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누구세요?”
리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에게 물었다. 이 근방 사람치고는 상당히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 화단을 가리키더니 이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화단, 제가 가꾼 거랍니다.”
“우와, 진짜요? 이렇게 훌륭한 화단은 보기 드문데…, 굉장해요!”
식물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는 리슈아가 감탄을 연발하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전 리슈아라고 해요. 여기 이 무섭게 생긴 사람은 세르미네고…,”
“누가 무섭게 생겼다는 거야.”
세르미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그러자 소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분들이네요. 제 이름은….”
“카마! 거기서 뭐 해!”
조금 전 자신을 현자의 손녀라 소개한 자가 문 앞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나무 휠체어를 탄 소녀의 이름이 카마인 모양이었다.
소녀는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양쪽으로 땋아 내린 은색의 머리카락이 흔들흔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렸다.
“알았어, 곧 갈게. 이실라.”
‘꽤 과보호를 하는군.’
세르미네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자신이 리슈아를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카마를 향해 허리를 약간 굽히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휠체어를 끌어드릴까요?”
“친절하셔라. 고마워요.”
카마는 웃으며 호의를 받았지만, 지켜보고 있는 이실라라는 여자는 도끼눈이 되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슈아도 이런 세르미네의 모습이 흔치 않은지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옆을 따랐다.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현관에 다다르자, 이실라는 휠체어 손잡이를 뺏어 자신이 잡고는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운 좋게 할아버지의 손님이니 망정이지, 외부인과 무방비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면서 이실라는 세르미네를 한 번 곁눈질했다. 현자의 서신까지 가지고 왔지만, 아직 완전히 그를 믿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요즘 정세가 확실히 안 좋은 모양이군.’
세르미네는 그녀를 특별히 탓하지는 않았다. 아니, 차라리 저 정도면 나름대로 꽤 호의를 보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실라. 손님에게 그러면 못 쓴다. 저분은 귀한 손님이라고 내 방금 말했잖느냐.”
집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응접실 테이블에 거구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세르미네도 편지로 왕래만 했을 뿐,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현자 나흐딘이었다.
보통 이곳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죽으로 만들거나 그 위에 천을 조금 덧댄 형태였다. 나흐딘도 예외 없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 위에 망토처럼 자수가 놓인 직물을 걸치고 있었다. 풍성하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발 머리와 세월을 모르는 듯 여전히 생기있게 빛나는 눈동자의 현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세르미네를 성대하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아틀란티스의 마지막 남은 기사들이여.”
그 말을 들은 리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세르미네의 옷을 잡아끌었다.
“세르미네, 저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틀란티스를 아는 거야? 세르미네가 말한 거야?”
루아에게 혼날 것을 걱정했는지 리슈아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태연하게,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면서 나흐딘의 인사를 받았다.
“환영 감사합니다. 아틀란티스 일족의 후예이자 현자 나흐딘이시여.”
“뭐?!”
리슈아에게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거구의 노인이 아틀란티스와 연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허허, 후계자께서는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응접실 테이블로 세르미네와 리슈아를 안내한 나흐딘은 뒤에서 지시를 기다리던 이실라를 바라보았다.
“무는 어디 있느냐?”
“벌써 차를 끓이러 갔어요.”
이실라는 툴툴거리며 대답했지만, 나흐딘은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 웃었다.
“여전히 눈치는 빠른 녀석이군. 배짱도 좀 있으면 좋으련만.”
“바랄 걸 바라야죠. 아, 저기 오네요.”
이실라의 말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랐다. 투박하고 큰 손에 쟁반을 든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의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라 눈마저 가린 남자는 수줍은 듯 잔 세 개가 놓인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재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 방금….”
세르미네도, 리슈아도 놀라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흐딘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안 했군요. 저 아이들은 손주들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불안정한 정세에 절 지켜주겠다고 제 부모도 따라가지 않은 아이들이지요.”
세르미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적당히 끓인 차는 싱겁지도, 떫지도 않은 적당한 맛이었다.
“아까 저 이실라라는 분도 정세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하셨지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그는 나흐딘에게 불안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세르미네는 한시라도 빨리 물의 기사를 찾고 싶어 약간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물의 기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후보지인 이곳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나흐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 부족의 방식에 대해선 아실 겁니다. 더욱 나은 땅을 찾아 전쟁을 벌이고, 땅을 뺏으며 살고 있지요. 그 사실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겁니다. 그래도 저희의 방식이니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세르미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이든 그들이 정한 삶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은 그저 외부인일 뿐이니, 그 방식에 훈수를 둘 수는 없었다.
“이 언덕 아래쪽에 협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고, 빼앗으려 하고 있지요. 그나마 제가 조금 힘을 써 두었기에 지금까지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최근 이 영토를 빼앗긴 작은 자들이 다시 땅을 되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두 부족은 결판을 내기로 한 것이지요. 더욱 부강해져 땅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말이지요.”
“혹시 그 마을에 물의 기사로 유력해 보이는 자가 있습니까?”
세르미네는 말도 안 되는 질문임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물었다. ‘자질’을 가진 자, 즉 특정 인물이 수호석과 반응하는지의 여부는 당사자를 만나거나 그와 근접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렇다고 해도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자를 만나도, 그자가 거절을 하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런 세르미네의 마음을 아는지 나흐딘은 곰곰이 생각하며 손을 꼽아보았다.
“제 식견으로는 두어 사람 정도를 추릴 수 있겠군요. 하지만 역시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겠지요.”
“하지만 마을에 가는 걸 추천하고 싶진 않습니다. 여기도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와중에, 전쟁 직전의 마을에 외부인이라니…, 당신은 그렇다고 쳐도 거기 더욱 작은 인간은 힘들 것 같은데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이실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나흐딘도 이실라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강한 아틀란티스의 기사라도, 마족과의 싸움이 아닌 인간들의 전쟁에 끼어들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게다가 후계자님께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될 일이지요.”
“할아버지는 어떻게 아틀란티스를 알아요? 그건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비밀인데….”
리슈아가 순진하게 큰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세르미네가 그의 팔을 팔꿈치로 가볍게 치며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할아버지가 뭐야, 현자님이라고 해야지.”
그러자 나흐딘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손주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군요. 할아버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흠흠, 아무튼 아틀란티스를 어떻게 아느냐, 그건 바로 조상 중 아틀란티스인이 있기 때문이지요.”
“정말요?”
리슈아는 깜짝 놀라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세르미네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이어 설명했다.
“아틀란티스에 살던 자들 중 일부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는 건 너도 알지? 나흐딘 님의 조상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어. 돌아가신 폐하께서는 아틀란티스에 대해 발설하는 일을 금하시긴 했어도, 절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하신 건 아니었어. 왜냐하면 세상과 소통할 자는 필요했으니까 말이야.”
“그중 한 사람이 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던가…, 그런 거야?”
“몇 대를 거슬러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먼 조상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나흐딘이 껄껄, 한 번 더 웃으며 설명을 보충하고는 이번엔 세르미네를 향했다.
“정 급하신 일이라면 마을에 있는 호의적인 자들에게 서신을 보내두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시고, 내일 출발하시면 어떠신지요.”
세르미네는 잠시 리슈아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동료였으니 의견을 묻는 것이 당연했다. 다행히 리슈아는 환하게 웃으며 먼저 그러자고 권했고, 세르미네는 나흐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
*
그날 저녁은 성대한 만찬이었다. 무가 만든 요리는 수준급인데다, 귀한 손님이 왔다며 재료 또한 아끼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호의에 대한 감사로 아틀란티스에 대해 그들이 S궁금해하는 점을 알려주었다. 물론 외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였다. 베일에 싸인 전설의 대륙에 관한 이야기에 그들은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졌다.
덕분에 이실라 또한 세르미네에게 품은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몸소 손님방을 정리해 그들을 안내했고, 세르미네와 리슈아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세르미네는 한쪽 팔로 리슈아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서로 마주 본 채 누워 리슈아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았다. 세르미네는 적당히 대답하다 리슈아를 재우고는 자신도 잠이 들었다.
그러나 편안한 밤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리슈아가 세르미네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왜 그래?”
난데없이 어깨를 찔린 세르미네가 눈을 뜨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리슈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세르미네,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
“뭐?”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 타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리고 놀란 세르미네가 몸을 일으킬 때쯤, 이실라가 문밖에서 소리를 쳤다.
“다들 일어나요! 전쟁이 시작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