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세르미네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왠지 ‘해 보자!’라는 생각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충동이나 욕망은 최대한 절제하는 것이 기사의 덕목이었고, 세르미네에게 있어서는 당연했다. 자신만을 위한 유희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 것이 신조였다.
“어이, 형씨. 할 거야, 말 거야?”
그들이 재차 세르미네를 불렀다. 세르미네는 딱 삼 초만 더 망설인 후, 농구 코트 안을 향해 저벅저벅 들어갔다.
규칙은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실전 경험이 없을 뿐이었다. 게다가 다른 인간들과 어울린다니, 늘 그리 행동하는 리슈아를 타박하던 세르미네였다. 그런 그가 인간들과 어울리려 한다는 일 자체가 생소했다.
그러나 인간들과 어울려 한 판, 두 판 시합을 할 때마다 세르미네는 ‘불필요하다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가식으로 장단만 맞춰주는 게 아닌, 함께 땀 흘리며 즐기는 시간은 몹시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구경꾼도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 뭐야. 형씨. 제법 잘하는데? 어느 과야?”
세 번째 시합에서 세르미네가 끼어든 팀이 이기자, 그중 가장 사교성 좋아 보이는 남자가 와서 물었다. 세르미네는 자신은 외부인이다, 라고 말하려다 그제야 가연을 떠올렸다.
“오늘은 이만 실례하지.”
인문학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며 세르미네는 그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마침 메시지가 울리는 것이, 가연의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세르미네가 막 가연의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 가연이 그리 썩 좋지는 않은 표정으로 나왔다. 세르미네는 자신의 상기된 얼굴을 두 뺨으로 툭툭 치며 가연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첫날인데 과제가 너무 많아!”
가연은 작은 소리로 절규했고,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달래며 집까지 데려오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그날은 오전에만 수업이 꽉 차 있었고, 다음 수업은 내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세르미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연의 재잘거림에 대답은 해주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겨났다.
‘리슈아가 옳았던 걸까?’
그 생각은 집으로 돌아와 가연과 함께 점심을 먹고 그의 과제를 지켜보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세르미네는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단 하나 마음을 허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리슈아에 대한 사랑뿐이었다.
그러나 리슈아는 달랐다. 모든 것에 솔직했고, 기쁨도, 슬픔도 마음껏 표현할 줄 알았다. 물론 그 때문에 치르티티샤 때처럼 악감정을 사는 일도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세르미네는 겁이 났다. 이렇게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허락해도 되는 것인지, 이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저녁까지 이어졌고, 가연은 전혀 몰랐지만 마이데는 세르미네의 고민을 눈치챘다. 그는 가연이 혼자 훈련을 하겠다며 잠시 나간 사이, 세르미네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너,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지?”
그러나 순순히 마이데에게 털어놓을 세르미네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건 없다며 일축했고, 마이데는 흐음…, 하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다음 날, 세르미네는 또다시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 이상한 기분에 대해 대답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틀이나 바래다주진 않아도 되는데…. 그보다 오늘은 오후에도 수업이 있어.”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더욱 어울려 놀거나 교정을 걷다 보면 뭔가 새로운 발견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쩐 일로 인문학관 앞에서 바로 자신을 놔주는 세르미네를 가연은 약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학교에 볼일이 있는 사람 같네. 학생회관의 커피가 그렇게 맛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강의실로 들어간 가연을 배웅한 세르미네는 학생회관 앞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실망한 세르미네가 발을 돌리려는데, 바로 뒤에서 마이데가 불쑥 나타났다.
“역시. 여기 볼일이 있었군.”
“네, 네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러더니 마이데는 세르미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평소의 세르미네라면 그런 그를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흥미가 동해 한 번 따라가 보았다.
마이데는 어느새 교정을 전부 파악했는지 익숙하게 앞장서서는 그를 대운동장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갖가지 운동을 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거지? 가자고.”
마이데는 사람들과 친화력이 대단했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어드는 그를 보며 세르미네는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도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놀다 보니 가연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가연은 어쩌다 마이데까지 왔냐며 놀랐지만, 어차피 수업도 끝났기 때문에 크게 불만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보다 가연의 주된 화제는 대체 왜 학기 첫날부터 수업을 꽉 채워 하느냐는 점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가연은 갑자기 세르미네를 향해 이야기를 꺼냈다.
“세르미네. 내일 영화 보러 안 갈래? 마침 내일은 아침에 수업 하나만 들으면 되는데.”
가연이 세 자리를 예매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세르미네가 자세히 보니 무언가 괴물인지 공룡인지가 나오는 영화였다.
“흐음. 이런 취미인 줄은 몰랐는걸.”
마이데가 장난스레 말하자, 가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따, 딱히 취미가 어떻든 상관없잖아! 그보다도 기왕이면 같이 보러 갔으면 좋겠어.”
“난 상관없다.”
세르미네의 말에 마이데도 얼른 대답했다.
“좋아. 가보자고.”
그들이 호기롭게 대답하자, 가연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말이 씨가되어 비극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음 날, 가연은 세르미네와 마이데에게 한 시간 뒤 인문학관으로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수업을 들으러 갔다.
“한 시간이라….”
조금쯤은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세르미네가 생각하는 사이 마이데는 이미 운동장으로 달리고 있었다.
“딱 한 판만이면 괜찮겠지. 가자.”
세르미네도 조금씩 마음이 개운해지는 기분을 더 느끼고 싶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와 가연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즐겁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세르미네는 차츰 배우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날도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교정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들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약속을 기억해냈다.
“가연아!”
인문학관으로 가보니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에는 알림과 전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것도 채 듣지 못하다니, 만약 마족이 나타난 것을 알리는 루아의 알림이었다면…. 세르미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오후의 햇빛에 역광이 진 부엌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가연이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식탁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연아, 저기,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무거운 공기 속에 마이데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가연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요즘 두 사람이 왜 이렇게 학교에 오고 싶어 하나 했더니, 다른 사람들과 놀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 어느 과인지도 모르는 애들이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놀고, 내 약속은 잊어버리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영화 시간이 다 지나도록…. 학과 친구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밤도 새울 뻔했어!”
할 말이 없었다. 가연이 보고 싶어 하던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철썩같이 약속했던 건 세르미네와 마이데였다. 그걸 잊어버릴 정도였다니, 두 사람 모두 스스로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가연의 기분은 달래줘야 했기에, 마이데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야. 세르미네가 워낙 농구에 열중해 있어서 나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자신을 걸고넘어지자 세르미네는 화가 치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마이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이야말로 도무지 그만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내 말은 듣지도 않으니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뭐야?”
“해 보자는 거냐?”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서로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듣다못한 가연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빽 소리를 질렀다.
“둘 다 그만해!”
가연은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가더니, 아끼는 손수건과 지갑 등을 가방 안에 밀어넣었다. 차마 세르미네나 마이데가 말릴 틈도 없었다. 저렇게 화를 내는 가연은 생전 처음이었다.
“가연아? 뭔가… 대화를….”
겨우 마이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가연은 매몰차게 무시하고는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섰다.
“당분간 머리 좀 식히고 올게.”
그 한 마디만을 하고 가연은 몸을 홱 돌려 현관을 열고 나가버렸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갔는지 세르미네가 닫힌 문을 다시 열었을 때는 이미 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 이라고? 언제 오려는 건데?”
세르미네가 중얼거리는 뒤에서 마이데는 가연이 사라진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을 한참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쫒아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