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세르미네는 찜찜한 기분에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겁을 먹거나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귀신과 같은 존재는 믿지 않았다.
자신이 들은 것은 환청이거나, 혹은 분명 존재하는 자의 목소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처음 이 거실에서 목소리를 들었을 때를 생각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치르티티샤는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가연이 그 옆에서 돕는 장면을 보며 세르미네는 깜빡 잠이 들었고, 분명 ‘회색의 순례자’가 들어간 목소리를 들었다.
두 번째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땐, 회색의 순례자가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리슈아와 상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마신의 출현, 수상하기 짝이 없는 회색의 순례자, 그리고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리슈아. 세르미네는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세르미네, 일어났어?”
아무것도 모르는 가연은 때가 되자 눈을 비비며 방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세르미네를 보고 밝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가연의 얼굴을 보자 지난밤 꿈의 리슈아가 떠올랐다.
“세르미네?”
‘아니야, 그건 리슈아가 아니야. 가연이도 아니야. 그건….’
세르미네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젓고는 가연을 향해 마주 인사했다.
“그래. 잘 잤나?”
“응. 사흘 뒤에는 개학이니까, 이제 슬슬 생활 패턴도 되돌려야지.”
사흘. 짧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세르미네가 슬쩍 본 가연의 시간표는 제법 빼곡했다. 아무리 졸업 학년을 대비해 2학년인 지금 수업을 꽉 채워 넣었다 해도, 이대로 가다간 둘만의 시간은 사라질 게 뻔했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덕분에 세르미네는 아침 훈련 시간에도, 식사 시간에도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세르미네, 어디 아파?”
결국 가연이 그렇게 묻고 나서야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픈 곳은 없어. 다만….”
너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이 한 마디가 솔직하게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
그리고 사흘 뒤, 가연이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훈련을 마치고, 보라색 니트와 청바지를 입은 후 늘 메는 크로스백을 메고 집을 나서려 했다.
“다녀오겠습니…, 어?”
가연이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세르미네의 방문이 열리더니 잘 차려입은 그가 작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세르미네, 어디 가려고 그래?”
가연이 묻자, 세르미네는 ‘여전히 눈치가 없군.’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학교까지 바래다주마.”
“뭐?”
가연은 기가 막혔다. 학교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사이가 가까워진 이후로 처음 하는 등교라지만…,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았다.
“세르미네. 학교는 그리 멀지도 않고, 수업에는 들어올 수 없어.”
“상관없다. 그 짧은 거리에도 마족은 충분히 나올 수 있고, 강의실 밖에 서 있으면 된다.”
“우…, 정말이지…!”
가연은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세르미네를 말릴 수는 없었다. 한 번 하고자 마음먹으면 세르미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고집 센 그의 성격에 가연은 금세 누그러졌다.
“알았어. 그럼 데려다주고 바로 집으로 와야 해, 알았지?”
그리 말한 가연은 세르미네와 함께 집을 나왔다. 마이데는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고 가연은 생각했다. 여기에 마이데까지 동행했으면 가연은 은근히 느껴지는 성가심에 폭발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침 일찍 나와서인지 학교로 가는 길은 매우 한산했다. 세르미네는 보는 눈도 없겠다 은근슬쩍 가연의 손을 잡으려 자신의 손을 뻗었다.
“아, 편의점 좀 들렀다 갈게.”
그러나 가연은 세르미네가 잡으려던 그의 왼손으로 바로 옆의 편의점 문을 열었다. ‘쳇,’하고 혀를 찬 세르미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연은 늘 등교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간단한 초콜릿 바와 음료수를 사곤 했다. 오늘도 그런 의례 행사와 다름없는 일이었다. 익숙하게 초콜릿이 진열된 진열대 앞에서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그에게 세르미네는 초콜릿이 잔뜩 들어간 커다랗고 반짝이는 봉지를 가리켰다.
“저런 건 어떤가?”
“저건 너무 많아. 저렇게 먹다간 점심도 못 먹을걸.”
가연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두 개만 한 크기의 초코바 하나를 집었다. 그러나 세르미내는 막무가내로 초콜릿 봉지를 집고는 이번에는 우유가 진열된 곳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가연이 고른 것은 작은 초콜릿 우유와 초코바 하나가 다였지만, 세르미네는 집이 가득했다. 커다란 봉지 안에 든 내용물을 살펴보니 과자부터 초콜릿, 컵라면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세르미네. 혹시 여행가?”
“이건 네 거다. 이제 새 학년이면 잘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세르미네는 기사단 생활을 생각하며 가연을 챙기고 있었다. 정예 기사가 아닌 평기사들도 급이 있었고, 급 하나가 오를 때마다 훈련은 강도가 더 심해졌다. 때문에 세르미네는 가연 또한 학년이 올랐으니 더욱 힘이 들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기사와 학교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가연이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수업의 내용 등은 어려워졌지만, 기사처럼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걸 어찌 설명할 수가 없어 가연은 그냥 세르미네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고마워.”
그들은 다시 편의점을 나와 학교까지 걸어갔다. 역시나 인문학관은 정문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가연은 또 이 길을 걷게 되었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모처럼 가연과 오붓하게 산책할 수 있다며 내심 좋아했다.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 가연은 세르미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도착했으니까, 세르미네는 돌아가도 돼.”
“아니다. 네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다.”
“뭐? 여기서?”
가연은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태도였다.
“난 네 보호자고, 애인이다. 다들 그러지 않나?”
“아니, 저기, 그걸 그렇게 입밖에….”
하는 수 없이 가연은 세르미네에게 수업이 끝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교내도 둘러보고 하라는 말을 더하고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탁, 닫히고 여기서부터는 세르미네가 함께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세르미네는 문밖에서 몇 분을 가만히 서 있다가, 뒤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를 물러났다.
“흐음…, 조금 추레하긴 하지만 나쁘진 않은 건물이군.”
이전 마족 사건 때에는 전투에 급급해 이렇게 제대로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약간의 냉기가 감도는 인문학관의 2층에 자리 잡은 사학과 강의실들은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세르미네는 이곳에는 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해 인문학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가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이젠 엄연한 봄이었다. 앙상한 가지들에는 파릇한 잎들과 이른 꽃봉오리가 움텄고,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그래서 그런지 세르미네의 눈에는 유난히 둘이서 짝을 지어 다니는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자전거를 함께 타거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이 세르미네는 몹시 부러웠다.
‘리슈아와 함께 다정하게 걷던 날들이 그립군.’
지금의 가연도 기억을 어느 정도 찾았지만, 세르미네가 조금이라도 과하게 애정을 보이려 하면 밀어내기 일쑤였다.
‘이전에는 반대였는데 말이야…. 나는 왜 그때 받아주지 못한 걸까.’
옛일을 후회하며 세르미네는 길게 이어진 벚꽃나무 길을 걸었다. 당연히 아직 꽃이 피었을 리 없지만, 분명 한 달만 지나면 아름다운 연분홍색 꽃이 가득 피어 꽃비가 쏟아져 내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 길을 세르미네는 꼭 가연과 함께 걷자고 다짐했다.
생각에 빠져 걷고 있자니 세르미네는 인문학관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인문학관, 아니 다른 건물보다 꽤 크고, 입구에는 특이한 석상이 두 개 서 있는 그곳에는 학생회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곳이 카페나 식당이 있다는 곳인 모양이군.’
마침 잘됐다 싶어 세르미네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면 가연이 찾기도 쉬울 터였다.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세르미네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함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 넓지 않은 운동장이 학생회관 앞에 있었고, 몇 명의 학생들이 그곳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농구라는 모양이군.’
세르미네도 인간들의 놀이나 문화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명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관심은 관심에서만 끝내고, 그것을 행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학생회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잊고 학생들의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생각해보면 세르미네는 저런 시간을 가져본 기억이 없었다.
늘 기사단 훈련과 마족 퇴치뿐이었다. 자신에게 주는 여유는 훈련과 실전 사이, 찰나의 휴식이 전부였고, 취미 생활이라고 해봐야 간간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독서가 전부였다.
그가 생각에 잠겨 워낙 빤히 바라보았던 모양이었다. 농구를 하던 몇몇 학생들이 세르미네를 보았고,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세르미네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같이 한 판 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