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49화 (49/87)

49화

“또 뱀이군. 이제는 넌더리가 나.”

세르미네는 강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에게서 리슈아를 빼앗기 위해 온 것들이 전부 뱀과 관련이 있다니,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투지가 타올랐다. 그는 지긋지긋한 뱀과의 악연을 여기서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치르티티샤는 긴 목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내밀기를 반복하며 세르미네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가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세르미네…. 당신에게 원한은 없지만…, 나의, 내 나라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걸 없애버리겠다!]

치르티티샤가 뱀의 무거운 꼬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채 공격을 날리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꼬리를 내리쳐 주변의 땅을 울리게 했다.

“젠장,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겠군!”

흔들리는 땅의 충격이 오기 직전 세르미네는 가연의 허리를 잡고 풀쩍 뛰어 공격을 피했다. 충격파가 가라앉을 때쯤 담벼락 위의 좁은 공간에 내려선 그는 가연에게 당부했다.

“저 녀석은 나와 마이데에게 맡기고 넌 몸을 피하는 데 집중해.”

“왜죠? 치르티티샤 씨는 저에게 원한이 있다고 했어요. 오해를 풀어야만 해요!”

기억이 없는 가연은 대화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치르티티샤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 저 녀석은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 게다가 뭐가 되었든 리슈아, 과거의 너를 죽인 원흉이라면 나도 용서할 수가 없어.”

세르미네와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피했다가 맞은편 집의 발코니에 착지한 마이데가 말했다.

그 역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제의 그 날, 치르티티샤가 모두에게 작전을 제안하던 그곳에 마이데 또한 있었다. 그것이 전부 리슈아를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에게 아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다오. 너를 또 잃으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다.”

세르미네가 간곡히 말했다. 그로서는 보기 힘든, 부탁을 넘어 거의 애원하는 어조였다.

가연은 결국 자신의 의견을 접어야만 했다.

“알겠어요. 저 대신 치르티티샤 씨와 생긴 오해를 풀어주세요.”

[오해라고? 또 그 순진한 척, 착한 척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치르티티샤가 신랄하게 가연을 비난했다.

[다들 그렇지. 그 녀석에게 꼼짝도 못하고, 인간의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고. 내 동생이었던 우후츨로도 똑같았다.]

“무슨 헛소리냐! 말이 많다!”

듣다 못한 마이데가 치르티티샤의 꼬리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날카롭게 선 날이 호를 그릴 때마다 푸른빛을 번쩍였다. 조금 전 사용한 삼위일체의 힘 때문에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끼의 위력은 매서웠다. 저렇게 큰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뛰어다니니, 하급 마족 정도였다면 이미 숨을 거두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격이 달랐다. 무슨 힘을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지금 거의 고위 마족에 준하는 상태였다. 삼위일체의 힘을 다시 한번 사용한다면 승산이 있겠지만, 그들의 상태는 아직 썩 좋지 못했다.

치르티티샤의 꼬리와 마이데가 서로 쫓고 쫓기는 전투를 벌였다. 마이데의 도끼가 번쩍일 때마다 치르티티샤의 꼬리는 공기를 날카롭게 찢으며 격렬히 움직였고, 때로는 목표를 찾아 매섭게 바닥을 내리쳤다.

[우후츨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동생이었다. 저 간악한 리슈아의 꾐에 넘어가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만 멍청한 녀석….]

“헛소리하지 마라! 리슈아가 네 나라에 무슨 악감정이 있었겠나! 멋대로 착각하고 괜한 사람을 죽이다니!”

틈을 노리던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의 목을 노렸다. 뱀의 꼬리를 노려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둘이서 달려들면 뭐가 달라질 줄 아느냐! 내 원한은 너희 모두가 달려들어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세르미네의 검이 급소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치르티티샤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오히려 세르미네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런 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면 여유가 없는 모양이군."

마이데도 똑같은 심정인지 한숨 돌리며 치르티티샤를 노려보았다.

세르미네는 다시 한번 삼위일체의 힘을 써서 치르티티샤를 없앨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아직 채 절반도 회복되지 않은 그들의 힘으로는 삼위일체의 힘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라, 가증스러운 리슈아! 너만큼은 내 몸을 불살라 길동무로 데려가야겠다!]

치르티티샤의 벌린 주둥이에 키이, 하는 소리와 함께 차츰 힘이 모였다. 목표는 다름 아닌 가연이 숨어있는 인근 주택의 낮은 기둥이었다.

"그렇게는 두지 않는다!"

연한 노란색의 에너지포가 치르티티샤의 입에서 직선으로 쏘아졌다. 세르미네는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검으로 에너지포를 막아냈다.

"세르미네! 저도 같이 막을게요!"

세르미네의 뒤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가연이 그의 옆에서 검은 방어막을 펼쳤다. 공격을 막는 것은 수월해졌지만,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다소 거칠게 외쳤다.

“안 돼! 넌 숨어있어! 네게 괜한 죄책감을 심어주는 게 저 녀석이 바라는 바야!”

[후, 후후후…, 하하하하하…!!]

치르티티샤는 쏘아 보내던 에너지포를 끊고 몸을 틀며 웃었다.

[그래. 죄책감. 좋은 단어지. 네가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걸 내가 얼마나 바라왔는지 모를 거다!]

치르티티샤의 가는 동공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세 사람을 견제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세르미네, 당신이 그랬지. 리슈아가 내 나라에 무슨 원한이 있겠냐고 말이야. 그래, 원한은 없었겠지. 하지만 리슈아가 내 동생 우후츨로를 현혹했기 때문에 내 나라는 멸망했다!]

“말이 많다! 기회는 지금뿐!”

마이데가 치르티티샤의 뒤통수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도끼가 치르티티샤의 검고 둥근 머리를 가르려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검고 진득한 기운이 치르티티샤의 몸을 감싸더니 마이데를 멀리 밀쳐냈다. 마치 방해하지 말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큭, 저 녀석이…!”

마이데를 밀어낸 치르티티샤는 가연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내 나라와 주변 나라들은 서로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공격을 하지 않으면 남는 건 멸망뿐이었지.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온 백성을 노예나 제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의 왕족과 전사들이 앞서서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리슈아, 네 녀석이 제2왕자라는 위치의 우후츨로에게 이렇게 말한 거야.

‘전쟁은 좋지 않아. 서로 싸우면 안 돼.’라고 말이지.]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의 말을 막기 위해 마이데처럼 달려들었지만, 역시 검은 기운에 가로막혀 튕겨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리슈아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저러는 건가? 아니면….’

긁힌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다른 한 손으로 닦으며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를 노려보았다.

[세르미네, 당신도 알지 않나? 기사가 손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지? 결국 이 별은 마족의 손에 멸망할 것이다.

우리도 똑같았을 뿐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잔혹함을 논하기 이전에 살아야 했다. 그런데 우후츨로는 리슈아의 말대로 주장을 한 것이야. 전쟁을 하지 말고, 내실을 더욱 다지자고 말이다.

당연히 나는 반대했다. 하지만 나태한 귀족들 일부는 점차 우후츨로의 편에 돌아섰어. 차쿤탈 왕국은 충분히 강하니, 방어를 하고 속국에서 제물만 가져와도 충분하다고 말이야. 그들도 전쟁보다는 놀고 마시는 일이 더욱 즐거웠겠지.]

그제야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분열된 나라는 외세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다.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접근했을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치르티티샤는 리슈아를 죽이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던 것이었다. 세르미네가 그때 느낀 기시감의 정체는 바로 숨기고 있는 살의, 그것이었다.

[내 나라는 멸망했어! 나 외에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내 편이었던 신하들, 시종들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나 혼자 살아서 복수를 꿈꿨지! 모든 일의 원흉, 리슈아를 죽이기로 말이야!]

치르티티샤의 격양된 목소리가 마치 산이 울리는 것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충격파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을 안전하게 뒤에 숨기고는 검을 사용해 방어막을 펼쳤다.

[네 녀석도 맛보아야 해, 리슈아. 나의 악몽을…, 매일 밤마다 지독하게 꾸는 그 악몽을 너에게 선사하지!]

충격파가 멈추고, 치르티티샤가 긴 몸을 휘리릭, 틀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마이데와 세르미네, 그리고 가연 주위를 크게 세 바퀴 선회했다.

“뭐, 뭐야?”

당황한 마이데가 도끼를 들어 치르티티샤에게 던지려는데, 갑자기 치르티티샤의 검고 긴 몸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거대한 뱀의 형상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자, 일대에는 적막이 흘렀다. 치르티티샤의 사념 같은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세르미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심해, 아직 적은 죽지 않았어!”

세르미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하늘에 짙게 드리운 구름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구름 너머 보이는 하늘은 어두웠다. 밤보다도 더욱 짙은 색의,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자아내는 심흑의 하늘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갑자기 쑥, 내려왔다. 가연이 너무 놀라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세르미네의 귀여 들려왔다. 실로 기괴한 형상이었다.

하늘에 또아리를 튼 치르티티샤는 고개를 빼 세르미네와 마이데, 그리고 뒤에 숨은 가연을 보았다. 사람 셋은 거뜬히 세울 수 있을 만한 거대하고 노란 눈이 또륵또륵 움직였다.

이내, 치르티티샤는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가늘고 긴 혀를 날름거렸다.

[재림하라! 아흐 푸치의 신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