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64화 (64/87)

64화

그날, 세르미네는 현자 나흐딘에게 작은 돌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 묻는 나흐딘과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카마, 무, 그리고 이실라에게 세르미네는 설명했다.

“인간들의 전쟁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만, 마족을 놓친 것이 문제입니다. 이 돌을 깨면 아틀란티스의 무녀에게 신호가 올 것이고, 그럼 제가 달려오겠습니다.”

하얀색의 제법 단단한 돌은 아틀란티스에서 비상 연락 시에 쓰는 도구였다. 아마 이실라나 무의 실력이라면 부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세르미네는 믿었다.

절벽 아래의 마을은 처참히 부서지고,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전쟁이 일차적인 원인인데다, 세르미네는 외부인이라 차마 그 모든 걸 수습해줄 수가 없었다. 다행인 점은, 나흐딘과 이실라가 나서서 마을의 처리와 숲 너머의 경계를 강화하겠다고 해준 것이었다.

마족은 반드시 또 나타날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의 기사를 찾으러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 세르미네는 그때를 노리기로 했다.

나흐딘을 믿고 우선 아틀란티스로 돌아온 세르미네는 그 뒤로 인간 세계에 몇 번 마족을 퇴치하러 다녀왔다. 시간은 약 넉 달 정도 흘렀고, 계절이 하나 바뀌어 있었다.

“세르미네, 그곳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책을 읽던 세르미네 옆에서 쿠키를 집어 먹던 리슈아가 갑자기 물었다. 세르미네는 그 질문의 의도를 몰라 리슈아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 집. 현자 할아버지네 마을 말이야. 마족을 결국 퇴치하진 못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마족을 절대 상대하지 말고 자신을 부르라 신신당부를 해 둔 터라,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신경은 쓰이는군. 물의 기사도 찾아야 하고 말이야.”

세르미네가 읽던 책을 탁 덮어 소파 옆에 두었다. 리슈아도 입에 묻은 과자부스러기를 탁탁 털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지금 당장 가보자. 지금쯤이면 마을의 상황도 좋아졌을 거야.”

세르미네는 루아에게 간단히 보고를 하고는 리슈아를 데리고 다시 북유럽의 땅으로 향했다. 여름이 끝나 서서히 맹추위가 느껴지는 그곳에 발을 들이자, 리슈아가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꽃도 풀도 다 지고 말았어.”

그런 그에게 세르미네는 재킷을 벗어 걸쳐주며 늘 그렇듯 똑같은 말로 위로했다.

“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날 거라는 걸 넌 잘 알잖아.”

“응! 맞아! 그럴 거야,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 리슈아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세르미네가 걸쳐준 재킷의 옷깃을 꽉 여몄다.

하여튼 희로애락의 전환이 빠르다고 세르미네는 혀를 내두르며 현자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두 번째 찾은 그곳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다만 잘 가꾸어졌었던 화단 위에 꽃 대신 서리가 내렸고, 집 옆에는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있단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하긴, 이곳은 마족의 피해를 입진 않았으니까.’

이전처럼 집 밖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마당을 가로질러 나무로 만든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설마 현자 할아버지도 마족에게 당한 건 아니지?”

리슈아가 옆에서 겁먹은 표정으로 세르미네에게 물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마족이나 예의 숲 너머 작은 자들이 습격해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이렇게 장작이 수북이 쌓여있거나, 서리 내린 화단에 잡초가 하나도 없을 리 없었다.

“어디 잠시 외출한 것일 수도 있지. 잠시 이 근처에서 기다리자.”

세르미네는 리슈아를 데리고 집을 한 바퀴 뒤로 돌아 이전에 자신이 마을을 감시하던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현재의 상황을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누구냐?”

인기척을 느낀 그 사람은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큰 키와 다부진 근육을 가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보다는 상당히 마른 체형이었다. 파란색의 머리를 빗어넘기고, 옆으로 한 가닥 땋아 내린 그는 분명 이곳 사람이었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회색 눈동자로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리슈아를 보더니 놀람에 눈이 커졌다.

“세, 세타?”

그가 놀라 벙찐 얼굴로 천천히 리슈아를 향해 다가왔다. 리슈아는 겁이 나 세르미네의 뒤로 몸을 숨겼고, 세르미네는 혹시나 싶어 리슈아의 앞을 막고 남자에게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리슈아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러나 상대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타. 살아 돌아온 거야?”

일단 상대에게 적의가 없자 세르미네는 긴장을 조금 놓았다. 적어도 이 사람은 리슈아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몹시 이상한 사람이었다.

“저, 저는 세타가 아닌데요….”

리슈아가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리자 세르미네가 그 말을 받아 대신 남자에게 들려주었다.

“이 녀석은 리슈아다. 세타인지 뭔지가 아니야.”

“아니야. 세타, 세타! 왜 다른 남자의 뒤에 숨는 거지?”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겠다 싶어 세르미네는 리슈아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현자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그들을 따라왔다.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언제 한번 연락을 드리려…, 음? 자네는 어쩌다 여기에 있는가?”

시기적절하게 현자 나흐딘과 세 손주가 이제 막 집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세르미네에게 인사를 한 나흐딘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이 자를 아십니까?”

아무래도 나흐딘은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물었고, 나흐딘은 우선 카마와 이실라, 무를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 대답했다.

“이 자는 마이데 슬라이흐토그. 절벽 아래의 마을에 살던 자입니다.”

“그때의 생존자인가….”

세르미네가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마이데라는 남자가 나흐딘을 향해 말했다.

“현자님. 세타가 돌아왔습니다. 살아 돌아왔다고요!”

“뭐라고? 자네, 세타는 죽어서 무덤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나. 왜 그러나, 갑자기?”

그리 말한 나흐딘은 아직도 세르미네의 뒤에 숨어있던 리슈아를 보고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하. 맞군, 그래. 저분이 자네 아내를 쏙 빼닮긴 했지. 하지만 잘못 짚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동시에 물었다. 나흐딘은 서서 이야기하기엔 길다며 세 사람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이전처럼 응접실에 둘러앉자, 무가 차를 내왔다. 세르미네는 일부러 마이데와 리슈아를 떨어뜨리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대표로 나흐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다시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을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것이….”

나흐딘은 말끝을 흐리며 생각을 정리하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마을 모두 궤멸 직전까지 갔습니다. 전쟁에 더해 마족의 습격으로 살아남은 자가 2할도 되지 않지요. 결국 그들 대부분은 마을을 버리고 다른 땅으로 이주하기를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부상이 낫고,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현자님이 족장이 되어 그들을 이끄시면 안 되는 겁니까?”

세르미네의 물음에 나흐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인물이 못됩니다. 이곳을 떠나긴 해야겠지만, 아마도 저들과는 다른 곳으로 가겠군요.”

“현자님, 이 자는 누구입니까? 어째서 세타를 데리고 있는 것입니까?”

마이데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정리가 되었기에 세르미네는 무례에 개의치 않았지만, 리슈아를 자꾸 세타라고 부르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궁금합니다. 이 자는 누구기에 리슈아를 다른 자와 착각하고 있는 건지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묻자 나흐딘은 잠시 이를 어쩌나, 하다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서로에 대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마이데, 여기 이 두 사람은 아틀란티스에서 온 기사들이라네. 이전에 마을을 멸망하게 한 마족을 쫓아내 준 자들이다. 그리고 기사님, 이쪽은 아까도 말했지만 얼마 안 되는 마을의 생존자입니다.”

“그건 잘 알겠습니다. 헌데, 이 자가 말하는 세타는 대체 누구입니까?”

세르미네의 물음에 나흐딘은 마이데를 바라보며 양해를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마이데는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두어 번 깜박였고, 나흐딘은 세르미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타는 마이데의 아내였습니다. 마이데는 절벽 아래 마을에서 세타와 아들, 셋이서 살고 있었지요. 세타는 두 분이 아틀란티스로 돌아가고 난 뒤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저도 착각할 정도로 후계자님과 닮았더군요. 성별은 물론 달랐지만요.”

“그 세타라는 사람은 마족의 습격 때 죽었군요.”

“그렇습니다. 노르만족은 성별을 불문하고 훌륭한 전사들이 많지요. 세타와 아들 또한 전사였고,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모양입니다만, 마족의 손에 죽고 말았지요.”

리슈아는 이야기를 듣자 마이데를 동정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르미네는 그런 리슈아에게 손수건을 하나 쥐어주고는 질문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마이데는 이 자리가 못내 괴로웠는지 나흐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간 그를 붙잡기 위해 세르미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