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세르미네, 저것들도 마족인가요? 싸워야 하는 거죠?"
옥수수 인간 군대를 본 가연이 세르미네의 뒤에서 나와 무기를 붙잡았다. 적의 수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태의 심각함을 은연중에 짐작한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이 기특했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맞붙을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빈 어둠 속에 발을 디디고 걸어올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하급 마족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리슈아, 일단 물러서 있어. 내가 신호를 보내면 수호석의 힘을 개방해."
치르티티샤가 듣지 않도록 세르미네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몸을 뒤로 돌려 허리를 약간 숙이고, 가연의 귓가에 숨이 닿을 듯 말듯 속삭이자 가연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아, 알겠어요. 세르미네 말대로 해볼게요!"
가연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세르미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도리어 이런 밀담을 나누는 듯한 모습이 치르티티샤를 교란하기 쉽겠다는 결론을 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좋은 작전이 머릿속을 반짝, 하고 밝혔다.
세르미네는 손을 뒤로 뻗어 가연의 손을 잡고 그의 몸을 자신에게 더욱 가까이 잡아당겼다.
차라리 전투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저 행복하기만 했을 텐데, 아쉬움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이냐. 포기한 게냐? 마지막으로 밀회라도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치르티티샤의 비웃음에 마이데가 고개를 돌려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무얼 하는 건가 의아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시선이 세르미네와 마주쳤다.
“너희 대체 무엇을….”
마이데가 말을 꺼내려 하자, 세르미네는 그를 향해 눈꼬리를 약간 올려 보였다. 그래도 전투 경험이 많은 마이데라면 자신이 허튼 일을 하지 않을 걸 알아채 줄 거라 믿고 있었다. 이번 일로 또다시 신경전이 벌어지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예상대로 마이데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전부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마이데는 일단 그들의 작전에 편승하기로 결심했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겁먹고 포기한 모양이구나, 세르미네! 그럼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 뒤 리슈아를 데려가야겠어!”
마이데는 위협적으로 도끼를 한 바퀴 공중에서 돌린 후, 얼마 남지 않은 콘크리트 바닥에 중앙의 뾰족한 장식을 푹, 꽂았다. 바닥이 깨지긴 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이 전부 붕괴되지는 않았다.
“물의 수호룡이여! 이 자리에 얼음의 꽃을 피워라!”
평소보다 한층 격양된 어조로 마이데가 외쳤다.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었지만, 아마도 그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마이데가 꽂았던 도끼를 빼내자, 그 자리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얼음 기둥이 조금씩 돋아났다. 마치 꽃잎처럼 여섯 개의 기둥이 둥글게 솟더니, 이내 아래로, 아래로 겹겹이 기둥이 여럿 생겼다. 마치 연꽃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마이데는 얼음의 꽃을 지지대로 쓸 생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좁은 콘크리트 바닥보다는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꽃이었지만, 주인인 마이데에게만큼은 미끄럽지 않아 지지대로 충분했다.
얼음의 꽃이 충분히 커지자 마이데는 뛰어올라 꽃의 중심을 밟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옥수수 인간 군대가 훤히 보일 만큼 높이 떠오르자 그는 도끼를 옆으로 붙잡고 공중에 횡으로 그었다. 서슬 퍼런 빛이 번뜩이고, 그 자리에 얼음으로 된 크고 작은 칼날이 수십 개 생겨났다.
“가라!”
마이데는 얼음 칼날을 쏘아 보내고는 얼음꽃으로 낙하해 착지했다. 그리고는 몸을 90도 틀어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뛰어올라 칼날을 쏘아 보내길 반복했다. 그로서는 최선의 원거리 공격이었다.
제대로 조준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얼음 칼날을 날리긴 했지만, 마이데의 목적은 칼날로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한 번에 치명상을 입히고 없애면 가장 좋긴 했지만, 모든 적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 옥수수 인간의 어느 부분이든, 칼날이 명중하면 그들의 온몸을 물로 휘감고 이내 꽁꽁 얼려버렸다. 아무리 옥수수 인간들이 치르티티샤의 힘을 받아 허공에 발을 디딜 수 있다지만, 단단한 땅에 서 있는 것만큼 견고하지는 못했다. 얼어버린 몸 때문에 무게가 크게 늘어나자, 그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어둠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마이데는 멈출 줄을 몰랐다. 기사들 중에서 가장 힘과 체력이 좋은 그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덕분에 끝없이 몰려올 것만 같던 적의 수도 상당히 줄었다.
하지만 마이데가 다가오는 모든 적을 혼자 해치울 수는 없었다. 가연은 자신과 세르미네에게도 적이 다가오자 당황해 세르미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세르미네, 우리도 적을 해치워야….”
가연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입술에 거친 살결이 느껴지자 가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세르미네의 손을 자신의 두 팔로 잡고 눈만 깜박거렸다.
“지금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아. 때가 언제인진 너도 알 테니, 그때까지 뒤에서 보조 공격만 해.”
가연은 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 보라색 앞머리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을 세르미네는 손가락으로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마이데가 채 미처 보지 못한 방향을 향해 날개를 폈다.
“치르티티샤, 네가 바라는 대로 함께 나락으로 가도록 하자!”
세르미네는 눈동자만을 굴리며 사태를 주시하는 치르티티샤를 향해 고개를 들고 외쳤다. 그는 검을 들어 치르티티샤를 한 번 향한 후, 무기를 활로 바꾸더니 적을 향해 한 발씩 쏘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이냐! 그래봐야 소용없다!]
치르티티샤는 주변에 미치는 자신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세르미네는 마치 날개를 강한 덩굴로 옭죄는 느낌이 들었지만, 끝까지 버텨보겠노라 마음먹었다.
“이런, 난 아예 뛰어오를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마이데가 얼음꽃의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르미네를 속박한 치르티티샤의 힘이 마이데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데는 당황하지 않고 얼음꽃 한가운데에 서서 시야에 닿는 모든 적을 칼날로 처리했다. 오로지 세르미네에게 질 수 없다는 일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미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르미네, 무리하지 말고 내려와요! 저에게 좋은 수가…!”
세르미네를 향해 가연이 손짓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하려던 세르미네는 뒷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날개를 접고 가연의 옆으로 내려왔다.
“안 돼.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마치 포기한 것처럼 연기하는 중에 가연이 좋은 수가 있다고 외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가 있었다. 역시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세르미네는 가연을 등 뒤에 숨기려 했다.
그러나 얼음꽃에서 뛰어올라 두 사람 옆의 좁은 공간에 내려선 마이데는 다른 생각이었다.
“아냐. 이제는 결판을 지을 때가 온 거 같아. 세르미네, 너도 알잖아.”
“뭐라고?”
세르미네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그리고 그때, 가연이 세르미네의 뒤에서 튀어나와 무기를 앞으로 향하게 하고는 크게 외쳤다.
“어둠의 수호룡이여! 무에서 유를, 우리에게 대지의 축복을 내려라!”
“리슈아, 뭐, 뭐 하는…!”
세르미네가 채 말리기도 전에 가연의 낫 끝에서 검고 윤기 나는 비늘을 가진 어둠의 수호룡이 나타났다. 그는 옥수수 인간 사이를 뚫고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까지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날아간 자리, 옥수수 인간이 디디고 서 있는 허공에 검은 격자무늬가 생겼다. 촘촘한 그물 같은 그 무늬는 수호룡이 날아간 거리만큼, 끝없이 펼쳐졌다.
세르미네는 그제야 알았다. 삼위일체의 힘을 다시금 발동할 때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삼위일체의 힘이라고 해도, 이건 지나치게….’
그리고 이번에는 마이데가 도끼를 다시 한 번 내리찍었다. 덕분에 콘크리트 바닥이 거의 두 쪽이 났지만, 그 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의 수호룡이여! 이번에는 얼음의 꽃밭을 피워낼 시간이다!”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났다. 옥수수 인간 군대도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격자무늬 바닥 곳곳에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얼음꽃이 마이데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얼음 기둥이 중심에서 자라나 적을 전부 찌르고, 가두었다.
이것이 만약 진짜 꽃이 피어난 것이었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축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며 자라난 얼음 기둥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적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본 치르티티샤는 탄식했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될 줄 예상했지만, 네 녀석들을 데려가지 못한다니…!]
그러더니 치르티티샤는 노란 눈동자를 크게 부릅뜨고 무섭게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그 힘으로 나를 없앤다 한들 너희는 돌아갈 곳도 없으리라!]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아가지 않고 멈춰있을 수는 없다!”
세르미네는 검 끝을 치스티티샤에게 겨눴다. 하얀 검신에 더욱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하얀 빛이 검 손잡이를 타고 올라 검의 끝에서 환하게 터졌다.
그는 힘을 한계까지 쥐어 짜냈다. 여기서 치르티티샤를 일격에 없앨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아껴선 안 됐지만, 세르미네의 마음 어딘가에는 ‘이제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으니 모든 걸 다 털어버리겠다’는 체념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것은 가연이었다.
“세르미네, 포기하면 안 돼요!”
가연이 검을 잡은 세르미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세르미네는 가연의 손을 자신의 손등으로 느끼면서 적잖이 놀랐다.
여리기만 할 줄 알았던 손은 생각보다 거칠고,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그리고 때로는 남모르게 훈련을 해 온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세르미네는 깨달았다. 아직 지켜야 할 것은 남아 있었다. 가연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훌륭하게 성장했건만, 자신이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리슈아를 지켜야 했다. 설령 세상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래. 포기하면 안 되지. 나도 힘을 보태줄게!”
어느 틈엔가 두 사람 곁으로 넘어온 마이데 역시 리슈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세르미네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세르미네가 가진 빛의 힘 위에 리슈아의 어둠과 마이데의 물이 가진 힘이 겹쳐졌다. 하얗게, 그리고 때로는 검게, 뒤이어 푸르게 빛나는 검은 이제 처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힘은 단순히 배로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곱절, 아니 그 이상의 힘이었다. 카스토르를 없애기 위해 발동한 삼위일체의 힘보다 훨씬 눈부시고, 또한 강력했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일제히 입을 모아 외쳤다.
“위대한 신, 생명의 창조자, 가장 아름다운 뱀의 화신 케찰코아틀이여! 그릇된 자를 없애고 이곳에 다시 한번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