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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73화 (73/87)

73화

밤사이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했는지, 다음 날 가연은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세르미네 앞에 나타났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밥을 먹고 가방을 챙긴 뒤 학교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세르미네 역시 특별히 안부를 묻지는 않았다. 그저 오늘은 언제쯤 오는지,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어본 것이 전부였다.

가연도 학교로 떠났고, 마이데와 둘만의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세르미네는 장보기를 목적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주상복합인 아파트 쇼핑몰에 있는 대형마트에 가지 않고, 조금 더 멀리 나가볼 생각이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가연이 리슈아로 각성하는 기쁨은 둘째치더라도, 마족 이외의 적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몇 번을 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적이 아니라고 단정까지 짓고 있으니….’

사실 세르미네는 그 애쉬라는 자가 마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가연이 그에게 지나친 호감을 보이기에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었다.

세르미네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버스 정거장의 알림판을 바라보았다. 그가 타야 할 버스가 곧 온다는 알림이 깜박깜박 빨간 글씨로 떠 있었다.

처음에는 인간 세계의 사사로운 문물이 낯설었던 세르미네였지만, 가연과 함께 지내며 이제는 버스나 지하철도 곧잘 혼자 타곤 했다. 그러고 보면 가연과 함께 지낸 지도 어언 넉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이제는 이 생활과도 곧 작별을 고해야겠지만….’

가연이 기억을 잃는다면 더 이상 인간 세계에서 생활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가연이 기억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지금 같은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을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가 고심하는 것은 아틀란티스 인이 가진 불로불사의 몸이었다. 온전히 아틀란티스인으로 각성하게 되면 특별히 외부의 충격으로 죽는 것이 아닌 한 늙을 일도, 죽을 일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들과는 다른 시간을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라노스 왕과 옛 기사단장은 끊임없이 이야기했었다. 때문에 기사들은 인간들과의 유대를 금지당한 것이었다.

‘상처받는 것은 본인이니까.’

아무리 용기가 없다고 질책을 받아도, 세르미네는 늘 리슈아가 우선이었다. 그가 상처받고 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가연이 온전히 각성을 하게 된다면 인간으로서의 연들을 끊게 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전통 시장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가연이 늦게 오는 날이었다. 시간은 많았고, 세르미네는 머리도 식힐 겸 당장 물건을 사기보다도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정말 별별 물건들이 다 있군.”

개중에는 세르미네를 혹하게 만드는 물건도 더러 있었지만, 그는 루아의 무서운 표정과 꾸중을 기억해내고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시장은 상당히 넓었고, 이제 그는 인적이 조금 드문 곳에 발을 들였다. 이곳은 무얼 하는 곳인가 싶어 둘러보려는 차에, 갑자기 휴대전화가 길게 울렸다. 누군가 전화를 건 것이었다.

“가연이군. 수업 시간일 텐데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며 세르미네가 전화를 받자마자, 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르미네? 세르미네 맞지? 거기 어디야?”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마족이 나타났음을 눈치챘지만, 그러기엔 가연의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족이 나왔는가? 그야, 내 번호로 걸었다면 내가 받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학교로 와줘! 큰일이야!”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세르미네는 루아의 알림이 없어 이상하다 싶었지만, 가연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기에 바로 순간이동을 사용해 학교로 향했다.

이미 학교 곳곳을 제 발로 걸어본 적이 있기에 세르미네는 인문학관의 강의실까지 어렵지 않게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이미 전부 대피소로 도망쳤고, 2층의 넓은 강의실 한 칸에 가연이 홀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가연아? 네가… 어째서 두 사람이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세르미네는 기이한 풍경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연이 두 사람이었다. 그것도 리슈아로 변한 채, 무기까지 들고,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는 금세 판명이 났다. 개중 강의실의 출입구와 가까이 서 있던 가연이 세르미네를 보며 물었다.

“내가 두 사람이라니? 지금 저기 서 있는 건 세르미네잖아! 갑자기 나를 공격하기에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어본 건데….”

“뭐?”

세르미네는 가연의 말에 다시 한번 반대편에 서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 어디를 봐도 익숙한 리슈아의 모습이었다.

“정신 계열 마족인가?”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하고 얼른 폴라로이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신 계열 마족을 감별하고 상대하는 데 있어 폴라로이아를 빼놓을 수 없었다.

“마이데도 불렀으니까 곧 올 거야. 근데 세르미네를 내가 어떻게 공격해!”

가연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지금껏 정신 계열 마족은 상대의 약점으로 모습을 바꾸기는 했어도 그 능력까지 복사하는 경우는 없었다. 정신 계열 마족의 목적은 말 그대로 상대의 정신을 공격하는 것이지,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연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누가 진짜인지 구분을 할 수 있다는 거니까, 마음껏 공격해!”

“아니, 그렇지만….”

세르미네가 아무리 독려하고 허락해도, 그의 모습을 한 마족을 공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신 계열 마족의 무서운 점 중 하나가 그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호감을 가진 상대, 사랑하는 상대, 혹은 동경하는 상대와 똑같은 모습의 존재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으악, 온다!”

하지만 이 마족은 달랐다. 세르미네의 눈에는 리슈아가 낫을 들고 가연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마족처럼 비열하거나 섬뜩하게 웃는 것이 아닌, 늘 보여주었던 약간 겁먹은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연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 세르미네가 보는 모습 그대로 보였더라면 이토록 겁먹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 가연의 눈에는 대검을 든 세르미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가연아! 그건 내가 아니야! 공격해!”

“하, 하지만… 으악!”

가연은 뒷걸음질하다 강의실 의자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족의 공격이 위로 지나가며 가연의 몸을 덮치지 못했다.

지금은 천운이었지만, 장소가 썩 좋지 못했다. 세르미네가 달려들려 해도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그는 인문학관 앞의 공터를 기억해내고 가연에게 외쳤다.

“가연아, 건물 입구로 나가! 여기는 안 돼!”

여차하면 가연을 데리고 순간이동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적을 유도해야 했다. 세르미네는 그 역할을 자신이 맡기로 했다.

“가연아! 순간이동이나 날개를 써! 적은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밖으로 나가!”

그리 외친 세르미네는 검을 뽑아 들고 마족 앞에 섰다. 하지만 역시 리슈아의 모습으로, 큰 눈망울을 깜박이며 자신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모습은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히 컸다.

‘아니야. 저건 리슈아가 아니야!’

세르미네는 우선 치고 빠지는 작전을 쓰기로 했다. 그는 마족에게 달려들어 왼팔에 긴 상처를 남기고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뒤로 착지했다.

마족은 아프다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보통의 정신 계열 마족이라면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 고통스러운 척 연기를 할 텐데, 눈앞의 마족은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가연이 강의실을 빠져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춰 세르미네도 마족을 주시하면서 복도로 성큼성큼 뛰어나왔다.

“세르미네! 가연이의 연락을 받고 왔는데…, 저놈이 마족이야?”

때마침 복도 저편에서 마이데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마족을 보자마자 발을 우뚝 멈추더니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너는 누구지? 세타? 아니면 리슈아야?”

세르미네는 그런 마이데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호감을 가진 상대’의 형태로 나타나는 마족임이 틀림없는데, 세타인지 리슈아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뜻했다.

‘여전히 둘 사이에서 갈 곳을 못 찾고 있군.’

이전에 나흐딘이 해준 말이 있었다. 세타와 리슈아는 놀랄 만큼 닮았지만, 도플갱어만큼 닮은 것은 아니었다. 체격도, 목소리도, 하다못해 쓰는 무기도 달랐다. 세타는 리슈아보다 훨씬 키도 컸으며, 목소리도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그녀는 거대한 도끼를 무기로 쓰는 호전적인 전투 민족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마이데가 자신의 아내와 리슈아를 혼동하는 것은 외모가 닮아서도 있지만, 내면에 받은 충격이 몹시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것이 세르미네는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세타와 리슈아를 혼동하느라 세르미네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세타가 되었다가, 리슈아가 되었다가 하면서 마족의 생김새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방해할 거면 저리 비켜!”

세르미네는 아직도 멀거니 서 있는 마이데를 거칠게 밀고 마족을 계속 유도했다. 그러나 마족은 마이데의 이상을 눈치챘는지 표적을 바꿨다.

“안 돼! 이쪽을 봐!”

세르미네는 필사적으로 마족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리슈아로만 보이는 그 마족은 무기로 마이데를 겨눴고, 마이데는 다른 이름을 크게 불렀다.

“세타! 그러지 마! 아, 아니, 리슈아!”

“목표 확인. 수호룡이여, 보호 부적을!”

낫의 끝이 마이데에게 점차 다가가려는 순간, 폴라로이아의 목소리와 함께 마이데의 앞에 하얀색의 부적이 하나 떠올라 그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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