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세르미네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창문을 두드린 주인공은 시야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가 포착한 것은 카페 입구로 달려가는 보라색 꽁지머리였다.
‘아, 안 돼!’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세르미네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레시아와 얽히면 분명 성가신 일이 생길 터였다. 세르미네는 제발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하고 기도했지만, 하늘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세르미네! 여기 있었네! 혼자서 뭐해?”
가연이 작은 쇼핑백을 들고 세르미네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빈 그릇과 음료 컵을 세르미네가 먹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그게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앗, 저건 혹시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야?”
세르미네의 옆에 앉은 가연이 잘 포장된 흰 상자와 타르트 상자를 가리켰다. 세르미네는 더더욱 곤혹스럽게 겨우 꺼낸 말끝을 차츰 흐렸다.
“아니, 하나는 맞지만, 하나는….”
“거기 당신. 부른 적도 없는데 왜 왔어?”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리레시아가 케이크, 그리고 커피가 올려진 쟁반을 두 손에 들고는 가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당신이 왜 여기 있죠? 세르미네, 이 사람 만나고 있던 거였어?”
“갈수록 마음에 안 드네. 하지만 세르미네 님 앞이니 참겠어. 거기 대충 앉아있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리레시아는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맞은편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가 들고 온 쟁반의 커피를 마시며 목을 축인 세르미네는 케이크를 우선 가연에게 권했다.
“좀 먹어보는 게 어때?”
그러나 가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고는 대답했다.
“그건 세르미네에게 사준 거잖아. 게다가… 케이크 고르는 안목도 별로 없네, 저 사람은.”
세르미네 앞에 놓인 것은 녹차와 쓴 초콜릿으로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였다. 다른 케이크에 비해 모양도 수수했던 탓에 가연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리레시아는 그 말에 발끈하기는커녕, 가연에게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설마 화려한 케이크만이 진정한 케이크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세르미네 님은 단것을 싫어하신단 것도 몰라?”
“그, 그건 아니…, 앗, 세르미네, 혹시 단 것은 싫어해?”
리레시아의 말에 반박하려던 가연은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고 세르미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자리 옆에 놓아둔 붉고 작은 쇼핑백과 세르미네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가연에게 세르미네는 대답했다.
“아, 아니. 싫어하기보다는 그냥 잘 안 먹는 거다.”
“그렇지만 모처럼 초콜릿을 샀는데….”
가연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이때다 싶은 리레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쏘아붙였다.
“정말 세르미네 님을 좋아하는 게 맞아? 상대가 뭘 원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리레시아. 그만해라.”
가연의 얼굴빛이 더더욱 어두워지자, 세르미네는 리레시아를 향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리레시아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듯 계속해서 가연을 질책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하겠지, 짐작하고 대충 선물한 다음에 그 뿌듯함과 자기만족을 느끼고 싶은 거야?”
“리레시아!”
듣다 못한 세르미네가 리레시아에게 호통을 쳤다. 그제야 리레시아도 모기만 한 목소리로 ‘죄송해요.’라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세르미네,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던 가연은 심하게 상처받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세르미네가 붙잡을 틈도 없이 옆에 있던 붉은 쇼핑백을 들고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연아!”
세르미네도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레시아를 한 번 강하게 노려본 세르미네는 그대로 가연의 뒤를 따라 카페 밖으로 달려갔다. 주변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구경꾼의 시선이 몰렸고, 리레시아는 세르미네를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앉아있었다.
‘내, 내가 틀린 말 했나. 세르미네 님을 더 잘 아는 건 나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여준 세르미네의 눈빛 앞에서 리레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세르미네는 가연의 뒤를 따라갔지만, 이미 카페 입구에서부터 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가연의 발이 빨랐기도 했거니와, 쇼핑몰에는 사람이 많아 세르미네가 목표를 확인하고 달려가기가 꽤나 힘들었다.
“어딜 간 거지….”
세르미네는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가연이 갈 만한 곳들을 찾아가 보았다. 혹시라도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고 울고 있을까 봐 온 쇼핑몰의 남자 화장실을 전부 찾아본 데다가, 1층부터 위로 올라가며 식당과 카페 등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가연의 모습은커녕, 더듬이같이 뻗친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기에 집으로 돌아간 것인가 싶어 세르미네는 아파트인 거주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옥상 공원…!’
지금 심정의 가연이라면 세르미네와 얽힌 추억이 많은 그곳으로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미네는 지체할 것 없이 옥상 공원의 입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갔다.
유리로 된 문을 거칠게 연 그의 눈이 애타게 가연의 모습을 찾았다. 옥상 공원은 여기저기 상록수와 화초들을 심어놓았고, 노천카페의 의자와 테이블도 있는 꽤 넓은 곳이었다. 벤치만 해도 수십 개에 달해 세르미네는 하나하나 모퉁이를 돌며 가연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석진 곳, 세르미네와 아틀란티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가연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옆모습에 세르미네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연아! 여기서 뭐 해.”
세르미네가 황급히 달려갔지만, 가연은 세르미네의 모습을 보자마자 겁먹은 얼굴로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 했다. 아마 마음만 먹었다면 더욱 멀리 도망갈 수도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가연은 엉거주춤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세르미네는 달려가 가연의 어깨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이 녀석아! 걱정했잖아.”
“세르미네….”
울먹이며 세르미네의 이름을 부르는 가연의 목소리가 세르미네의 귀에 들렸다. 그는 가연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고는 함께 자리에 앉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가연은 붉은 쇼핑백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고,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보다가 먼 경치로 시선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그, 그 남자애가 한 말이 다 맞아. 나는 세르미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겨우 가연이 말문을 열었다. 그 길지 않은 말을 하기까지 가연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세르미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원론적인 위로뿐이었다.
“너는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리레시아는 기억을 잃은 적이 없으니 나에 대해 그 긴 시간 쌓여온 정보를 아는 것뿐이야.”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지금의 나로도 세르미네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다 알 수 있었을 텐데….”
자괴감을 느끼는 가연을 보며 세르미네는 착잡했다. 결국 자신을 알아달라, 기억해달라 했던 요구들이 이렇게 가연을 괴롭혔고, 또다시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르미네에 대해서도, 리슈아의 기억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던 가연은 이제 기억을 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모든 일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내가 널 보면 딸기 타르트를 떠올리는 것은 네가 그것을 나에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너는 늘 좋아하는 것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지. 때문에 아무리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네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리레시아조차도 말이야.”
가연은 고개를 들어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 필사적이었고, 진지했다. 그런 세르미네에게서 가연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지.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그리 떠벌리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뭐 눈치껏 알아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리슈아는 그럴 눈치가 없었지, 그 말을 세르미네는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선물을 받는 사람이 선호하는 것으로 신경 써준다면야 아주 좋은 일이지. 하지만 말하지도 않은 것을 알아달라고 하는 건 못 할 짓이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나에 대해 더 많이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세르미네는 최대한 자신의 진심을 담아 가연을 달랬다. 효과가 있는지 가연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밝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역시 세르미네가 받고 기뻐해 줄 선물을 하고 싶었어.”
“리레시아가 말한 것이라면 신경 쓰지 마라. 선물이란 건 본래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단 것쯤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아무리 상대가 만족할 만한 선물이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이 무엇인지쯤은 받는 사람도 다 알 수 있어.
너는 가진 용돈을 전부 써서 날 위해 초콜릿을 사 왔어. 네 나름대로 가장 좋다는 곳의, 가장 좋은 물건이겠지.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을 타인에게 선물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받는 사람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다.”
그리고 세르미네는 리레시아의 선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다 멈췄다. 리레시아의 선물은 결코 온전히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그가 좋아하는 것을 주었다고는 해도, 리레시아는 스스로를 위해 그리 한 것임을 세르미네는 잘 알았다. 다만, 그 이유 또한 알기에 책망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가연이에게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하고는, 빙 돌려 말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며 그를 자신에게 속박하려는 것과, 상대가 그리 원하지는 않지만 그를 생각하며 준 것. 나는 후자가 더욱 마음에 드는군.”
“그, 그럼 이거 받아줄 거야?”
가연은 그제야 세르미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자신이 품에 안고 있던 붉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세르미네는 그것을 받아 묵묵히 열어보고는, 상자 속에 담긴 여섯 개의 초콜릿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꺼내 자신의 입에 집어넣었다.
“괜찮군. 물론 네가 먹여준다면 더 좋을 것 같지만 말이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세르미네 대신 가연이 대신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무, 무슨 소리야! 나 집에 갈 거야!”
그나마 카페처럼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라 다행이었다. 멀리서 몇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세르미네도 개의치 않았다. 가연 역시 아무래도 세르미네의 말이 더욱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문까지 걸어가더니 세르미네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기분이 풀린 모양이군.’
세르미네도 마음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붉은 쇼핑백을 가볍게 흔들며 가연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