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가연은 몸이 푸른빛 도는 투명한 촉수에 칭칭 감긴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득하게만 느껴져 그는 눈을 꽉 감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전부 대피했는지, 보이는 것은 애쉬뿐이었다.
‘어서 리슈아로 변해야만 해! 그리고 세르미네에게….’
그가 수호석을 쥐기 위해 몸을 비틀어 어떻게든 손이라도 빼려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통증이 몰려왔다. 촉수에 묶인 부분부터 머리끝까지 전류가 올라가는 듯한 아픔에 가연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파!”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무력하게 날아간 가연의 몸은 다행히 낮은 나뭇가지에 한 번 걸리고, 풀숲에 떨어졌다. 그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온몸이 저리고 몹시 아팠다.
“아으…, 세, 세르미네에게 연락을….”
신음을 흘리면서도 힘을 쥐어짜내 휴대폰을 꺼내든 가연은 세르미네의 단축 번호를 연신 눌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번을 눌렀다 꺼봤지만 착신이 가지 않았다.
“왜… 왜지?”
가연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세르미네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치울만한 마족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전 학교에 나타난 마족은 운이 좋았던데다가 결국 세르미네와 마이데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쓰러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도 흐릿한 시야 너머로 테이블 옆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애쉬가 보였다. 아무리 태연해 보여도 속으로는 동요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너무 놀라면 사고가 굳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민간인인 그가 마족에게 당하면 큰일이었다.
가연은 있는 힘을 쥐어짜내 주머니에서 수호석을 꺼내 들고 리슈아로 변했다. 가연의 옷이 갑자기 변하고, 손에는 비상식적인 무기가 생겨났지만,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애쉬는 동요가 없었다.
가연이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 남아있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참아내고는 자세를 잡았다.
‘애쉬는 지금 상황에 당황한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어서 마족을 잡아야만 해!’
가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무기를 들고 높이 솟구쳐 올랐다. 어차피 해파리와 닮은 마족이라면 그의 낫질 한 번에 몸을 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잇! 갈라져라!”
그러나 마족은 잘리기는커녕 마치 에어백처럼 가연을 튕겨냈다. 너무 힘을 주어 힘껏 내리쳤기 때문인지 반동이 상당히 컸다. 그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멀찌감치 날아가다 겨우 날개를 펴고 공중에서 중심을 잡았다.
“저, 저거 뭐야! 왜 잘리지 않지?”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한 가연이었기에, 무기를 다루는 힘의 완급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연은 애쉬도 신경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애쉬! 도망쳐! 이 녀석은 사람들을 다 해치우는 나쁜 녀석이야!”
가연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애쉬는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족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족 또한 애쉬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만약 다른 인간이 있었다면 방금 전 가연의 꼴이 되었을 게 뻔했다.
‘왜지? 애쉬…, 대체 저 사람은….’
하지만 의문만을 계속 가질 수는 없었다. 가연은 다시 휴대폰을 열고 세르미네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마치 전파가 터지지 않는 것처럼 표시가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 소동을 보고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찾아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가연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이 마족을 막아내고 쇼핑몰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것뿐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세르미네는 늘 적의 약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었다. 가연은 스스로 약점을 찾아보고자 애썼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해파리는 무엇에 약하지?’
가연이 고민하는 사이 다시 한번 촉수가 날아왔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며 가연은 빠르게 몸을 굴렀다.
[너….]
가연이 벽돌로 만든 화단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애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치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뭐지?”
가연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애쉬가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건가 했지만, 그는 아직 테이블 근처에 멀거니 서 있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가연이 다시 적을 바라보자,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단단한 푸딩을 먹을 때 숟가락질을 어떻게 하지?]
“뭐?”
가연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애쉬 쪽을 다시 한번 돌아봤지만, 말은 두 번 들려오지 않았다.
‘숟가락질을 어떻게 하냐고? 그야 중심에 힘을 주고 푹 찔러서… 아!’
가연은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그저 무기를 막무가내로 휘두르고 있었다. 아직 이른 감이 있어 세르미네가 정확히 알려주지 않은 탓도 있지만, 가뜩이나 커다란 무기인 낫을 깃발 휘두르듯 다루기만 했을 뿐이었다.
날의 어디에 힘을 싣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그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모든 적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애쉬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눈앞의 해파리 마족을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
애쉬가 누구인지, 어째서 그런 것들을 아는지는 나중에 물어봐도 괜찮았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마족을 처리해야 했다.
해파리 마족 또한 이변을 알아챘는지 촉수를 자신 주변에 꿈틀거리며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섣부르게 다가갔다간 또다시 촉수에 감겨 고통을 당할 뿐이었다.
가연은 때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가만히 화단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싶을 때쯤 뛰어올라 마족의 물렁한 살을 낫으로 힘껏 내리그었다. 젤리를 나이프로 두 조각 낸 것처럼 투명한 살결이 갈라지더니 이내 마족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헉, 허억…, 별것도 아닌 것이 말이야!”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연이 일부러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무기를 손에서 없앤 그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애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쉬, 다친 데는 없어?”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밀려난 의자와 반쯤 비운 커피가 담긴 컵이 있을 뿐이었다.
“애쉬?”
가연이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옥상 공원은 이미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멀리서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뛰어오고 있었다.
“가연아! 다친 데는 없어?”
서로 닮아가서 그런지 가연과 세르미네는 똑같은 말을 뱉고 있었다. 평소의 가연이라면 그 사실에 배꼽을 잡고 웃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화를 내며 집을 나왔다는 사실도 잊고, 가연은 세르미네에게 허둥대며 달려갔다.
“세르미네! 애쉬가, 애쉬가 없어졌어!”
“뭐?”
세르미네는 황당했다. 아무리 하급 마족이지만 걱정이 되어 찾아왔더니 가연은 뜬금없이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래도 가연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세르미네는 옆에 있던 카페 의자에 가연을 앉히고 상처는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아픈 데는 없어?”
“응. 약간 몸이 저릿저릿하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그보다도….”
“몸이 저릿저릿해? 괜찮은 거야?”
마이데가 마족의 잔해와 가연의 몸 상태를 듣고 놀랐다. 분명 해파리의 독침에 당한 것일 텐데, 이 정도 부상에서 끝났다는 것은 서서히 아틀란티스 기사의 강한 육신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곧 차츰 각성이 다가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세르미네, 마이데. 혹시 여기 오면서 회색 후드를 쓴 사람 하나 못 봤어?”
“후드를 쓴 사람?”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잠시 서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 층은 사람들이 다 대피했기 때문에 아무도 없었어.”
“아래층까진 가보지 않았지만, 일단 우리는 본 적이 없지.”
그러자 가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꺼내며 중얼거렸다.
“어딜 간 거지…. 설마 모르는 사이 도망간 건가. 그래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
가연은 열쇠고리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열쇠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짤랑, 하고 맑은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왜 그래?”
세르미네가 묻자, 가연이 열쇠고리를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저, 저거 원래는 저러지 않았는데….”
“이거? 열쇠고리?”
세르미네는 떨어진 열쇠고리를 주워들었다. 작은 은색의 톱니바퀴는 군데군데 검게 물들고 이가 빠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 열쇠고리, 애쉬가 준 거야. 분명 예쁜 은색의 톱니바퀴 모양이었는데 대체 왜….”
가연은 한층 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를 달래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르미네의 시선은 변해버린 톱니바퀴 열쇠고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