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뭐라고?”
세르미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킷을 걸치고 밖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나서려니, 부스스 일어난 리슈아가 저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나도 갈게.”
“아니야. 넌 위험하니까 일단 응접실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
마족과의 싸움이라면 당연히 리슈아를 데려갔겠지만, 인간들의 전쟁은 이야기가 달랐다. 위험도 따랐지만, 세르미네는 괜한 참극을 리슈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리슈아가 짧은 보라색 재킷을 걸치자 세르미네는 그를 데리고 방을 나와 짧은 복도를 지났다. 응접실에는 이미 나흐딘을 비롯해 세 손주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이런, 손님이 모처럼 오셨건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나흐딘은 걱정과 유감이 석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 손에 전투 도끼를 든 이실라가 나름대로 그들을 안심하게 하려 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여기는 중립 지대입니다. 아무리 저자들이 피에 굶주려있어도, 현자의 집을 침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소란을 눈치채고 작은 자들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거군요.”
그러더니 그녀는 모인 모두의 면면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지시를 내렸다.
“할아버지와 카마는 여기 계세요. 아, 거기 작은 손님도 여기 있는 게 낫겠군요. 무, 네가 여기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거기 큰 손님은 저와 바깥 동향을 감시하러 가주시겠습니까?”
세르미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나흐딘과 카마는 별다른 이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는 허리에 일자형 둔기를 차고, 손에는 철퇴를 들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미네 역시 불만은 없었다. 다만, 리슈아가 약간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세르미네는 이실라와 함께 서둘러 집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오니 아직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화약 냄새와 함께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이리 오시죠. 전망이 잘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집 뒤편의 큰 바위로 세르미네를 안내한 이실라는 그에게 당부를 남겼다.
“상황을 보시고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전하러 와주시죠. 저는 근처 망루에서 숲 쪽을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세르미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실라는 서둘러 망루를 향해 달려갔고, 세르미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쟁이 벌어지는 절벽 아래를 지켜보았다.
‘언제 봐도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끼어들어 중재를 할 수는 없었다. 아틀란티스인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다. 스스로가 위협을 받으면 방어를 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나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리고 세르미네는 다른 것이 하나 더 신경 쓰였다. 아까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무어라 말로 할 수는 없지만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찌릿찌릿 저리는 것이, 타오르는 하늘만큼이나 불길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의 불안을 현실로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먼바다에서 조금씩, 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 저건!”
틀림없었다. 마족이었다. 그러나 전쟁과 살육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옆의 바다에서 이변이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여전히 들려오는 대포 소리를 뒤로하고, 세르미네는 우선 이실라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런 그의 어깨 너머로 전쟁의 함성이 아닌, 아수라장의 비명이 들렸다. 물보라가 촤악, 일며 드러난 것은 거대한 도마뱀과 물고기를 합쳐놓은, 네 발의 마족이었다.
“젠장, 저건 중급 마족이잖아! 그것도 꽤나 강한…, 거의 고위 마족에 준하는 놈이야!”
잠시 뒤를 돌아본 세르미네는 경악했다. 그런 그에게 이실라가 망루에서 달려와 상황을 물었다.
“저게 뭡니까? 저, 저것이 마족입니까?”
마족을 처음 보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 지워진 것인지는 몰라도 이실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녀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설명해줄 여유가 없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가서 현자님과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절대 집 밖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그리고 리슈아…, 그러니까 그 작은 인간….”
말을 정정하던 세르미네의 눈에 멀리서 달려오는 리슈아가 보였다. 그 역시 마족의 낌새를 눈치채고 세르미네에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세르미네는 이실라에게 한층 더 밀어붙였다.
“어서 가시오! 기사가 아닌 자는 괜한 죽임을 당할 뿐이니, 마을 사람들은 내가 최대한 구해보겠소!”
그가 거칠게 말하며 검을 뽑고, 날개를 펴자 이실라는 군말 없이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달려갔다. 절벽이 꽤 높아 저 큰 마족이 이곳까지 공격해오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수하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급 마족일지라도 일개 인간이 당해낼 수 있을까 세르미네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이곳 사람들의 용맹함을 믿기로 했다.
“세르미네, 저기, 저기! 마족이!”
리슈아가 세르미네 앞에서 마족을 가리키며 허둥댔다. 그는 마족이 나타나 놀랐다기보다는, 마족에게 거의 학살이나 다름없이 당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더욱 걱정인 모양이었다. 커다란 연파란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세르미네는 소매로 빠르게 닦아주고는 그를 재촉했다.
“그래. 우리밖에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자!”
세르미네는 리슈아가 날개를 펴자, 그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아 절벽을 뛰어넘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야말로 이곳이 수라도가 아니면 무엇이냐 싶을 정도로 상황은 처참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를 밟고 생존자들은 도망을 가려 하거나, 혹은 이참에 적을 하나라도 더 베겠다고 같은 인간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자도 있었다. 개중 용감하고 의로운 몇몇은 마족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무리 용맹한 민족도 고위 마족에 준하는 중급 마족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요르문간드가 나타났다! 우리는 다 죽었어!”
기어코 이런 외침까지 들려왔다. 그 말대로 마족은 긴 꼬리를 휘둘러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한편, 목에 달린 지느러미에서 가는 물대포를 쏘아 인간들을 학살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실로 전설에 나오는 괴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르미네는 차마 리슈아를 데리고 지상으로 갈 수는 없었다. 워낙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있는 데다 피가 고인 웅덩이도 곳곳에 있었다. 게다가 아직 남은 생존자들 중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무기를 겨눌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공중전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검은 쓰기 힘들겠지만, 꼬리 공격도 무효화할 수 있으니 이편이 낫겠지.’
그리 생각한 세르미네는 표정이 좋지 않은 리슈아를 다독이며 말했다.
“리슈아, 너는 혹시 멀리서 저놈의 사역마가 나오지는 않는지, 혹은 다른 마족은 없는지 감시를 해 줘. 희생자가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절벽 위의 현자님과 손주들이 위험할 수도 있어.”
“세르미네, 정말 괜찮을까?”
“괜찮아. 나를 믿어. 그리고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 알았지?”
세르미네는 그렇게 당부를 해 놓고 검을 활로 바꿔 들었다. 우선은 마족의 약점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눈이 약해 보이지만, 우선 지느러미를 봉쇄하는 게 먼저겠군.’
그리 생각한 세르미네가 화살을 장전하고 겨누는데, 옆에서 검은 채찍이 날아가 마족의 목을 후려쳤다.
“리슈아?”
다름 아닌 리슈아가 손에 검은 실을 다발로 묶어 쥐고는 마족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이었지만, 세르미네의 도움이 되겠다는 의지를 그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인간들에게서 눈을 돌린 마족은 리슈아를 한 번 바라보고는 그에게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실로 아찔한 장면이 연이어 벌어졌다. 리슈아는 날개를 이용해 곡예비행을 하며 마족의 공격을 피하고, 세르미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저 바보, 나중에 한마디 해 줘야지!’
세르미네는 마음이 급해졌다. 저러다 리슈아의 날개에 공격이 명중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는 화살을 세 발 연속으로 쏘았고, 그중 두 개가 양 지느러미에 명중했다.
마족은 혀를 빼물며 포효하더니 세르미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찢어진 지느러미에서 약한 물대포가 나오자, 세르미네는 가볍게 그것을 피하고 화살을 마족의 입 안으로 쏘았다.
하얀빛의 화살은 마족의 입천장에 꽂혔다. 마족이 아픔에 몸을 비틀자 세르미네는 다시 검으로 무기를 바꾸고 마족의 목을 베러 달려들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명색이 중급 마족인데…, 지나치게 약한데?’
그러던 그의 눈에 마족의 목에 난 흉터가 들어왔다. 무언가 예리한 것에 깊게 베인 것처럼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제야 세르미네는 모든 상황을 짜맞출 수 있었다.
‘멸망 전에 아틀란티스의 기사에게 당한 녀석이군. 바다에 잠들어있다가 전쟁의 소란 때문에 나와서 인간들을 사냥한 모양이야. 이번에는 기필코 해치워야겠군.’
그러나 마족은 더 이상 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인간들을 해치우지도,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약한 리슈아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족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닷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 돼! 저 녀석을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그러나 마족의 행동은 재빨랐다. 세르미네가 검을 들고 상처를 내려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마족은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마치 빨려들 듯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젠장!”
세르미네가 욕을 내뱉으며 바다 위를 맴돌았다. 그는 물속에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붉게 물든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인간들의 시체가 매우 보기 역했다.
‘리슈아를 위해서라도 일단 몸을 돌리는 게 좋겠군.’
그리 판단한 세르미네는 얼른 리슈아를 불렀다. 얼굴색이 파래진 리슈아를 거의 안다시피 부축한 세르미네는 다시 현자의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