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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61화 (61/87)

61화

“세르미네, 이거 봐! 이렇게 추운 곳인데도 꽃이 피어있어!”

세르미네와 함께 나란히 숲길을 걷고 있던 리슈아가 갑자기 한쪽 구석에 핀 야생화를 발견하더니 쪼르르 달려갔다. 세르미네는 ‘또 시작이군.’하고 생각했지만, 일단 그의 말에 장단은 맞춰주었다.

“아무리 기온은 낮아도 일단 이곳은 여름이니까.”

“굉장하다!”

참 작은 꽃인데도 용케 발견했다, 세르미네는 붉은색의 작은 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북유럽의 어느 숲속을 걷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은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흙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빽빽한 삼림은 아니었지만, 워낙 추운 곳이니만큼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숲이었다.

리슈아는 이제 어느 정도 웃음을 되찾았다. 마족 듀믈레에게 납치되었던 리슈아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세르미네에게 돌아왔었다.

몸의 상처는 금세 나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 세르미네와 루아는 지극정성으로 리슈아를 돌보았고, 그 덕분에 지금은 거의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웃고 떠들며 지내는 중이었다.

우선 한시름 놓은 세르미네에게는 다음 과제가 있었다. 그는 납치 사건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돼. 리슈아를 위해서라도 자존심은 잠시 접고, 함께 싸울 동료를 구해야만 해.’

대륙의 멸망 이후 그는 자신이 모든 걸 짊어지고 마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리슈아와 루아를 지키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날, 기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리슈아를 그렇게 빼앗기진 않았을 것이라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세르미네와 리슈아, 그리고 루아의 수호석을 제외하면 현재 남아있는 수호석은 네 개였다. 불의 수호석, 물의 수호석, 바람의 수호석, 그리고 대지의 수호석. 이 네 수호석의 주인, 즉 아틀란티스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세상에 분명히 있었다.

그중 가장 전투력이 강한 기사가 사용하는 물의 수호석, 세르미네는 그 주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라면 분명 그 주인이 나타나겠지.’

지금 시대의 가장 강한 자들을 꼽으라면 역시 바이킹, 노르만족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건너와 삶의 터전을 찾고 영토를 확장하는 그들의 용맹함은 비할 곳이 없었다.

특히나 바다를 가까이하는 그들의 특성상 물의 수호석과 반응하는 자가 나타날 확률이 높았다. 세르미네는 그것을 노리고 정보를 수소문한 끝에 알아낸 한 사람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리슈아,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해.”

세 걸음 가면 한 번 멈춰 서서는 들꽃이나 나무들을 구경하는 리슈아를 세르미네가 잡아끌었다. 그의 말대로 해가 지기 전에는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이런 곳에는 산적이나 위험한 동물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해가 지면 물론 그 위험은 배가 되었다. 세르미네의 실력 정도면 인간이나 동물을 상대하기란 매우 쉬웠지만, 마족이 아닌 자와의 싸움은 피하라는 것이 기사단의 규율이었다. 세르미네는 멸망 후에도 기사단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다.

“모처럼 나온 거니까 조금은 둘러봐도 괜찮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슈아는 어느 틈엔가 세르미네의 곁으로 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무작정 리슈아를 통제할 수만도 없었기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도 맞다.”

납치 사건 이후 요양이라는 명목 아래 근 몇 년을 리슈아는 대륙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루아는 어느 정도의 외출은 괜찮다는 입장이었지만, 세르미네가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한 세르미네는 한동안 홀로 마족을 퇴치했다. 하지만 역시 세르미네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리슈아를 언제까지나 대륙 안에 가둬둘 수는 없었다. 멸망 이전이라면 모를까, 성과 그 주변으로 행동반경이 정해진 대륙 안은 그야말로 좁디좁은 새장과도 같았다.

결국 수호석의 주인을 찾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자며 세르미네는 스스로와 타협했다. 그리하여 리슈아는 대륙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고, 근래 느낀 적 없는 한껏 들뜬 기분을 즐기는 중이었다.

“세르미네, 그런데 오늘 만나는 사람은 누구야?”

갑자기 리슈아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걸 이제야 묻는군….’

세르미네는 자신이 전부 알아서 할 요량으로 리슈아에게는 ‘수호석의 주인을 찾으러 간다.’ 정도만 알려주었다. 하지만 숨길 생각은 딱히 없었고, 리슈아가 물어보지 않았기에 일정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 부근 노르만족 중에서도 현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덜하고, 아는 것이 많으니 혹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그럼 마을에 가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

순진하게 눈을 빛내는 리슈아에게 세르미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놀러 가는 게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인간과의 접촉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아.”

그것 또한 기사단의 규율이었다. 아틀란티스에 대해서 인간들이 알아도 곤란했거니와, 공연히 인간과 친해지면 힘들어지는 것은 자신 스스로였다. 때문에 기사단에서는 마족과의 전투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며 인간들과 친해지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마을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주변 정세가 안 좋은 모양이야. 때문에 우리가 마을보다 그 사람을 먼저 만나려는 것도 있고 말이다.”

“그렇구나.”

리슈아는 바로 수긍하고, 더 이상 무리한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리슈아가 철이 없어 보여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늘 돌발 행동을 해도 도를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세르미네를 의식하고 있는 거라 그는 짐작했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런 리슈아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리슈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잘재잘 떠들었고, 세르미네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주변의 경계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산짐승이나 산적은 만나지 않았다.

이윽고 숲에서 빠져나온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엄청나게 넓은 들판이었다. 꽤 고지대에 위치했는지 들판 너머로 수평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듬성듬성 나무가 심어진 들판에는 여름을 맞이하여 여러 들꽃이 만발해있었다. 대뜸 신이나 달려가려는 리슈아를 세르미네가 겨우 불러세웠다.

“어딜 가려고 그래. 이리 와. 저기 집이 하나 보이네.”

세르미네가 가리킨 곳에 통나무집이 하나 있었다. 통나무를 잘 엮어 만든 이층집에 울타리를 둘러 작은 마당까지 갖춘, 꽤 그럴듯한 집이었다.

“마을은 아닌데, 왜 저 집 하나만 있는 거지?”

리슈아는 의아해했지만, 세르미네는 목적지를 찾았다는 기쁨에 망설임 없이 통나무집으로 성큼 다가갔다.

문은 닫혀있었다. 마당에도 사람이 없었지만, 분명 누군가 살고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에 묻어있었다. 세르미네는 크게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계십니까?”

그렇게 두 번을 부르자, 마당 한쪽의 창고에서 건장한 여자 한 사람이 양손에 짚더미를 들고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정중한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세르미네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어 얼른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전에 서신을 보냈던 자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신 분과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숲 건너로 넘어간 작은 자들은 아니겠지요?”

여전히 자진을 의심하는 눈초리에 세르미네는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 품속에서 작은 편지 봉투를 꺼냈다.

“읽어보시죠. 현자 나흐딘 님과 나눈 편지입니다.”

그러자 여자는 짚더미를 내려놓고 편지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녀는 봉투와 편지에 적힌 필적, 그리고 내용까지 훑어보고는 다시 조심스레 편지를 봉투에 넣어 세르미네에게 돌려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요즘 부족의 정세가 좋지 않은 탓에 겨우 몰아낸 작은 자들이 다시 이 땅을 노리고 있거든요.”

작은 자들이라 함은 원래 이 땅에 살던 원주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니 정당한 일이 아닌가 싶었지만, 세르미네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영토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곳 인간들의 문제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현자의 위치를 물었다.

“현자께서는 어디 계시는지요?”

“그분은 저의 조부 되십니다. 지금 안에 계시니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대답을 하고는 짚더미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첫 단추를 꿰는 데 성공한 세르미네는 자연스럽게 리슈아를 불렀다.

“리슈아, 이제 현자를 만나러…, 으악!”

세르미네가 짧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기다릴 줄 알았던 리슈아의 손이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저 먼 한 구석에서 유심히 화단을 관찰하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리슈아!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세르미네. 여기 화단이 굉장히 잘 가꿔져 있어. 누군가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어!”

리슈아는 쪼그려 앉아 화단을 보던 자세 그대로 세르미네에게 고개만 돌렸다. 해맑게 웃는 모습에 화를 내기도 참 민망했지만, 세르미네는 성큼성큼 리슈아에게 다가가 살짝 머리를 쥐어박았다.

“요 녀석아. 밖에선 마음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부쩍 걱정이 늘어난 세르미네는 행여나 리슈아가 또다시 납치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무리 리슈아를 믿고, 그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헤헤, 미안해. 그렇지만 이거 봐. 이렇게 꽃을 잘 피워낸 화단은 보기 드물단 말이야.”

“칭찬 감사해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갑자기 두 사람의 등 뒤에서 가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따라 살포시 웃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세르미네와 리슈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휠체어를 탄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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