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섬광처럼 터진 빛은 일대의 어둠을 빠르게 잠식했다. 이미 적은 치르티티샤만 남은 상황이었다. 얼음 기둥에 갇혔던 수많은 적들은 빛에 녹아 존재했던 흔적조차 사라졌다.
너무나 강한 빛에 세르미네는 리슈아의 모습도, 마이데도, 그리고 자신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위협적인 빛은 아니었다. 분명 그 안에는 자신과, 다른 두 사람의 힘이, 그리고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믿을 뿐이었다.
[네놈들!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로, 네놈들만큼은…, 길동무로 데려가마!]
치르티티샤 역시 커다란 입을 벌리고 그 안에서 깊은 어둠을 쏘아냈다. 제 몸을 깎아서 만든, 질척하고 기분 나쁜 어둠이었다.
빛과 어둠, 두 힘은 중간에서 맞부딪혔다. 서로 한 치도 밀려나지 않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힘이었다.
‘그분’이라 칭하는 누군가에게서 힘을 받은 치르티티샤는 세 사람을 상대로도 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노란 눈동자를 감싸는 흰자위에서 핏줄이 터져 눈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힘을 토해내는 입 속의 송곳니들이 갈라져 나갈 정도로 그는 온 힘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물은 말라 나오지 않았고, 끝을 예감한 그의 길쭉한 동공은 공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실패로 끝난 절망적인 복수 속에서, 치르티티샤는 오로지 리슈아를 향한 증오로 버티고 있었다.
세르미네 역시 그동안 치르티티샤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 때문에 자신과 리슈아가 얼마나 아파해야 했는지, 자책해야 했는지, 후회해야 했는지. 아마 그 시간은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없을 터였다. 심지어 마이데조차 그 심정의 반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운 좋게 리슈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치르티티샤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었다. 이 일격으로 질긴 악연을 끝내야만 했다.
아마도 그게 치르티티샤를 위한 길이겠지, 하는 어쭙잖은 동정심 또한 섞여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단 하나의 논리, 한 가지의 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치르티티샤가 아무리 독기를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지만, 그동안 보여준 모든 호의를 전부 짓밟듯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건 역시 리슈아의 마음이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자신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르미네는 그리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삼위일체의 힘을 통해 리슈아의 감정,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마이데도 같은 마음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앙에 선 가연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기적은 그곳에서부터 일어났다. 세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 되자 빛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온 우주를 집어삼킬 듯 퍼져나가는 빛은 치르티티샤가 뱉고 있는 어둠을 뚫고 그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세르미네는 미간을 좁히고는 눈을 치켜떴다. 그의 거센 함성이 귀를 때릴 듯 울려 퍼졌다.
“치르티티샤! 이제 끝이다!”
마치 우주가 처음 탄생할 때와 같은, 눈부신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마이데도, 리슈아도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렸지만, 세르미네는 끝까지 치르티티샤를 주시했다. 그가 가진 힘의 속성이 빛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안 돼…! 나의 원한이…, 이렇게 간단히…!]
그 한마디를 남기고 치르티티샤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육신은 물론 혼조차 남지 않았다. 치르티티샤가 존재했었던 흔적은 이제 그들의 기억과, 역사서의 어딘가에 적힌 몇 줄이 전부였다.
치르티티샤의 소멸과 함께 눈부시게 터져 나왔던 빛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힘을 전부 소진한 세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이봐, 세르미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을 지지하고 끌어당기는 대지가 없었다. 자연히 주저앉기는커녕 앉은 자세 그대로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어둠 속에서 점점이 빛나는 별, 여느 때보다 가까이, 공포까지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달.
“여긴 우주인가?”
“세르미네, 무, 무서워요!”
가연이 세르미네의 옷자락을 꽉 잡으려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무중력 공간에서의 훈련이나 생활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그나마 인간을 초월한 기사의 힘이 있어 우주에서도 숨을 쉬고,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가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치르티티샤가 변한 모습을 보고도 이 정도로는 겁먹지 않은 가연이었다. 발 디딜 곳도 없는 끝없는 심연. 우주는 항상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감탄만 자아내는 곳은 아니었다.
“괜찮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세르미네는 애써 가연을 달래려 했다. 마이데 또한 헤엄치는 시늉을 하며 가연의 옆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가 바다에서 능숙하게 헤엄치는 것처럼 빠르고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래.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게. 가연이는 걱정하지 마.”
“그렇지만….”
가연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 세르미네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갈 곳이 없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돌아갈 아틀란티스 대륙도, 한국의 아파트도 없었다.
승리 뒤에 남는 것이 이토록 사무치는 허무함이라니, 세르미네는 경험한 적 없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아마 치르티티샤가 이겼더라도 똑같았을 것이었다. 차쿤탈 왕국은 멸망한 지 오래였다. 그가 이겨서 아틀란티스의 기사를 전부 없앴다 하더라도, 돌아갈 곳은 없었다.
‘싸움이란 본디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나?’
난생처음, 세르미네에게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마치 모래에 쓰인 글귀를 지우듯 생각을 슥슥 털어냈다.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하면 좋지?’
이대로 세 사람이 달이나 다른 행성에 정착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명이 있는 별이 근처에 있을 리도 없었다.
“세르미네?”
가연이 갑자기 세르미네를 올려다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에 빠져있던 세르미네는 그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가연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지?”
“방금 세르미네가 절 불렀어요?”
가연이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세르미네는 무슨 말인가 의아했다. 당연히 자신은 생각에 골몰해 있느라 가연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나는 아니다.”
“이상하네. 그럼 마이데가 절 부른 거예요?”
세르미네가 고개를 젓자, 가연은 마이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마이데 역시 부정의 뜻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야 물론 네 이름은 불러도, 불러도 모자라지만, 지금은 부르지 않았어.”
세르미네는 눈을 치켜떴다. 이 와중에도 여유를 부리는 마이데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지금 피어오르는 불안과 짜증이 괜히 마이데에게 튈 수도 있었다. 세르미네는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대책을 계속 생각하려 했다.
“세르미네, 세르미네.”
잠시 뒤, 가연이 한 번 더 세르미네를 불렀다. 조금 전의 짜증을 얼굴에서 싹 지운 세르미네는 가연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왜 그러지?”
“역시 누가 절 부르고 있어요.”
“그게 무슨…, 너…!”
가연이 또다시 허튼소리를 한다 싶어 가볍게 받아넘기려던 세르미네는 깜짝 놀랐다. 가연의 눈동자가 일순, 눈부신 황금빛으로 번쩍였다가 다시 연한 파란색으로 돌아온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르미네? 무슨 일 있어요?”
가연이 눈을 깜박깜박하며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어디를 봐도 평소의 가연이 지니고 있던 눈동자 색이었다.
‘잘못 봤나….’
세르미네는 너무 깊이 생각에 골몰해있던 탓에 잘못 본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있는 마이데 또한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변은 끝나지 않았다.
[회색의 순례자, 돌고 도는 톱니바퀴…. 답은 멀리 있는가, 가까이 있는가….]
세르미네의 귀에 아득히, 마치 벽을 하나 두고 나는 소리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마이데, 너도 방금 목소리를 들었나?”
그러나 마이데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리고 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 저기, 저기를 봐.”
그가 시선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연의 몸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상의 온갖 빛깔을 섞어놓은 듯 일렁이는 기운을 몸에 두른 가연이 천천히 일어섰다. 무중력 공간에서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가연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세르미네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듯 가연의 눈동자는 불타오르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연아, 너 무슨…. 가연아, 정신 차려!”
세르미네가 일어서 가연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겨우 뻗은 손끝은 가연을 뒤덮은 찬란한 기운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마이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가연을 깨워보려 소리도 쳐보고, 필사적으로 가연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마이데 역시 세르미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결과였다. 손길도, 목소리도 전부 허공에서 맴돌 뿐 가연에게 닿지 못했다.
검은 우주와 점점이 빛나는 별들을 배경으로 더욱 기이함을 자아내는 모습의 가연이 손에 자신의 무기를 불러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긴 낫이었지만, 가연의 몸에 둘러진 기운이 무기에도 스며들자 마치 성물과도 같은 광채를 발했다.
“저게 대체 무슨…!”
세르미네가 감탄 섞인 의문을 토해내는 동안 마이데는 그저 홀린 듯 벙하니 가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가연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감히 부르는 것조차 입이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가연이 입을 열었다. 표정 없는 새하얀 얼굴에 평소와 다름없는 약간 낮은 소년의 목소리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한번 되감으리니, 에오스여, 길을 열어라. 헬리오스여, 마차를 끌어라. 셀레네여, 장막을 드리워라!”
그리고 가연이 낫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발밑으로 고대의 숫자가 새겨진 커다란 금색 시계가 마법진처럼 그려졌다. 멈춰있던 시계는 가연의 말에 조금씩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이베여, 다시 한번 빛을! 닉스여, 다시금 안식을! 크로노스여, 당신의 권능을 다시 이 땅에 내리소서!”
그리고 모든 것이 금색 빛에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