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마이데가 향한 곳은 조금 전 두 사람이 만났던 바위 근처였다. 세르미네가 따라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에는 무언가를 묻은 흔적이 있었다.
“이것이 세타의 무덤이다.”
목이 멘 소리로 마이데는 짧게 대답했다. 세르미네는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려다가 궁금한 점이 생겼다.
“너희 부족들은 시신을 배에 태워 띄워 보내는 것으로 장례를 치른다던데, 너는 어째서 아내를 땅에 묻어준 거지?”
그러자 마이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괴물이 아직도 숨어 도사리는 위험한 곳에 세타와 내 아들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숲 너머의 작은 자들이 가진 풍습을 이용했다.”
마이데는 손가락으로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각배가 수백 척 있었고, 그 위에는 한 배당 여러 구의 시신이 실려 있었다.
“저걸 봐라. 오늘이 마침 그들을 띄워 보내는 날이군. 그간 나무를 벌목해 배를 만들랴, 시신을 수습하고 염하랴, 부상자를 치료하랴 정신이 없긴 했다. 나는 모든 게 허무해 세타와 아들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아내와 아들의 사정은 잘 알았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마이데는 그 말을 듣더니 경멸스러운 얼굴로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 혼자 살아남았냐고 질책하는 건가? 나는 당시 부상을 입어 전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내는 나를 절벽 근처의 풀숲에 숨게 했지. 덕분에 마족도 피할 수는 있었다만… 모든 걸 잃고 말았어.”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 또한 아틀란티스의 멸망 당시 리슈아와 루아, 두 사람과 함께 동쪽 탑에 숨어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그에 따르는 죄책감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사과해야겠다 싶어 세르미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마이데가 툭, 말을 내뱉었다.
“장례식을 거행하는군. 배에 불을 붙어 띄우고 있어.”
그의 말대로 불붙은 작은 형체들이 점점 바다 먼 곳으로 둥실 떠가기 시작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 여기서 뭐 해?”
리슈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세르미네는 마이데와 리슈아를 가까이 있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 전 일로 죄책감이 들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현자 할아버지가 한 번 두 사람에게 가보라고 하셔서 말이야. 어? 뭐야, 바다가 불타고 있네?”
리슈아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도 볼 수 있었다. 수백 척의 불타는 배를 띄워 보내니, 마치 바다가 불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세르미네. 저러면 또 마족이 깨어나지 않을까?”
“뭐?!”
세르미네도 그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저번에 물 밖으로 나온 마족도 분명 잠들어있다가 전쟁의 소란으로 인해 나왔던 것이었다. 이렇게 대량의 배에 불을 붙이면 이전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물론 마족은 퇴치해야 하지만, 일단 인간들이 전부 이주한 후에 억지로 물 밖으로 꺼내려 했는데!’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인간들을 멈출 방법은 없나? 저러면 안 돼. 그 괴물이 다시 올라올 거야.”
“멈출 수 있을 것 같나. 저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아. 비열하게 살아남았다면서 말이야. 게다가 우리가 달려가 봐야 이미 늦은 것 같군.”
마이데의 말대로였다. 이미 배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둥실 떠서는 먼 수평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외부인인 세르미네나 배척받는 마이데가 날아서 간들 공연한 싸움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리슈아. 가서 현자님의 손주 이실라와 무를 불러와. 마을 사람들을 대피하게 해야 해. 마족이 또 나타날 거야.”
“알았어!”
리슈아는 빠르게 현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마이데는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로 세타가… 아니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세르미네가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동시에, 그의 뒤편에서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다. 마족이 다시 한번 지상으로 올라오며 내는 소리였다.
“젠장, 늦었군!”
세르미네는 뒤를 돌아보며 지체할 것 없이 날개를 펴고 검을 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이데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너, 너는… 누구냐?!”
“나는 세르미네. 아틀란티스의 정예 기사다. 너도 현자님의 집에 가서 몸을 사리고 있어. 저건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르미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절벽 아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의 순백색 검은 세상에 둘도 없는 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마족을 향해 맞서는 표정은 그 어느 전사보다도 늠름했다. 마이데는 그 모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힘이 있었더라면, 세타와 아들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
절벽 아래는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몇 달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 하지만 세르미네에게는 차라리 그편이 도와주는 길이었다. 공연히 인간들이 무기를 대고 상대했다간 세르미네의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그는 이전에 봐 두었던 마족의 약점을 찾아다녔다. 목덜미의 깊은 상처는 전보다는 조금 아물어 있었지만, 여전히 깊었다.
‘아마도 자연치유를 더디게 하게 하는 무기를 쓴 모양이군.’
세르미네는 그 상처를 낸 기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용맹했던 자신의 선배 역시 대륙의 멸망과 함께 죽고 말았다. 이제는 자신이 이 마족을 처리할 때였다.
그는 상처를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마족 또한 그것을 눈치채고 이리저리 목을 움직여 세르미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면서 지느러미에서는 물대포를 쏘아대는 한편, 꼬리는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겠다는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공격 자체는 단순했다. 처음에는 고위 마족에 준하는 중급 마족이라며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이제는 정예 기사급의 실력을 갖춘 세르미네에게 이 정도 마족은 개체 하나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세르미네 역시 스스로의 실력을 아직 객관적으로 알지 못한데다, 리슈아의 납치 사건까지 더해지며 은근히 의기소침해진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호각을 다투는 사이이기에 공격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상처를 입히기 또한 힘들었다. 화살은 큰 타격을 가하지 못했고, 검으로 약점을 노리자니 혼자의 힘으로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 사이 행여나 현자의 집까지 마족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현자 나흐딘은 중요한 세상과의 연락망 중 하나였다. 게다가 세르미네 개인적으로도 나흐딘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그는 그 사실을 꽤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나흐딘의 집 뒤에서 리슈아와 마이데는 세르미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시대로 이실라와 무는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의 대피를 돕고 있었고, 카마와 나흐딘은 피난 오는 사람들을 받아주며 돌보는 중이었다.
“세타. 저 괴물은 대체 무엇이지?”
마이데가 묻자, 리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전 리슈아예요. 그리고 저건 마족이라는… 별 밖에서 오는 자들이고요. 아틀란티스의 기사는 마족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나도, 나도 저런 힘이 있었다면 세타를 잃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기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수호석의 선택을 받아야만…, 어?”
리슈아는 깜짝 놀라 주머니에서 가지고 있던 수호석을 꺼냈다. 세르미네가 만에 하나를 대비해 리슈아에게 맡겨놓았던 물의 수호석이었다. 물방울 모양의 파란 수호석에서 처음 보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말 힘을 얻고 싶어?]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량하고 발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수호석 안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닷속에서 들려오는 듯도 했다.
마이데는 놀랐지만, 이내 그 물음에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뭐에 쓰려고?]
목소리가 재차 물었다.
“마족을 모두 없앨 거다. 더 이상 나와 같은 비극을 누군가 겪게 하지 않겠어.”
[네 아내의 복수도 겸해서 말이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다에서 커다랗고 반투명한 형체가 쑥 올라왔다. 상반신은 용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물의 수호룡이었다.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상당히 위협적인 자태였지만, 마이데는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 않았다.
“그래.”
[좋아. 어떤 이유든 마족을 쓰러뜨리겠다면 그걸로 충분해. 이제부터 넌 물의 기사야, 마이데 슬라이흐토그.]
수호룡이 환영이 사라지자, 마이데의 손에는 수호석이 박힌 멋들어진 전투 도끼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 광격을 리슈아는 물론 멀리서 세르미네마저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물의 기사를 찾을 줄이야…!’
마이데는 자신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는 절벽에서 단숨에 뛰어올라 도끼로 마족의 목을 내려치려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그가 알아채고 한 것인지는 몰라도 도끼는 마족의 약점을 건드렸고, 마족은 놀라 물속으로 다시 달아나려 했다.
“그렇겐 두지 않는다!”
세르미네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마이데는 마족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바다는 새빨갛게 물들었고, 마족의 두 조각 난 시체가 떠올랐다.
‘세상에….’
세르미네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처음 기사가 된 순간에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폭발케 한다지만, 물속에서 마족을 두 동강 내는 자는 처음 보았다. 아마도 복수에 불타는 마음의 힘이 더욱 크게 작용했을 거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바다 위로 뛰어오른 마이데는 난장판이 된 부두 위로 착지했다. 자신이 죽인 마족의 시체를 보고도 잠시 현실을 믿지 못하던 그는 이내 복수를 성공했다는 마음에 크게 기뻐했다.
“이게 기사의 힘이군! 멋진데?”
리슈아가 걱정되어 마이데의 옆으로 날아오자, 그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듯 도끼를 한 번 크게 허공에 휘둘렀다.
“그래. 그 힘으로 이 지구를 지키는 거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세르미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는 마이데가 기사가 된 것이 온전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리슈아를 향한 마이데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이데는 그 이유로 인해 마음이 더욱 들떴는지, 세르미네를 향해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알았어. 잘 부탁해.”
이렇게 마이데는 물의 기사가 되었고, 세르미네와 리슈아 곁으로 온 첫 후대의 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