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가연아, 왜 그래?”
“저 녀석, 대체 뭐가 있다고 저러는 거야?”
뒤에서 제각기 한마디씩 던지는 말을 뒤로하고 가연은 발코니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리고는 유리에 두 손을 대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터덜터덜 다시 세르미네의 옆으로 돌아왔다.
“뭔가 있었나?”
세르미네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툭 물어본 것이었지만, 예상외로 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무언가…, 검은 나비 같은 것이 붙어있었어요. 제가 바라보니 날아가 버렸는데….”
“검은 나비?”
세르미네는 놀라 반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면면이 바라보았다. 이곳은 15층이었다. 심지어 한겨울의 날씨에 나비가 우연히 지나가다 창문에 붙어있을 리가 없었다.
“루아. 이걸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마이데가 물었다. 물론 이미 머릿속에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마이데뿐만 아니라, 아마도 가연을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답이 나왔을 터였다.
“듣는 귀가 있군요.”
그 답을 루아가 말로 꺼냈다. 그리고는 폴라로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근처에 특이한 생체 반응이 있습니까?”
“이질적인 에너지 반응 확인. 2초 전 소멸.”
폴라로이아가 여느 때처럼 짧게 대답하며 태블릿 PC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몇 분간 집중하며 화면 속을 들여다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가 무언가 해답을 찾아내길 기다렸다.
그러나 화면에서 눈을 뗀 폴라로이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동선 추적 불가. 위성에 포착된 자료 없음.”
약간의 실망스러운 눈빛이 모두의 눈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폴라로이아를 탓할 수는 없었다. 적은 마족보다 더욱 높은 존재, 마신이었다. 그의 첩자가 왔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폴라로이아는 이미 대단하고, 충분히 할 일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의외의 단서가 가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뭔가 굉장히 닮았어요. 치르티티샤 씨가 변했던 그 검은 뱀과…. 물론 모습이 닮은 건 아니지만 느낌이 뭐랄까….”
“그렇다면 위성에 남은 치르티티샤의 정보를 분석해야겠군요. 앞으로 이 근처에 비슷한 생명체가 나타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루아가 잘 정리해 모두에게 알렸다. 그러자 세르미네에게 혼난 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리레시아가 문득 말을 던졌다.
“차라리 또 이사를 가는 게 낫지 않아? 이번에도 내가 집을 잘 골라줄 테니까.”
그러나 생각만큼 좋은 방안이 아니었는지 서로 곁눈질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루아가 약간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재정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어차피 이사를 간다고 한들 마신은 끝까지 따라올 겁니다. 아마도 이 별을 떠난다고 한들 마찬가지겠지요.”
“그런가….”
리레시아가 시무룩하게 남은 차를 홀짝이자, 마이데가 루아의 안색을 살피고 물었다.
“루아.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데,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너무 오래 대륙을 비워서도 안 되고 말이야.”
마이데의 제안에 세르미네도 한마디 거들었다.
“상황 정리도 얼추 끝났고, 거기다 가연이까지 일어났으니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돌아가서 쉬어.”
그러자 루아는 폴라로이아에게 손짓으로 기계를 정리하라 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호의를 받도록 하지요.”
폴라로이아는 빠른 손길로 영상 기계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태블릿 PC의 전원을 껐다. 하지만 그것은 가방에 넣지 않고 제 품에 소중한 보물처럼 끌어안았다.
“나도 돌아가야 해? 나는 세르미네 님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은데….”
리레시아가 세르미네의 팔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세르미네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옆의 가연을 흘끔거렸다. 다행히 가연은 아직 피로가 덜 가셨는지 리레시아를 견제하지 않았다.
“마신이 아틀란티스를 습격하면 누가 지키겠나. 리레시아, 네가 있어야지.”
세르미네는 가연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리레시아를 슬쩍 띄워주었다. 그러자 리레시아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세르미네님이 언제든 돌아오실 수 있도록 이번에는 확실히 지키겠어요!”
리레시아 옆의 마이데가 아깝다는 얼굴을 했다. 세르미네는 그를 보며 흥, 하고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이제 일어서려는 루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아틀란티스를 세 번이나 잃을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연락망을 손봐 좀 더 간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루아는 가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연은 루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세르미네, 리슈아의 각성이 빨리 오도록 옆에서 힘써주십시오. 리슈아 역시 아틀란티스에 발을 들일 수 있어야 하니까요.”
루아가 가연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세르미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세르미네는 속으로 잠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대답을 할 뿐이었다.
“알겠다. 최대한 노력해보지.”
그것으로 용건은 끝이었다. 루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폴라로이아, 그리고 리레시아와 함께 아틀란티스로 돌아갔다. 남은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불이 켜진 집에, 온기 또한 충분했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가연아, 배고프지는 않아?”
침묵을 깨고 마이데가 가연에게 물었다. 가연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 이내 자신의 배를 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같아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가연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들을 주문하기 위함이었다.
“가연이의 취향은 내가 잘 아니 내가 하도록 하지.”
“세르미네보다 내 센스가 더 좋을 텐데?”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서로를 한껏 노려보다 갑자기 가연을 향해 서로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가연아, 뭐가 먹고 싶어?”
동시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물으니 가연은 저도 모르게 쿡쿡 웃음을 내뱉었다.
*
그 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가장 처음 계획했던 대로 세 사람이 리슈아의 각성까지 함께 동거하는 것으로 루아는 못을 박았고, 치르티티샤의 빈자리를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메워야 했다.
초반 일주일은 배달 음식과 외식으로 이어 나갔지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주일째 되던 날, 마이데가 한 권의 책을 들고 왔다.
“그게 뭐지?”
소파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세르미네는 마이데가 씨익 웃으며 책 한 권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봐, 이거. [초보자도 10분 만에 할 수 있는 간단 요리]라고!”
마이데는 리레시아에게 배웠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요리는 이제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니, 걱정되는데….”
세르미네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마이데는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오늘은 차돌박이 숙주나물 볶음을 성공하겠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책을 한 손에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정말 걱정되는군.”
하지만 마이데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마당에 세르미네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가연이 마이데에게 의지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큰 손해였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몸을 일으켰다. 뭐라도 해볼까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다 눈에 띈 것은 진공청소기였다.
‘치르티티샤가 저걸 줄곧 끌고 다녔었지.’
파란 몸체를 가진, 마치 코끼리 같은 모양새의 청소기를 세르미네는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동작은 의외로 단순한 모양인지, 큰 버튼 한 개와 작은 버튼 네 개가 손잡이에 달려있었다.
세르미네는 큰 버튼을 눌러 청소기를 동작시킨 후, 시험 삼아 거실을 청소해보았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몇 분 안에 청소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뭐야. 제법 간단하잖아.’
이렇게 쉬운 걸 못해서, 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지나간 일을 돌이켜봐야 소용없었다. 세르미네는 지금부터라도 잘하자며 청소기를 들고 온 집을 누비기 시작했다.
청소기가 손에 익으니 자연스레 몸은 청소를 하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으로 쉽게 빠지곤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일 – 가연이 보여주었던 엄청난 힘에 대해 골몰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자라니…, 그러고 보면 리슈아는 대체 누구였던 거지….’
자신이 아는 리슈아는 기사로서의 능력도 다소 낮고, 늘 나긋나긋 웃으며 세르미네에게 찰싹 달라붙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날 본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자, 혹은 신, 그렇게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세르미네?”
갑자기 들려온 가연의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 잠겨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돌아오니 그제야 알아챘다. 그는 지나갈 수 없는 한쪽 벽에 청소기를 계속 들이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잔뜩 사 온 가연이 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세르미네는 괜히 그 이야기를 가연에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의 가연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가연에게는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는 것으로 마이데와 합의를 한 세르미네였다. 물어봐야 가연에게 고민만 더욱 심어주고, 일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으아악!”
세르미네가 청소기 전원을 끄자, 시끄러운 청소기의 흡입음 대신에 마이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가연과 세르미네는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