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르미네는 깊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 아틀란티스가 멸망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쯤이었다. 당연히 기사는 나와 이제 막 수호석의 선택을 받은 리슈아 뿐이었지. 물론 루아도 있었지만, 그녀는 폐허가 된 대륙을 재건하고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어.”
가연은 숨을 죽이고 세르미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머그잔에 절반 정도 남은 우유가 식어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당시 우리의 임무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잔류 마족들, 그리고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별 밖의 마족들을 막아내고 없애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륙의 멸망에서 겨우 남겨진 수호석들의 선택을 받은 기사를 찾아내야 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둘이서 한 거예요? 말도 안 돼….”
가연이 미지근해진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기겁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아무리 순간 이동이라는 능력이 있고, 루아의 힘으로 마족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해도 둘이서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그나마 남은 수호석이 네 개뿐인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나와 리슈아는 네 명의 새로운 기사를 찾으며 온 지구를 여행했다.”
마이데 또한 자신이 기사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는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세르미네의 이야기를 반쯤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유럽 어딘가, 영주가 다스리는 마을 부근이었을 게다. 그곳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루아의 말에 나와 리슈아는 얼른 달려갔지.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폐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곳에는 큰 뱀이 한 마리 있었어. 듀믈레 본인이 아닌, 그의 사역수였지. 당시에는 그걸 몰랐지만 말이다.”
세르미네는 말을 끊고, 얼음물을 한 잔 가져와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마이데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캔을 꺼내 하나를 세르미네 앞으로 밀어주었고, 모처럼의 호의를 세르미네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고맙군.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리슈아에게는 방어만을 최우선으로 하라 지시하고 사역수와 싸웠어. 고위 마족의 사역수라지만, 고작 개체 하나뿐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역수가 리슈아를 바라보면서 일이 벌어지고 만 거야. 그놈은 리슈아를 여기저기 자세히 뜯어보더니, 마치 무슨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나를 멀찌감치 밀어내 떨어뜨렸어. 갑작스럽고도 강한 공격에 나는 폐건물에 그대로 처박혔고, 그 사이 사역수는 리슈아를 자신의 몸으로 돌돌 말아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 순식간에 휙 사라져버렸기에 잡을 수도 없었지.”
세르미네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말을 이었다. 마이데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고, 가연 또한 이야기를 들으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역수가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는 데에만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그 사이 리슈아가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리고 결국, 동이 틀 무렵 찾아냈어. 깊은 숲속 버려진 오두막에서.
그곳에는 리슈아와 문제의 그 고위 마족, 듀믈레가 있었다. 그런데 리슈아의 상태가…, 정말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 처참하기 그지없었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에…, 그나마 살아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무래도 고위 마족을 혼자 없애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리슈아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복수심에 불타있었다. 나는 당장 그놈의 목을 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놈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어.”
마이데는 이 이야기를 얼추 알고 있었지만, 몇 번을 들어도 괴로운지 맥주를 들이켜는 횟수가 늘어났다.
가연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는데, 세르미네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다행일 수 있었지. 고위 마족을 처치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리슈아의 상태가 먼저였으니까 말이야.
나는 리슈아를 데리고 아틀란티스로 돌아왔다. 우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꼬박 일주일이 걸렸지…. 그러나 정작 심한 것은….”
“마음의 상처였죠.”
세르미네의 말을 갑자기 가연이 이어받았다.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으려던 세르미네도, 맥주를 마시던 마이데도 깜짝 놀라 손을 놓고 가연을 홱 돌아보았다.
“가연아?”
“상처가 낫고도 다시 일주일을 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마음의 상처가 컸기 때문이죠. 그걸 풀어준 게 세르미네였어요. 루드베키아 꽃밭에서 나눈 이야기들…. 맞아요. 그랬어요.”
“너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거니?!”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동시에 외쳤다. 그러자 가연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든 게 돌아온 건 아닌 것 같아요. 세르미네가 이야기한 부분만…, 마치 밀물처럼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돌아오는 기분이에요.”
세르미네는 마치 심장을 누가 꽉 쥐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가연이 조금이나마 기억을 찾았다는 점은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아픈 부분부터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다.”
한참 뒤에야 세르미네가 쓰린 속을 정리하고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너는 그래도 잘 이겨내 주었다. 한 달쯤 흐르자, 우리는 다시 함께 마족을 퇴치하러 인간들의 땅으로 내려갈 수 있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데가 기사가 되었어.”
“맞아. 그리고 그 마족이 또 나타난 거야. 어휴, 보기만 해도 끔찍하게 생겨서는…. 가는 뱀이 주렁주렁 달린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괴물로 변한 치르티티샤를 꼭 닮았고, 비쩍 마른 몸에 걸친 파란 옷…. 아직도 기억해.”
이번에는 마이데도 아는 이야기였는지, 그가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세르미네가 맥주로 타는 목을 축이는 사이, 마이데가 설명을 이었다.
“그놈은 저번과 같이 널 납치하려고 또 함정을 팠어. 하지만 이번엔 내가 같이 있었지. 그 녀석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야.”
“목적이 우리를 없애는 거라면 거침없이 없앨 수 있었겠지. 상대는 고위 마족이고, 우리는 이제 막 기사가 된 자 하나와, 전투 능력이 약한 기사, 그리고 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놈의 목적은 리슈아였고, 그를 납치하려니 방해물이 늘어난 거다. 그래서 그놈은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갔지.”
조금 진정된 세르미네가 자세히 부연 설명을 하자,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뱀 같은 남자는 ‘내가 다음에 왔을 때, 저 녀석은 너희 품을 떠날 것이다.’라고 했었어요.”
“거기까지 기억이 난 모양이구나. 맞아.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진 몰라도, 정말로 그 말대로 되고 말았지.”
다시금 치르티티샤의 일이 생각나 세르미네는 얼굴을 구기며 남은 맥주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가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세르미네가 맥주를 목으로 넘긴 것을 보고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그 마족이 마음만 먹었으면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없애고, 저를 데려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고위 마족은 영리한 놈들이야. 자칫하다 유대가 발생해서 삼위일체의 힘이라도 끌어낸다면 그 마족은 끝이겠지. 게다가 세르미네도, 나도 결코 약한 편은 아니었어. 무엇보다 내가 도끼로 그놈의 사역수를 두 동강 낸 것이 결정적이었지.”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리슈아가 자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앞으로 나서는데, 정면 돌파를 했다간 자신의 목적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었을 거다.”
“그렇군요.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가연은 기억이 점차 돌아오는지 다음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어 재촉했다. 아직은 온전히 자신의 기억이란 실감이 없는 듯했지만, 스스로 떠올려 기억을 찾아가는 점에서 세르미네는 다행이라 여겼다.
“이후로 리레시아, 폴라로이아, 그리고 치르티티샤가 차례로 기사가 되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어느 날, 루아가 갑자기 우리를 모두 불렀지. 그 마족, 듀믈레를 처음 만났던 부근에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교란 작전을 펼치며 숨어있다는데, 나는 원수를 없애겠다는 심정으로 서둘러 그를 치러 갈 것을 제안했다.”
“그곳에는 북쪽의 성, 그리고 남쪽의 성이 있었어. 그중 하나에는 듀믈레가, 다른 하나에는 하급, 중급 마족이 대거 포진해있었지. 우리는 편을 나누어 공격하기로 했어. 듀믈레는 나와 세르미네, 그리고 리레시아가 맡고, 잔챙이들은 너와 치르티티샤에게 맡기기로 했지.”
“문제는 어디에 듀믈레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 고민을 하던 차에 치르티티샤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어설픈 함정에 걸렸나 싶지만, 나와 마이데밖에 모르는 사실을 들먹이며 너를 듀믈레가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유도했지. 마치 그곳에는 잔챙이 마족밖에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 말이야.”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번갈아 가며 설명하는 도중에, 가연이 뭔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맞아요. 그리고 그 성에 들어가자마자 치르티티샤 씨는 계단 위에서 마족의 기척이 강하게 느껴진다며 혼자 처치하고 오겠다고 했어요.”
“젠장, 역시 모든 건 그 녀석의 함정이었어!”
세르미네가 비어있는 맥주 캔을 주먹으로 꽉 붙잡았다. 대번에 구겨진 알루미늄 캔을 재활용함에 던져 넣은 그는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진정해. 치르티티샤는 이미 죽었잖아. 가연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옆에서 마이데가 세르미네를 말렸지만, 본인 또한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치르티티샤가 옆에 있었더라면 세르미네보다 마이데가 먼저 나서서 주먹을 한 대 날렸을지도 몰랐다.
“그, 그래서 저는 1층의 넓은 로비를 둘러보았어요. 그러다가 그 뱀 같은 남자… 듀믈레라고 하셨죠, 그와 만났고…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살려둔 채 가질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갖겠다. 그것이 그분의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는… 손을 써보기도 전에 그에게 잡혔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둠의 수호석을 부서지지 않게 마지막까지 남겨놓는 것뿐이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가연은 세르미네를 보고 놀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가연의 말을 듣더니 보기 드물게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세르미네의 모습에 마이데마저 당황한 기색이었다.
“세르미네, 왜 그래요. 제가 무언가 말을….”
“아니야. 넌 잘못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그 빌어먹을 자식에게 잡아먹히면서도 끝끝내 놓지 않았던 네 수호석. 다른 성으로 잘못 갔던 나와 마이데, 리레시아는 샅샅이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듀믈레와, 네 기척이 끊어졌다는 루아의 말에 황급히 반대편 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겨우 네 수호석만 구해냈지.”
세르미네는 이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로서도 쌓이고 쌓인 감정이었을 터였다.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꼭꼭 숨기고, 마족을 향한 복수심으로 바꿔 분출한 그 감정이 드디어 제 모습을 찾았다.
그 모습을 가연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세르미네의 모든 행동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 돌아온 기억과 가연으로서 지켜본 세르미네의 행동에서 그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르미네….”
가연이 세르미네를 나직이 불렀다. 세르미네는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가연이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는 않았다.
“고마워.”
일순 떨렸던 세르미네의 어깨가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세르미네는 마치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