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58화 (58/87)

58화

그 이후로 세르미네와 가연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가연은 이제 세르미네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세르미네, 이거 봐! 드레스룸에 옷을 다 옮겨놨어!”

의기양양하게 손을 허리에 얹고 선언하듯 말하는 가연을 세르미네는 읽고 있던 책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래. 잘했다. 치르티티샤의 흔적은 다 지운 거나 마찬가지군, 이제.”

가연은 세르미네의 옆에 앉으며 일부러 씨익, 웃어 보였다.

“맞아. 이제 세르미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기억도 조금은 돌아왔고, 셋이서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그렇지?”

세르미네는 그리 말하며 가연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내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요즘 자주 보이는 애정 어린 행동이었다. 예전의 가연이라면 기겁을 하며 피했겠지만, 가연 또한 기분이 좋은지 헤헤, 하고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잠시 나갔다 올게.”

가연이 벌떡 일어서며 세르미네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딜 가는데? 생필품이라면 마이데가 이미 사러 갔는데, 외출이면 같이 가도 될까?”

세르미네가 물었지만, 어쩐 일인지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만 남기고는 이상한 스텝을 밟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 돼. 혼자 다녀올게.”

‘…?’

뭔가 감추는 듯 묘한 태도에 세르미네는 의아함만 커져 갔다. 물론 가연도 사생활이 있고, 지금껏 함께 외출하자는 것을 거절당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세르미네의 동물적인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몇 분 뒤 가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가버렸다. 넓은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세르미네는 ‘이제 뭘 한담’하고 생각하며 생각 없이 휴대폰을 열었다.

그가 휴대폰을 열기가 무섭게 메시지 음이 울렸다. 세르미네는 순간 놀라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줄 알았다. 발신자가 리레시아였던 점이 그 놀람에 한몫하기도 했다.

[세르미네 님, 오늘 시간 있으세요?]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세르미네는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칼같이 거절하려다,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단 한 마디만을 보냈다.

[왜?]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꽤 긴 답장이 빠르게 도착했다.

[세르미네 님께 드릴 게 있는데…, 비밀이긴 한데 내일이 2월 14일, 그러니까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앗, 비밀인데 말해버렸다!]

‘전혀 비밀이 아닌 것 같은데….’

세르미네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가연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라는 기대가 뒤이어 마음에서 조금씩 솟아났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세르미네는 건성으로 답장하고는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켰다. 쇼핑몰 사이트를 열고는 초콜릿 재료들을 이리저리 검색하고 있자니, 현관의 도어록이 열리고, 마이데가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들어왔다.

“내가 왔는데, 아는 척 좀 해주지 않을래?”

마이데는 서운하다는 듯 말했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세르미네는 그를 흘긋 보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밸런타인 때문이겠지.’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는 다시 마이데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저렇게 잔뜩 사 온 것들, 어쩌면 초콜릿 재료일지도 몰랐다.

“그게 다 뭐냐?”

세르미네는 일부러 모르는 척 마이데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이데는 기다렸다는 듯 들고 온 짐들을 풀며 짜잔, 하고 팔을 벌렸다.

“이걸 봐라. 내가 시장까지 가서 발품 팔아 구해온 수제 초콜릿 재료들이다. 전부 하나같이 값나가는 고급 초콜릿으로 구했지. 어떠냐!”

의기양양한 마이데에게 세르미네는 눈을 흘기며 짧게 물었다.

“그래서, 그 잘난 초콜릿은 누굴 주려고?”

“어허, 그건 영업 비밀이야. 사실 내가 누굴 주던 내 마음이지.”

마이데가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며 말했다. 일부러 약 올리는 듯한 그 태도에 세르미네는 더욱 화가 났다.

“설마 가연이에게 주려는 건 아니겠지?”

세르미네의 뾰족뾰족 날카롭게 선 질문에도 마이데는 콧노래만을 부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재차 말을 꺼냈다.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주는 게 왜 나쁜 거지? 흐음, 알았다. 세르미네는 어차피 전날이 되어서야 리레시아에게 듣고 알아챈 거지? 자신이 줄 게 없으니 다른 사람도 못 주게 하는 거지?”

마이데는 작정을 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타다닷, 쏘아붙였다. 세르미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마이데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이데를 향해 선언했다.

“좋아. 누구의 초콜릿에 가연이 더 기뻐하는지 내기라도 해 보자.”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노려보며 기 싸움을 했다. 그리고 이내 마이데는 초콜릿을 녹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고, 세르미네는 지갑을 챙긴 후 웃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분위기가 엄청나군.”

아파트 아래의 쇼핑몰 층을 한참 돌던 세르미네의 첫 감상이었다. 안 그래도 넓은 쇼핑몰은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여기저기 초콜릿과 꽃다발, 그리고 갖가지 선물을 파는 가게들로 넘쳐났다.

원래 세르미네는 기념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특히나 크리스마스며, 발렌타인 등 연인들의 시즌이라고 하는 기념일에는 더더욱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종교적인 기념일이 상술에 변질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 리슈아가 걸려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리슈아는 기념일 챙기기를 매우 좋아했다. 해마다 세르미네의 생일이며, 갖가지 기념일, 대체 근본은 있는지 의심스러운 날까지 리슈아는 전부 세르미네를 위한 선물을 가져오며 살갑게 챙겼다.

거기다가 마이데가 등장하면서부터 또한 세르미네는 기념일을 더욱 의식했다. 마이데는 인간 세계의 문화를 좋아했고, 그런 점이 리슈아와 또 잘 맞았다.

세르미네는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마이데를 의식했다. 그런 마음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온갖 기념일들을 챙기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여전히 자주 잊어버리긴 했지만, 절대 마이데에게 밀릴 수는 없었다.

‘가연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역시….’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크리스마스에도 들렀던 큰 카페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에서 커다란 딸기 타르트 한 판을 간신히 산 세르미네는 발길을 돌려 꽃집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세르미네 님~!”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지금 저 목소리에 반응했다가는 몹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하자. 모르는 척해야지.’

세르미네는 마음속으로 염불처럼 모르는 척을 외며 가게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결국 그 주인공은 세르미네의 옷깃을 덥석, 잡고 말았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못 들으셨나 봐요~ 세르미네 님. 제가 왔어요!”

세르미네는 마치 기계처럼 천천히, 삐거덕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그를 올려다보는 리레시아가 있었다.

“세르미네 님,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저랑 오붓하게 차라도 한잔하시면 어때요?”

리레시아는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며 세르미네의 옷깃을 잡아끌다가 그의 손에 들린, 잘 포장된 타르트 상자를 발견했다.

“이거, 설마 제게 주실 선물인가요? 감동이에요~! 앗, 저도 이거 드릴게요!”

리레시아는 금색 끈으로 나비매듭을 지은 하얀 상자를 하나 건넸다. 주변의 이목은 쏠리고, 세르미네는 몹시 난처해졌다. 차라리 이 타르트 상자를 리레시아에게 주고, 어디로든 도망가 새로 리슈아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르미네에게는 마치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 선물을 받느냐 마느냐로 그는 수백 번을 갈등했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물론 리슈아가 죽고 난 뒤로는 리레시아도 세르미네의 눈치를 보느라 이렇게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리슈아가 돌아왔으니 안 그래도 낮은 자신의 입지가 더 낮아질까 봐 리레시아는 더욱 세르미네에게 매달렸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얼버무리며 받기로 했다.

“그, 그래. 고맙다.”

마음대로 하라 했더니 진짜 마음대로 하는군, 하고 세르미네는 속으로 불만을 토했다. 그리고 리레시아는 세르미네가 선물을 받아주자 한층 더 마음대로 세르미네를 카페의 한쪽 자리로 데려갔다.

한참 전부터 자리를 확보해놓고 기다린 것인지 반쯤 마신 길쭉한 음료 컵과 빈 접시가 놓여있었다.

‘걸려들었구나.’

이 카페에 들어온 게 실수였다고 세르미네는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있었다. 세르미네는 제발 가연의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어가지 않길 바라며, 가시방석 앉듯 리레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타르트 상자의 두 배쯤 되는 리레시아의 선물이 세르미네는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의 눈길이 자꾸 자신의 선물로 가자, 리레시아는 세르미네를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게 무언지 아시나요? 세르미네 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 최상급의 소고기 부위만을 모아놓은 모둠 세트랍니다! 아주 비싼 거예요!”

“그렇군.”

세르미네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르미네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차라리 초콜릿보다는 이런 선물을 그는 더욱 좋아했다.

“세르미네 님, 뭔가 먹을 것을 주문해 올게요~!”

리레시아는 세르미네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진열장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이 겨울에도 롤리타 양복을 고수하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르미네는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