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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77화 (77/87)

77화

“당신이… 서왕모입니까?”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세르미네가 되물었다. 그러자 서왕모는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을 가린 후 소리높여 웃었다.

[그런 얼빠진 모습도 볼만 하구나.]

분명 눈앞의 사람은 몹시 귀한 신분임이 틀림없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고대 복식을 하고, 금관을 쓴 모습은 마치 그 옛날 아틀란티스의 왕과도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 섣불리 나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서로 곁눈질을 하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주변에 바람이 일더니 폴라로이아의 수호석에서 이아니아가 빠져나왔다. 그는 서왕모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곤륜의 주인을 뵙습니다.”

[오, 너까지 온 것이냐? 어디서 어린 인간을 주워 기른다는 말까진 들었는데, 새로운 대륙에 있었군그래.]

서왕모의 말에 세르미네는 폴라로이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주 옛날, 폴라로이아가 처음 기사가 되었을 당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산속에서 은거하던 어린아이, 수호석을 신줏단지 모시듯 집 안에 들여놓고 외부와 일절 연을 끊었던 그 어린아이가 폴라로이아였다.

‘그때 이미 이아니아가 돌보고 있었군.’

어디론가 사라졌던 수호석을 운 좋게 주웠다고만 생각했던 세르미네였다. 나중에 자세한 것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세르미네는 우선 이아니아와 서왕모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 어쩐 일로 온 것이냐? 이미 싸움에서 손을 뗀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부채로 입을 가린 서왕모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강자의 여유마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힘을 빌려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그것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봉래도의 봉래산에 잠든 사성수들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을 뿐입니다.”

[사성수를? 이미 수호자가 붙어있는 너희가 이제 와서 사성수의 힘을 빌리진 않을 테고, 무언가 급박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서왕모의 말에 이아니아는 더욱 허리를 깊이 숙여 고했다.

“예. 마신이라 불리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뭐라? 허무가 또다시 세상에 나타났단 말이냐?]

서왕모는 크게 놀랐다. 아무래도 그녀는 마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자신이 나서도 되겠다 싶어 한 발짝 내디딘 후 서왕모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허무가 마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껏 싸워온 마족의 우위에 있는 자가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말이죠.”

[역시, 세상이 한 번 크게 흔들리더니 결국 허무가 나타났구나.]

세상이 흔들렸다는 것은 아마 치르티티샤가 지구를 전부 없애버렸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세르미네는 추측했다. 그것을 전제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마신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고, 정보가 필요합니다.”

[흐음, 그런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도와주겠다. 하지만 말이다.]

서왕모는 품속에서 옥으로 만든 비녀 하나를 꺼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비녀를 가볍게 쥔 그녀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성수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녀석들이야. 그들을 설득해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순전히 자네들의 능력이지. 게다가 기회는 한 번뿐이야. 그래도 가겠느냐?]

그들은 또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족과 싸웠던 자들이라면, 봉래도나 곤륜의 모두가 자신들을 흔쾌히 도울 것이라 믿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설득을 하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니겠어? 당연히 가야지!”

리레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자칫 무례해 보일 수 있어 세르미네는 조마조마했지만, 서왕모는 의외로 호탕하게 웃었다.

[어린 장수가 기개가 좋군! 마음에 든다. 좋아, 내 봉래도로 보내주도록 하지.]

그리 말한 서왕모는 옥비녀를 든 채 사당 앞의 연못을 향했다. 오색의 꽃이 주변에 만발해있었고, 연못의 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깊디깊어 끝이 안 보이는 수면에는 분홍색 연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옥비녀를 한 손에 쥐고 서자, 세르미네를 앞장세워 모두가 그 주변에 모여 섰다.

[이제 봉래도로 가는 길을 열겠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할 것이야. 돌아오는 길은… 너희 하기에 달렸다.]

“뭐라고요?”

가연이 덜컥 겁이 나 되물었지만, 서왕모는 대답하지 않고 옥비녀를 연못에 던졌다. 그러자 연못의 물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물이 가득 차 있을 때엔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연못 깊숙한 곳으로 쭉 이어졌다.

[가거라.]

서왕모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등을 떠미는 듯한 그 말에 어쩐지 용기가 솟는 것 같았다. 이아니아는 일행을 대표해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아니아는 모두를 돌아보며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는 다시 수호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필요한 순간 다시 나타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람이 일고, 이아니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폴라로이아의 목걸이에 달려있는 녹색의 수호석에서 빛이 깜박이다 이내 사라졌다.

“그럼 가볼까?”

“내가 앞장 설 테니 다들 잘 따라오라고!”

세르미네가 가볍게 말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마이데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모두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먼저 계단에 발을 디뎠다.

“저 녀석이….”

세르미네는 이를 갈았지만, 사실 누가 앞장서든 큰 상관은 없었기에 마이데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맨 뒤에 서서 가연과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계단을 내려갔다.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좌우에 펼쳐진, 물의 벽은 신기했는지 가연이 연신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와, 봐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어요! 이건 대체 무슨 종이지?”

“그게 그렇게 신기해? 아틀란티스에도 저 정도는 있어!”

리레시아가 핀잔을 주었지만, 가연은 워낙 별천지인 광경이라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세르미네도 두 사람이 싸우지 않으니 관여하지 않았고, 루아와 폴라로이아는 늘 그렇듯 무심하게 따라올 뿐이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계단이 갑자기 끝나고, 주변 풍경이 휙 바뀌었다. 실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우리가 내려온 계단은 어디 있지?”

그제야 마이데가 뒤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들이 다 내려온 것을 확인했다. 세르미네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연못 속의 계단은 온데간데없고 신기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색깔이 섞인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해가 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은 광채로 반짝였고, 이름 모를 식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여기가 봉래산이야?”

리레시아의 물음에 폴라로이아의 수호석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네. 틀림없습니다. 이곳은 봉래산의 중턱입니다.”

“우와,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가연이 넋을 놓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명 소위 일컫는 선인들의 세상, 선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성수라 함은 분명 네 마리의 성수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설마 한데 모여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루아의 의견이었다. 폴라로이아는 언제 꺼내 들었는지 태블릿PC를 벌써 두드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도 휴대폰이나 PC 등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섬의 사방위에서 강한 생명체의 반응 확인.”

그러자 다시 한번 이아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성수는 저마다 고유의 방위를 가지고 있지요.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이며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현무이니 그 이치에 맞는 방위에서 잠들어있는 모양이군요.”

문득 세르미네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폴라로이아에게 태블릿PC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이 섬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겠나?”

폴라로이아는 금세 버튼 몇 개를 누르더니 모여든 사람들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섬은 아틀란티스와 비교하면 다소 작은 크기였다. 하지만 하루 만에 섬 전체를 누빌 만큼 작지도 않았다.

“이거 차라리 인원을 나눠서 조사하는 게 낫겠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마이데가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리레시아가 얼른 세르미네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나는 세르미네 님과 함께 가겠어!”

“나도 세르미네와 갈 생각인데, 같이 오려고요?”

가연이 톡 쏘아붙이자 리레시아는 험악하게 가연을 노려보았다. 세르미네는 이러다 마이데까지 가연과 함께 오겠다고 할까 봐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싸움을 중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결론을 냈다.

“루아와 폴라로이아는 전투력이 약하니, 리레시아가 루아와 가고, 폴라로이아가 마이데와 가는 게 좋겠어. 나는 가연이를 데리고 갈게.”

“사성수의 리더격인 존재는 현무입니다. 현무를 설득하기 전에 먼저 다른 세 성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아니아의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행선지를 결정했다. 자신과 가연은 백호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마이데와 폴라로이아는 청룡을, 리레시아와 루아는 주작을 맡았다. 그들은 성공을 기원하며 잠시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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