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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76화 (76/87)

76화

세르미네의 말대로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신에 대한 단서는 보일 기미가 없었고,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었다.

“그럼 준비를 해서 내일 다시 여기에 모이자. 아무래도 지금 당장 떠날 수는 없으니까.”

마이데의 말에 이견을 다는 자는 없었다. 이아니아도 지금 당장 출발을 독려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출발할 때 다시 현신하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아니아의 모습은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탁자에 놓인 녹색의 수호석이 깜박거리며 희미한 빛을 뿜어내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중국의 산은 험하기로 유명한데, 정상까지 올라가라니 그게 가능한 거야?”

가연이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세르미네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있던 리레시아가 톡 쏘아붙였다.

“지금 마족을 상대하는 아틀란티스의 기사가 고작 산 하나에 겁먹는 거야? 그렇게 체력이 약해서 어떻게 해?”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자칫하면 또 싸움이 날 분위기에 세르미네는 당황해 얼른 둘을 말렸다.

“리세이아의 말대로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 몸은 이제 보통의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가졌어. 거기다가 리슈아의 힘까지 있다면 산 하나쯤은 못 오를 것도 없다.

하지만 준비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지. 리레시아, 오늘은 일단 폴라로이아, 루아와 함께 아틀란티스로 돌아가. 내일 다시 와라.”

이제는 능숙하게 두 사람을 달래는 모습에 루아와 마이데는 내심 감탄했다. 세르미네의 말이었기에 리레시아와 가연도 더는 다투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다.

*

다시 세 사람만 남은 아파트의 창문 너머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어느덧 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아무리 그래도 뭐 특별히 준비할 게 있을까 싶어 대형 마트에서 간편 식품과 건조식량을 몇 개 사 왔을 뿐이었다. 그것들을 작은 가죽 주머니에 넣고 수통을 채우니, 더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가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가연아! 너 뭐 하는 거야?!”

우연찮게 가연의 방 앞을 지나가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 마이데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세르미네도 와서 살펴보니, 가연은 거대한 배낭 속에 온갖 것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험한 산을 오르는 거라고요. 트래킹처럼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안 그러면 가서 고생한다고요. 어릴 적에 해 봐서 알아요.”

가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들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연이 챙긴 것들이 문제였다.

“그 트래킹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베개와 이불에 인형까지 가져가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만….”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열심히 반박했다.

“하지만 침낭이 없어요! 텐트도 없고! 안 그래도 산은 추운데 북반구는 이제 초봄이니 해가 지면 굉장히 추울 거라고요!”

“가연아, 일단 진정하자.”

마이데가 열심히 말로 가연을 설득하는 사이, 세르미네는 가연의 옆으로 다가가 가방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그리 쓸모는 없는 물건들이군.”

“너무해요! 나중에 뭐 빌려달라고나 하지 말아요!”

가연이 품에 가방을 끌어안고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진지하게 그의 품에서 가방을 다시 빼앗아 내용물들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이것들은 짐만 될 뿐이야. 너는 스스로를 좀 더 믿어봐. 이제 너는 강하다. 이런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혹시 침낭 같은 것이 있었다면 몰라도, 지금 이 짐들을 가져가는 건 무리야. 기사가 추위를 아주 안 타지는 않지만, 적어도 겨울 산속까지 버틸 수 있으니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마이데까지 나서니 가연도 하는 수 없이 짐을 뺄 수밖에 없었다. 늘 가지고 다니던 크로스백에 세르미네처럼 식량을 몇 개 넣고, 간편한 옷가지 두어 벌을 넣으니 짐이 꽉 찼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오늘은 푹 쉬어.”

세르미네는 가연을 도닥이며 그가 잠들 때까지 쭉 말 상대를 해주었다. 가연은 마음이 불안했는지 자기가 아는 것들을 되짚어보며 세르미네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도 아는 바가 없어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자 아틀란티스에서 루아와 폴라로이아, 그리고 리레시아가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늘 전투를 염두에 두어 옷차림이 가벼웠지만, 루아는 옷이 바뀌어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드레스를 입고 산을 오르는 건 힘들지.”

“어제 이 건물 아래층의 가게에서 리레시아가 옷을 사주더군요.”

루아도 옷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청바지에 연한 노란색의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평소와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 보였다.

준비를 마친 세르미네와 마이데에 이어 마지막으로 가연이 가방을 메고 나오자, 세르미네는 수호석을 두 손에 꽉 쥐고 기다리던 폴라로이아에게 말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이아니아를 불러줘.”

그러자 수호석이 어제와 같이 깜박깜박 초록색 빛을 발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이아니아가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간밤엔 평안하셨는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아니아는 상당히 어려운 존재였다. 그나마 폴라로이아가 이아니아의 손을 잡고 서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긴 여행의 시작이니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이젠 출발해야 합니다.”

이아니아는 모두에게 눈을 감도록 지시했다. 세르미네는 영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어보자 싶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수 초 뒤, 이아니아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바람이 온 집안을 휘감았다. 살결에 닿는 바람이 조금 거세졌다 휙 사라지자, 세르미네는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야!!”

당장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보다 옆에서 귀를 때리는 가연의 고함 소리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세르미네는 따가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주위 풍경을 둘러보았다.

험준한 산속도 마족을 퇴치하기 위해서 몇 번 와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사실 기억이 없는 가연과 루아를 제외하면 아마 모두 이 지구에서 안 가본 곳은 별로 없을 거라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게다가 루아는 워낙 감정을 절제하니, 산속을 보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족을 퇴치하기 위해 짧게 머무는 것과 산꼭대기까지 올라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상황은 확실히 달랐다.

“경치 감상은 나중에 하고 가연아, 일단 올라가자. 날이 저물기 전에 쉴만한 곳을 찾아야 해.”

마이데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 험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봄이었지만, 산속은 녹색의 나뭇잎이 우거져 틈 사이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치를 감상할 틈은 없었다. 워낙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세르미네도 신중히 발을 옮겨야 했다.

차라리 날아서 가면 되지 않을까, 가연이 그런 의견도 꺼냈지만 날아갈 수 없는 사람들도 있거니와 괜히 산에 사는 존재들을 자극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는 서왕모 님 말고도 많은 존재들이 있으니까요.”

이아니아의 말마따나 세르미네는 자신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을 눈치챘다. 사람이 아닌, 하지만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할 귀신같은 존재도 아닌 다수의 무언가가 세르미네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밤이 되기 전, 간신히 찾은 넓은 평지에서 그들은 밤을 보내기로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그들은 마신의 존재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식으로 사흘이 흘렀다. 다행히 산에 사나운 짐승이 없어 그들은 경계할 것 없이 정상을 향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가연의 체력이었다. 아무리 리슈아로 각성이 가까워져 옴에 따라 신체 능력도 강해졌다지만, 험하기로 유명한 곤륜을 오르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아이고, 힘들다. 언제쯤 정상이에요? 슬슬 지치는데….”

그러자 산들바람과 함께 수호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아니아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근처의 나무들을 살피다가 금줄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나무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다 왔군요. 이 줄을 따라가면 사당입니다.”

세르미네는 줄이 이어진 끝에 한 건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금색 기와로 만들어진 작은 건물은 그들이 서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목표지점도 가까워져 오니 모두 마지막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산을 올랐다. 이윽고 정상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자 위엄 있는 서왕모의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오나 기다렸다, 이 녀석들아.]

사당 안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 복식을 하고,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잘 묶은 뒤 금관을 올린 여인이 주렴을 걷고 나와 아직도 지쳐 널브러진 일행을 바라보았다.

[한심하다, 한심해. 당대의 장수들은 모두 이 모양이더냐?]

“당신은 누구지?”

세르미네가 묻자, 그녀는 들고 있던 부채를 접어 손바닥으로 탁, 때렸다.

[내가 서왕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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