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가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카페 테이블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마음속엔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향한 미안함과 더불어 홀연히 사라진 애쉬에 대해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가연이 혹시라도 큰 내상을 입었을까 싶어 휴대폰을 들고 아틀란티스에 연락을 취했다.
[폴라로이아, 루아와 함께 급히 이곳으로 와줬으면 해.]
대답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십 초 지나지 않아 바로 도착했다. 아틀란티스의 방어 체계를 세워야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곧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마이데는 변해버린 은색의 톱니바퀴 열쇠고리를 자신의 손수건에 잘 감쌌다. 정석대로 하자면 핀셋으로 집어 봉투에 넣은 후 밀봉해야겠지만, 지금은 폴라로이아도 없고 그런 전문적인 도구 또한 없었다.
“가연아, 정말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세르미네는 목소리와 표정에 최대한 걱정을 담아 가연과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하지만 가연은 세르미네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뒤처리는 폴라로이아와 수리 정령이 맡아서 해 줄 거야. 잘 알잖아.”
세르미네는 나름대로 열심히 어르고 달랬다. 그 노력을 가연도 아는 것인지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업힐래?”
세르미네가 물었지만, 이번에는 가연이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폴짝 내려왔다.
“아니야. 내가 걸을게.”
가연은 세르미네를 뒤로하고 느린 걸음으로 주거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쇼핑몰 안으로 막 들어서는 가연을 세르미네는 눈으로 좇으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세르미네는 몹시 신경 쓰였다. 그러던 차에 마이데가 물건을 다 챙겼으니 자신들도 돌아가자며 세르미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일단 치료가 먼저이긴 하지.”
집으로 돌아온 뒤, 가연을 소파에 앉힌 세르미네는 따뜻한 차를 세 잔 내려왔다. 마이데가 가져온 담요를 가연에게 덮어준 뒤, 차를 가연의 손에 쥐여줄 때까지 폴라로이아와 루아는 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연은 차를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연녹색의 찻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에게 사정이 있었고,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고 해도 가연과의 약속을 어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세르미네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 입을 떼었다.
“저기, 가연아….”
세르미네는 반 박자 쉬고, 가연이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미안했다. 네 약속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는데, 한눈을 팔아서 그만….”
그러자 부엌에서 팔짱을 낀 채 잠자코 듣고 있던 마이데도 입을 열었다.
“맞아. 게다가 먼저 사과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내가 너무 제멋대로였어.”
화를 쉽게 풀지 않을 것 같던 가연은 의외로 자신 또한 사과를 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몰랐겠지만, 애쉬에게서 들은 말로 가연 또한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같은 거, 사실 혼자 보러 가도 괜찮은데…. 무서웠어. 그런 괴물 나오는 영화, 무서워서 혼자 볼 수가 없었어.”
“그럼 왜 그걸 억지로 보려고 한 거야?”
순전히 궁금함에 마이데가 물었다. 세르미네 또한 의아했던 터였다.
“그 영화가 요즘 화제니까. 내용을 모르면 대화에 낄 수가 없어. 그래서 혹시 두 사람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 나도…, 학교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까.”
“그냥 내용을 모르니 알려달라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뒤에서는 ‘다 큰 남자가 그런 괴물이 무서워서 영화 하나 못본다’라며 수군거리고, 은근슬쩍 따돌림당하곤 해.”
허, 하고 세르미네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마족과도 싸우는 가연이 허상의 괴물을 무서워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당장 옆의 마이데만 해도 집안에 나오는 벌레로 비명을 지르는 남자였다. 마이데 또한 불쾌함에 벌레를 싫어하니, 가연 역시 폐쇄된 영화관에서 큰 소리와 함께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물을 화면에서 보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인간관계란 참으로 복잡한 것이군.”
세르미네는 한탄하듯 내뱉었다. 자신이 맛보았던 교류의 즐거움과 함께하는 기쁨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리슈아가 항상 남들과 어울리려 하고, 행복해 보였던 반면, 사실은 쓴맛 또한 맛보고 있었음을 또한 알았다. 그 정점이 아마 치르티티샤였을 것이다.
그저 마족과의 전투, 그리고 기사단과의 유대감만이 전부였던 세르미네에게는 어렵고도 복잡한 일이었다. 리슈아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리슈아가 잘못된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그것을 그는 그제야 알았다.
“꽃길이 있는 곳을 찾아 걷는 것은 지혜이지만, 가시밭길임을 알고도 발을 들이는 것은 용기이지요.”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조용하면서도 한 마디마다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자연스레 모두 주인공을 알고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루아는 옆에서 함께 서 있던 폴라로이아가 소파에 앉자 가연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녀는 우선 가연의 상태부터 살핀 후, 금색의 지팡이를 들었다.
“큰 이상은 없군요. 그랜드 크로스의 힘까지는 필요치 않을 듯합니다. 치유 마법만 걸어드리죠.”
루아가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싣고, 자신의 힘을 흘려보내자 중앙에 박힌 그녀의 수호석이 깜박거리며 빛을 발했다. 남색의 짙은 빛은 가연의 몸을 감쌌고, 그는 따끔거리던 통증이 가라앉자 루아를 향해 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요.”
그 말에 루아는 힘을 거두고 그녀 또한 폴라로이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표정이 평소의 감정 없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뜬 그녀는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기억을 얼마나 찾았습니까?”
“왜 그러지? 뭔가 문제가 있나?”
세르미네는 덜컥 겁이 났다. 가연의 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루아는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폴라로이아를 돌아보았다.
“문제는 아닙니다. 폴라로이아, 리슈아의 신체변화를 3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확인이 가능합니까?”
“정보 검색 실시. 약 1분 소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세르미네는 가연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몇백 년 같은 1분이 흐르고, 폴라로이아가 태블릿PC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마족 출현 예상 시간인 2시간 30분 전까지 아무런 이상 없음. 마족 출현 직후 기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에 큰 충격을 받은 흔적과 고층에서 떨어진 흔적 발견.”
“뭐라고?”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놀라 동시에 외쳤다. 기사가 된 상태에서 받은 충격이라면 모를까, 수호석의 힘을 끌어내지 않은 가연은 그저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타난 마족은 하급 마족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블릿PC에 뜬 가연의 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상이 없었다. 물론 상처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고, 분명 마비 계열 공격에 당했는지 몸이 저리다고 말은 했지만, 인간의 몸이었다면 분명 즉사, 혹은 치명상을 입었어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이데가 중얼거리는 사이, 세르미네는 마음속에 한 가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괜한 설레발을 치는 것보다 전문가의 입에서 정확한 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모른 체 했다.
그 뒤로도 놀람의 연속이었다. 조금 지나자 리슈아로 변한 가연의 상태가 보였고, 몸의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더해 누군가의 개입이 있군요. 뇌파에 특이한 파장이 보입니다.”
함께 화면을 보던 루아의 말이었다. 가연은 그것이 분명 애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개입한 누군가의 목소리보다,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폴라로이아가 화면을 멈추자, 얼른 그를 향해 물었다.
“폴라로이아. 네가 내린 결론은 뭐지?”
그러자 폴라로이아는 세르미네와 눈을 마주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두 가지 결론 도출 가능. 첫 번째,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의 개입 시작. 현재로서는 마신의 가능성에 염두를 두어도 무방함. 그리고 두 번째. 리슈아로의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