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60화 (60/87)

60화

우여곡절 끝에 세르미네와 가연은 서로 손을 잡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순간조차 손을 놓지 않아 리레시아나 마이데가 봤다면 질투를 불러일으키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아차, 선물을 놓고 왔군."

현관문의 도어록을 누르려던 세르미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가연은 무슨 말인가 싶다가, 카페의 테이블에 놓여있던 두 개의 박스를 기억해냈다.

"그 사람이 준 선물?"

"리레시아야. 미운 녀석이라고 해도, 슬슬 이름을 불러주자. 아무튼 그거보다도…."

가연의 말을 정정해주던 세르미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놓고 온 딸기 타르트만 생각했지, 리레시아가 준 선물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나중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는걸.'

리레시아의 성격을 잘 아는 세르미네였다. 그가 없는 사이 리레시아가 가연에게 더욱 심한 말을 하거나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아가서 물건을 찾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리레시아가 가지고 돌아갔거나, 혹은 버리거나 했을지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선물을 포기하기로 하고 도어록을 열었다.

"우와, 엄청나다. 초콜릿 냄새…."

문을 연 순간 가연이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풍겨오는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지나치게 달콤한 향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연의 말대로 초콜릿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마이데, 안에 있나? 이게 대체 무슨…."

세르미네가 부엌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자, 앞치마를 한껏 차려입은 마이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역시 같이 오는군."

'역시?'

마이데의 말을 곱씹으며 부엌에 들어선 세르미네는 우선 난장판이 된 조리대를 보고 기겁했다.

"대, 대체 뭘 한 거지?!"

조리대는 화이트초콜릿과 다크 초콜릿을 녹인 흔적들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조리대 판과 벽면의 여기저기 초콜릿이 튀거나, 혹은 검은 초콜릿이 덕지덕지 묻은 조리기구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뭐, 처음 만들어보는 초콜릿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는 마이데의 뺨과 드러내놓은 팔뚝에도 무지개색 토핑이 잔뜩 묻어있었다. 세르미네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다 치운다면 뭐 할 말은 없다만."

"앗, 놓고 온 선물이 여기 있어!"

가연이 큰 소리로 외치며 식탁을 가리켰다. 세르미네가 돌아보니 조리대처럼 난장판인 식탁 한쪽이 유난히 깨끗했고, 그 위에 익숙한 상자 두 개가 보였다.

"아, 저거? 리레시아가 와서 세르미네 네가 놓고 간 거라며 주고 가더라.“

마이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연은 가장 위에 놓인 정육면체 모양의 네모반듯한 상자부터 풀어보았다. 세르미네의 언질이 있었기에 그중 하나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기 타르트다!”

신나서 폴짝폴짝 뛰는 가연을 세르미네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이데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자신 또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처음 만든 초콜릿이라 변변찮지만….”

마이데가 내민 반투명한 파란 상자 속에는 꽃 모양의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비록 토핑은 지저분하고, 온전히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가연은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꽃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고마워요! 와, 검은색에 하얀색이 섞인 루드베키아 꽃 모양 초콜릿이라니, 신기해요!”

“뭐, 그게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는데 세르미네 네가 너무 일찍 왔어.”

능글맞게 웃으며 은근슬쩍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마이데에게 세르미네는 한 마디 날카롭게 쏘았다.

“네가 무슨 일류 요리사나 초콜릿 장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넌 그냥 이제 막 10분 요리책으로 공부 중인 초보자야.”

“그럼 그럼. 그러니까 조금 어설퍼도 오케이, 이런 거지.”

세르미네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이데는 긍정적으로 받아넘겼다. 결국 세르미네는 포기하고 거실로 돌아갔다. 가연만이 신나서 마이데의 옆에 남아 부엌 정리를 도왔다.

‘저 태평한 성격은 리슈아와 똑같아서, 거참.’

그래도 어찌 보면 부러운 성격이었다. 지금의 가연에게도 필요할지 모르는, 진짜 리슈아의 성격에 세르미네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초조함을 느꼈다.

*

소동이 일었던 밸런타인데이도 훌쩍 지나갔다. 가연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마이데의 선물을 세르미네와 똑같은 초콜릿으로 주문해 건네주었다. 물론 그것을 본 세르미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더욱 가연과의 깊은 사이를 마이데에게 과시했다.

“가연아, 지금 뭘 하는 건가?”

어느 저녁, 불을 환히 밝힌 방안에서 가연이 주섬주섬 가방 안에 책들을 넣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슬쩍 방에 들러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아, 세르미네. 이제 곧 새 학기니까, 학교 갈 준비를 해야지.”

“학교는 쉴 수 없나? 마족과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니….”

네가 안고 있는 사명부터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지만, 세르미네의 목소리에는 걱정도 묻어있었다. 가연은 그제야 가방에서 눈을 떼고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물론 휴학이라는 게 있긴 하지. 하지만 저번에 장학금도 나왔고, 부모님 허락 없이 휴학은 할 수 없어.”

“아직 아틀란티스에 대해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세르미네는 가연의 부모라는 존재를 리슈아와는 관계없는, 임시 가족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가연과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 차라리 리슈아를 데려와 후계자로 명한 우라노스가 리슈아의 가족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가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기에, 세르미네는 스스로 자중했다.

“그렇지, 뭐. 부모님을 걱정하시게 할 수도 없고, 마족에 대한 기억은 다 지워지니까 어쩔 수 없어.”

가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대답하며 가방의 걸쇠를 잠갔다. 세르미네는 그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한탄하는 것처럼, 하지만 진심은 아닌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차라리 내가 같이 학교라는 곳에 다니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자 가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르미네는 어느 과가 잘 어울릴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모처럼 찾은 일상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뒷면에 그림자가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가연의 방이 보이는 거실에서 마이데가 쓴 약초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가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세르미네조차 알지 못했다.

*

그날 밤, 세르미네는 갈증에 눈을 떴다. 머리맡에 있던 조금 남은 자리끼로 갈증을 해소한 그는 어렴풋이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몸을 일으켰다.

‘마이데, 또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가?’

마이데가 자신의 방 안에서야 담배를 피우던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세르미네가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거실로 나와서 피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그는 닫힌 문을 열려 했다.

“마이데,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아요.”

난데없이 밖에서 가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르미네는 문을 열려던 손을 멈췄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에 집중하자, 가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이데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째서 힘들다는 거지? 세르미네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히 말을 해달라는 것뿐인데.”

마이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쓸쓸했다. 평소의 지나칠 정도로 활기 넘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진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세르미네와의 기억은 조금씩 돌아오지만, 마이데와의 기억은….”

“아직 나를 믿을 수 없는 거야?”

마이데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세르미네는 혹시라도 그가 가연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달려 나가 마이데를 때려눕힐 생각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게 아니에요. 그저 모르겠어요. 그 남자애, 리레시아나 무녀님, 그리고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옆에서 도와주던 사람에 대한 건 물론, 마이데에 대한 기억도 떠오르는 게 없어요.”

가연은 미안함을 다해 말했지만, 마이데는 분통을 터뜨렸다.

“어째서? 나 역시 네게 진심이야. 세르미네만큼 너와 애틋한 추억이 많은 건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듣고 있던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발음이 약간씩 새고 있음을 알았다. 분명 술까지 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술에 강한 녀석이 저 정도로 마셨다는 건….’

아마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라면 상심이 컸겠노라고 위로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연, 즉 리슈아에게 품은 마이데의 마음을 세르미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네게 이야기를 해 주면 될까?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일, 나눴던 이야기…. 그 모든 걸 나도 세르미네처럼 이야기해주면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눠줄까?”

“그건….”

가연은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다. 마이데의 발걸음 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더니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야기를 해줄 테니 잘 들어. 이걸로 네 기억이 돌아오면 좋으련만….”

마이데의 말과 함께 문에 기대 듣고 있던 세르미네는 옛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주 먼 옛날, 마이데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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