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세르미네는 책 한쪽을 찢은 것 같은 종잇조각을 받아들고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옆에서 리레시아가 ‘저도 볼래요!’라고 하며 몸을 들이밀었지만, 그는 한 손으로 리레시아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차쿤탈 왕국에 관한 내용은 길지 않았으며, 치르티티샤에게 들은 것과 다르지도 않았다. 한때는 부강한 왕국이었으나 왕족 간의 내분으로 멸망했고, 모든 귀족, 왕족, 백성 할 것 없이 노예가 되거나 산 제물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개중 눈에 띄는 것은 왕족 중 주요 인물인 첫째 왕자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수색대를 보냈지만 찾지 못했고, 결국 어딘가에서 객사했을 것이란 내용으로 차쿤탈 왕국에 대한 정보는 끝이었다.
세르미네가 종잇조각에서 눈을 떼자, 리레시아가 그것을 쏙 채갔다. 어차피 다 읽은 내용이었기에 세르미네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폴라로이아는 그에 맞춰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이건…!”
리슈아가 죽기 직전, 고위 마족 듀믈레를 처치하기 위한 작전을 짜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 마족은 리슈아를 두 번이나 납치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세르미네가 가까스로 구출해냈지만, 리슈아가 크게 상처 입은 적도 있었다.
그런 마족이 마침 다시 한 번 지구를 노리고 왔기에, 세르미네는 작정하고 그를 없애려 했었다.
영상 속이지만 움직이는 전생의 리슈아를 보니 세르미네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잘 들어. 적은 북쪽과 남쪽, 두 성에 무리를 나누고 우리를 교란하고 있어. 물론 잔챙이가 모인 반대쪽도 처치해야 하지만, 공격력이 높은 정예 기사들은 그를 직접 처치해야 해.]
영상 속 세르미네의 말이었다. 그곳에는 루아를 비롯한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세르미네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마이데가 의견을 냈다.
[그럼 우선 나와 세르미네, 그리고 리레시아가 그 녀석을 처치하는 걸로 하지. 리슈아와 치르티티샤는 잔챙이들을 부탁한다.]
치르티티샤의 공격력도 강하고, 리슈아도 결코 약하지는 않았기에 고위 마족과 마주치는 일만 없다면 두 사람만 보내도 충분할 거라 세르미네 또한 판단했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였다.
[자, 그럼 어디에 문제의 그 녀석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마 그는 남쪽 성에 있지 않을까요?]
침묵을 깨고 치르티티샤가 말문을 열었다. 영상 속의 모두가 그를 돌아보자, 치르티티샤는 당연하다는 듯 펼쳐져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의미가 있는 곳에 숨는 것이 그런 자들의 특징이죠. 남쪽 성에는 비운의 사랑 끝에 죽은 연인의 전설이 있어요. 반면, 북쪽 성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곳이죠.]
폴라로이아는 그 부분이 끝나자 달칵, 하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루아가 세르미네, 그리고 마이데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세르미네는 곰곰이 생각하다 아, 하고 비명 같은 탄성을 질렀다.
듀믈레가 리슈아에게 집착한 이유, 그것은 비뚤어진 애정이었다. 물론 마족인 듀믈레가 왜 리슈아를 좋아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 때문에 리슈아는 호된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세르미네와 처음 기사가 된 마이데, 그리고 루아뿐이었다.
후에 기사가 된 세 사람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치르티티샤가 사랑 운운하는 말을 하다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연찮게도 리슈아는 치르티티샤와 동행했지요. 세르미네, 당신이 그 마족에게 갔을 때 치르티티샤를 보았습니까?”
루아는 다시 한 번 예리하게 물었다. 그리고 세르미네는 그 말에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리슈아는 그 치가 떨리는 마족에게 잡아먹혔지만, 치르티티샤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다못해 마족에게 당했다고 한다면 어딘가에 쓰러져있어야 했건만, 그는 나중에 와서는 길을 잘못 들어 중간에 리슈아와 갈라졌다고 전했었다.
당시에는 듀믈레를 처치해야 한다는 집념과 리슈아가 죽은 충격으로 인해 앞뒤 상황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 복수심에 사로잡혀 마족을 처치한 세르미네는 지금에 와서야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컵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차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가 테이블을 내리친 것은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세르미네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치르티티샤라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든 목적을 달성하려 했을 겁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한참 만에 루아가 겨우 위로를 건넸다. 그녀로서는 보기 드문, 나름의 다정함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리레시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세르미네 님의 탓이 아니에요. 어쨌든 지금은 모든 것이 좋게 흘러갔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요.”
“그래서 말인데, 우연을 자꾸 만들어내는 건 과연 누굴까?”
난데없는 마이데의 말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사실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환생할 리 없는 기사의 이례적인 환생부터 시작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가 리슈아인 만큼 모두에게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 세르미네나 마이데에게는 오히려 천운이었다.
그러나 동거를 시작하며 겪은 이상한 일들, 그리고 치르티티샤가 언급한 ‘그분’까지…. 풀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루아, ‘그분’에 대해 조사한 건 있어?”
리레시아가 차를 홀짝, 마시고는 루아를 향해 물었다. 세르미네도 그 점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치르티티샤의 배후에 있던 자, 수호석도 마음대로 개조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존재에 대해 그들은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존재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언제까지나 ‘그분’이라고 칭할 수는 없으니, 마족보다 위에 있는 존재인 ‘마신’으로 칭하면 어떨지 싶습니다.”
“마신이라….”
이의는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존재인데다가 십중팔구 이쪽에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기에, 루아가 제안한 호칭이 가장 적합하다고 모두 판단했다.
“그래. 그 마신이 참 큰일이야. 마족의 위에서 조종하고 있는 자라면, 언젠가는 쓰러뜨려야 하지 않겠어?”
마이데의 말에 리레시아가 주먹을 쥐며 힘차게 말을 받았다.
“마신 따위도 삼위일체의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지!”
자신만만한 리레시아와는 달리 세르미네는 그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수하에게 힘을 빌려준 것만으로도 별 하나를 없애버리는 존재를, 그리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번 일만 해도, 만일 가연이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구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을 테고, 자신들은 갈 곳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쓴 말도 안 되는 힘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사라진 존재를 전부 되살려놓는 것이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상식에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루아. 리슈아가 쓴 힘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없어진 지구의 시간을 되돌려 별과 생명들을 다시 되살리는 한편, 적이었던 치르티티샤와 두 고위 마족의 시간은 배제했지요. 게다가 기사들의 기억은 살리고, 인간들의 기억은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위성에 찍힌 자료로 판단하건대…,”
루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미간을 약간 좁히고 말을 고르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우라노스 폐하 그 이상의 힘입니다.”
“뭐?”
다들 일제히 입을 모아 놀람의 탄성을 내뱉었다. 이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란티스의 유일한 왕, 우라노스는 괜히 옥좌만 꿰차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힘은 열두 정예 기사들을 훨씬 능가했으며, 삼위일체에 버금가는 힘을 단신으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리슈아가 그의 후계자였다지만, 수호석의 선택을 받기 전의 리슈아는 전투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렇다 할 힘도, 치유 능력조차도 없이 그저 착한 성품만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슈아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자연히 의문이 피어났다. 우라노스는 왕비를 두지 않았다. 자연히 후비도 없었으며, 절대 사생아를 만들 성품이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소년을 데려와 자신의 후계자라며, 왕족의 대우를 할 것을 명한 것이 리슈아가 처음 아틀란티스에 얼굴을 비친 순간이었다.
“이봐, 리슈아 저 녀석…, 혹시 위험한 존재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
리레시아가 직설적으로 루아에게 물었다. 세르미네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루아가 한발 앞서 그를 제지하듯 말을 꺼냈다.
“멸망 전의 아틀란티스에 대해 모르시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리슈아는 아틀란티스의 지배자, 우라노스 왕이 직접 후계자로 임명한 자입니다. 리슈아가 가진 힘은 확실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급한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
리레시아는 루아의 단호한 대답과 세르미네의 눈총을 받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세르미네는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마이데 또한 그리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이에 낀 리레시아는 세르미네를 흘긋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물론 루아와 폴라로이아는 늘 그렇듯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때였다.
“아이고, 너무 잤나. 허리가 아프네…. 어?”
닫혀있던 세르미네의 방문이 열리고 가연이 느리게 걸어 나왔다. 그는 한 손으로는 허리를 매만지고, 한 손으로는 덜 떠진 눈을 비비다가 거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 다들 여기에 있어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가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연아, 일어났구나. 다행이야.”
세르미네가 얼른 일어나 가연의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자신의 옆으로 데려왔다. 리레시아가 도끼눈을 하고 가연을 노려보았지만, 세르미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연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어? 저, 저는 대체 얼마나 잔 거예요?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모든 게 다 사라지고 우주에서 떠다니다가… 어?”
가연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 갑자기 세르미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에게서 대답을 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맞은편에 앉아있는 루아의 물음에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부르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그 다음은… 어? 저게 뭐지?”
세르미네를 바라보다 그 어깨 너머, 통유리로 된 발코니 창문을 보던 가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