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부적을 중심으로 생긴 연녹색의 바람은 세르미네의 시선에서 보이는 리슈아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제야 마이데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폴라로이아! 고맙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두 사람의 시선이 몇 발짝 뒤에 떨어진 채 서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 폴라로이아에게는 마족의 형상이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평정을 유지한 채 태블릿PC를 두드리며 평소와 같이 세르미네와 마이데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신 계열 마족의 변형체. 중하급 마족으로 판명.”
“중하급이라고? 말도 안 돼. 저렇게 기괴한 녀석이?”
마이데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마족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세르미네가 봐도 지금 정도의 마족이면 중급 이상은 되어야 했다.
“폴라로이아, 혹시 저 마족의 진짜 모습이 보여?”
폴라로이아가 정신 계열 마족에게 강한 이유 중 하나는 마족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의식하고 능력을 사용해야 했지만, 한 번 진짜 모습을 인식하면 그 이후로는 폴라로이아에게 정신 공격이 듣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던진 세르미네를 올려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검고 탁한 유동성 물질로 인식 중.”
“맞아. 나도 세타와 리슈아 사이를 오갈 때 그렇게 보여. 뭔가 기분 나쁘고 끈적한 검은 것이….”
세르미네는 의아했다. 폴라로이아는 본질을 보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마이데는 그렇게 정체가 눈에 들어오면서도 어째서 적을 혼동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답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정신 계열 마족이 가진 새로운 특성 중 하나거나, 마이데의 마음에 있는 문제이거나, 혹은….
“물질 데이터 보유 확인. 검은 나비와 같은 물질로 추정 가능. 일치 확률 99.99%.”
“뭐?”
검은 나비라면 분명 그들이 아파트에 모여 이야기를 할 당시 가연이 보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이 마족은 지금까지의 개체와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 세르미네는 추측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본래의 모습을 지금까지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알아챈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앞으로 까다로워지겠어.’
변종 마족에 대한 논의는 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세르미네는 마음을 정했다. 지금은 눈앞의 적이 우선이었다.
마족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폴라로이아와 대치 중이었다. 그의 전투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였다.
“바람의 수호룡이여. 무기에 깃드소서.”
그가 금강저를 꺼내며 주문처럼 짧게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녹색의 수호석을 무기에 끼우니 주변에 굉장한 강풍이 일어나며 적의를 가진 모든 것을 밀어냈다. 세르미네나 마이데는 무사했지만, 마족은 저만치 날아가 뒹굴었다.
폴라로이아는 육탄전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그는 리슈아처럼 보조 능력을 사용해 적을 제압했는데, 대부분 그 능력이 듣는 것이 정신 계열 마족이었다.
“존재가 마음의 상에 따라 변하니, 이치에 따라 무심으로 돌아가면 그 형상 또한 잃으리.”
그러자 금강저에서 문자 세 개가 떠올랐다. 금색의 보호구에 싸인 검은 문자는 마족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러자 세르미네의 시선에도 마족의 본래 모습이 보였다.
리슈아의 모습이 아닌, 마족의 본래 모습이 보이자 세르미네는 겁낼 것이 없었다. 마치 리슈아를 제 손으로 상처입힌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행동에 제약을 두고, 마음을 졸이던 세르미네는 이제 검을 들고 마족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마이데도 함께였다. 아직도 마음에 혼란이 남았지만, 그는 무기를 들어 공중에 크게 한 바퀴 돌리며 적을 위협했다.
“이 녀석,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동시에 마족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가하는 사이, 폴라로이아는 능력을 유지하며 한 손으로 태블릿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틈을 노리는 중이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 모두 전투에는 통달한 자들이었다. 가연이 간신히 깨우친 ‘단단하지 않은 적을 공격하는 법’ 정도는 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족은 달랐다. 아무리 베어내고, 또 베어내도 전혀 줄어들지를 않았다.
“전과는 확실히 다른 놈이야. 이번 놈은 일격에 분쇄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세르미네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의 정신 계열 마족은 실체를 가진 일반 마족들처럼 무기로 공격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형된 마족은 처리법이 까다로웠다. 활을 쏴도, 검으로 베어도 계속 몸이 생겨나니, 아예 단번에 소멸케 해야 했다.
두 사람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그때, 뒤에서 또다시 폴라로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무아. 존재를 이루는 모든 연을 끊어내고, 공(空)의 상태로 돌아갈지니, 처음부터 나는 그곳에 있었고, 그곳에 없었노라.”
그의 말과 함께 마족의 발밑에 만다라가 하나 생겨났다. 시계 방향으로 빛을 발하는 만다라가 완전히 빛나자, 마족의 몸이 마치 물을 끼얹은 용암처럼 굳더니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세르미네는 검에 힘을 가득 실었다. 빛의 수호룡이 검신 위로 드러나자, 그는 즉각 필살기와 다름없는 일격을 날렸다.
“빛의 수호룡이여! 적을 섬멸하라!”
그와 동시에 마이데 또한 물의 수호룡을 불러내어 도끼를 그었다. 두 사람의 공격이 합쳐지자 마족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고, 흩어져 내리는 몸을 아직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만다라가 집어삼켰다.
“휴….”
세르미네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손에서 사라졌고, 뒤이어 마이데가 자세를 바로잡자 마족을 집어삼킨 만다라가 사라졌다.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판단한 폴라로이아가 힘을 거둔 것이었다.
“세르미네? 왜 안 내려와? 무슨 일 있어?”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중앙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미안하다. 폴라로이아가 와서 모두 처리한 참이야.”
세르미네는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자신이 가연을 밖으로 내보내 놓고는 상황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가연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마족을 처리했으면 됐지 뭐. 무서웠다니까. 세르미네와 똑같은 마족이 달려드니까 공격할 수가 없어서….”
“건물 반경 500미터 이내의 민간인 기억 소거 완료.”
가연의 말을 끊고 폴라로이아가 중얼거렸다. 강의실에서 지하 대피소로 대피한 사람들이 많으니 기억 조작은 필수였다. 하지만 폴라로이아는 철저하면서도 감정적인 면에서는 둔감했고, 그 때문에 때로는 실수할 때가 있었다.
“폴라로이아. 말을 끊으면 안 되지.”
세르미네가 가볍게 주의를 주었지만, 폴라로이아는 그저 세르미네를 한 번 올려다보았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나중에 가연에게 폴라로이아에 대해 잘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분 안에 수리 정령 도착. 아틀란티스로의 귀환을 실행….”
볼일이 끝났으니 아틀란티스로 돌아가려던 폴라로이아가 돌연 말을 멈췄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세르미네와 마이데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러나 폴라로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수호석이 아직 박혀있는 자신의 금강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이십니까?”
한참의 침묵 끝에 폴라로이아가 물었다. 그러자 수호석은 녹색의 빛을 두 번 깜박였다.
“알겠습니다.”
폴라로이아는 태블릿PC를 열어 빠른 속도로 메시지를 입력했고,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모두의 휴대폰이 울렸다.
[긴급 소집. 인간 세상의 거점으로 지금 집합할 것.]
“폴라로이아,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소집이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폴라로이아는 자신의 금강저들 들어 보여주었다. 세르미네가 자세히 보니 수호석에서 여전히 희미한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세르미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폴라로이아는 결코 장난이나 허튼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겠지 싶어 그는 폴라로이아의 지시대로 우선 자신들의 아파트로 향했다.
*
마족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가방을 챙기고 조퇴한 가연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모두가 모여 마지막으로 올 가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세르미네 님을 기다리게만 하지, 아주.”
소파에 앉아서 세르미네에게 친근한 척 굴던 리레시아가 가연을 발견하고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가연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매일같이 세르미네, 세르미네. 당신은 자기 생활도 없나 봐?”
“뭐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마이데가 나서서 얼른 두 사람을 말렸다.
“자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자 리레시아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입술을 쭉 내밀고 중얼거렸다.
“대체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성격이 변해버렸담.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폴라로이아. 이제 전부 모였으니 말씀하십시오. 저희를 부른 이유를 말이지요.”
가연도 리레시아도 더는 언쟁을 하지 않고 자리를 잡자, 루아가 모두를 대표해 폴라로이아에게 말했다.
그리고 폴라로이아는 소파 앞의 작은 탁자에 자신의 수호석을 올려놓았다. 조금 전 전투가 끝나고 세르미네가 보았던 희미한 빛이 이제는 누가 보아도 확연할 만큼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수호석을 바라보며 폴라로이아는 입을 열어 드물게도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했다.
“제 수호룡이 당신들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