잉어들이 물 밖으로 튀어 오르자 가연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세르미네도 한 걸음 물러서서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잉어들은 튀어 오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째서 잉어가 하늘을 나는 거지?”
세르미네가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주시했다. 다행히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하려는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연못 위에 마치 무지개처럼 생긴 다리를 드리웠다.
“이거… 지금 건너라는 거지?”
가연이 세르미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딘가 신기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초롱초롱한 눈빛에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 거다.”
“와, 신난다!”
가연은 호수와 지면의 경계부터 시작된 잉어의 다리를 다닷, 하고 달려갔다. 그런 가연을 세르미네가 얼른 불러세웠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연아, 멈춰!”
“응? 왜? 이 다리 보기보다 튼튼해!”
가연이 잉어들의 머리 위에서 방방 뛰자 세르미네는 더욱 마음이 다급해졌다. 혹시라도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이게 함정인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 그… 잉어들이 불쌍하잖아.”
당황하던 세르미네는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하지만 그 대답이 가연에게는 적절한 답이었는지, 그는 세르미네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지, 참! 조심조심 걸어야겠다!”
다행히 잉어의 다리는 함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르미네와 가연이 호수를 건너도록 도와주었고, 마침내 맞은편 호숫가에 다다르자 일제히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다시 호수 속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서쪽을 향해 걷는 동안 계속 이런 식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홀연히 동물들이 나타나 도와주고는 사라지기를 몇 번 더 반복하니, 세르미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우리를 시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와중에도 가연은 오랫동안 걸은 피로가 쌓였는지 연신 하품을 하기 일쑤였다. 세르미네는 적당한 나무 그늘을 찾아 가연을 앉히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좀 자두는 게 좋을 거야.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가연은 금세 얌전해져서 세르미네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옛 기억에 잠겼다.
‘예전에는 자주 이러곤 했는데… 머지않아 다시 그럴 날들이 오겠지.’
새근거리며 내는 숨소리가 어쩐지 귓가에 크게 울리는 것 같아 세르미네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가연이 눈을 떠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정도로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어깨를 타고 일정한 규칙의 고동 소리를 서로 나누니 세르미네의 눈도 어느새 스르르 감겼다.
*
“세르미네! 일어나! 저기, 저기 봐!”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가연의 손길에 세르미네는 눈을 떴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기가 어딘가, 싶던 그의 눈에 파란 꽁지깃의 새를 가리키는 가연이 보였다.
“저건….”
서서히 주변 파악을 한 세르미네가 새를 보며 중얼거리자, 가연이 벌떡 일어섰다.
“저건 어제도 본 새가 틀림없어! 따라오라고 하는 거야!”
“뭐, 뭐? 잠깐, 가연아!”
가연은 새를 따라 숲속으로 달려갔다. 세르미네 역시 빠르게 일어나 가연을 말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가연은 발이 빨라 세르미네가 잡으려면 마음을 제대로 먹고 달려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세르미네는 휴대폰을 열어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좌표가 이상했다. 그들은 상당한 거리를 있을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분명 지도로 본 목적지는 대단히 멀었지만, 세르미네는 날아가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목적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 물음에 답을 해주는 자는 없었다. 가연은 신이 나서 새를 따라 달릴 뿐이었고, 세르미네는 저 새가 누군가의 사역마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들 앞에 태산같이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새는 입구에서 공중제비를 돌더니 갑자기 팟, 하고 사라졌고, 가연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세르미네 역시 여기가 어디인가 궁금해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다. 며칠을 내리 걸어야 할 것 같았던 목적지에 그들은 다다라 있었다.
눈앞의 동굴, 이곳이 백호의 거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