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옥상 계단을 올라온 치르티티샤는 남아 있던 세르미네와 가연, 그리고 마이데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보았다.
“치르티티샤? 너 어디 갔었어? 고위 마족이 나왔던 건 알고 있어?”
마이데가 한 걸음 나서며 묻는 것을 세르미네가 한 팔로 가로막았다.
“너….”
세르미네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치르티티샤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세르미네의 발밑으로 던졌다. 그리곤 이제껏 본 적 없는, 비웃음과 화가 동시에 담긴 어조로 말했다.
“이게 당신에게 내놓는 첫 번째 대답이죠.”
세르미네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발끝에 멈춰선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호박석이 박힌 단도였다. 세르미네는 가죽 검집에 들어있는 단도를 주워들었다.
“역시 그 유적은 너와 관계가 있었군.”
세르미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그의 발밑에서 올라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세르미네, 무슨 소리야? 치르티티샤, 너희 무슨 일 있었어?”
옆에서 마이데가 끼어들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치르티티샤였다.
“그 단도를 보고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니, 역시 당신들에게 그때의 일은 스쳐 지나가는 하찮은 일에 불과했군요.”
그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체념한 듯도 보였다. 하지만 세르미네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힘이 실려있었다.
그 안의 감정은 ‘혐오’, 그 자체였다.
“넌 누구지? 설마 마족 편에 선 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세르미네가 물었다. 마족이 변신한 모습이었다면 애초에 수호룡이 그를 기사로 택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럴 리는 없었다. 결국 배신을 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세르미네는 그 단어를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 말을 일부러 빙 돌렸다.
“이제 와서 숨길 생각은 없으니 다 말하도록 하죠. 맞아요.”
“뭐?”
치르티티샤의 대답에 먼저 발끈한 것은 마이데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전투 도끼를 손에 불러내 들고는 치르티티샤를 노려보았다.
“그럼 고위 마족이 나타난 중요한 순간에 사라진 것도 설마, 아틀란티스 대륙에 수작을 부리기 위해서냐?!”
마이데의 말에 치르티티샤는 웃었다. 그가 그렇게 신랄하게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큭큭거리며 웃던 치르티티샤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게 그렇게 무서워요? 걱정 말아요. 난 잘나신 아틀란티스 대륙에는 관심 없으니까. 무녀님에게도 해코지는 안 했어요.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치르티티샤의 얼굴이 더욱 진한 분노로 물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대뜸 가연을 가리켰다.
“바로 당신이야. 리슈아.”
“네?”
가연은 치르티티샤가 자신을 가리키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 가연의 앞에 세르미네가 끼어들어 방어막처럼 버티고 서더니 치르티티샤를 향해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치르티티샤는 가연을 노려보다 이내 세르미네에게 시선을 옮겼다. 분노에 찼던 시선은 이제 비웃음으로 물들어있었다.
“여전히 당신 품에 싸고도는군요. 그게 정말 리슈아를 위한 길인가요?”
그러더니 치르티티샤는 시선을 거두고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서성였다.
“그래. 리슈아를 없애기 위해선 딱히 원한도 없는 아틀란티스에 들어가 모두를 교란하고, 당신부터 공략해야 했어, 세르미네. 그렇게 착 달라붙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어?”
“뭘 그렇게 지껄이는 거야! 배신자면 처치하는 수밖에 없지!”
마이데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세르미네가 채 말릴 틈도 없이 나선 그는 도끼로 치르티티샤를 두 동강 내려 했다. 하지만 무기는 치르티티샤의 머리 바로 위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건? 어떻게 네게 이런 힘이?!”
짙은 어둠으로 덮인 방어막이 치르티티샤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리슈아의 어둠과 닮았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전혀 달랐다. 아주 짙고, 기분 나쁜 어둠이었다.
게다가 방어막은 마이데의 공격을 막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멀찌감치, 세르미네의 한참 뒤로 밀어낸 방어막은 그제야 스륵, 하고 사라졌다.
“무, 무슨 이렇게 엄청난…!”
겨우 몸을 일으킨 마이데가 가연을 보호하기 위해 다가왔다. 치르티티샤는 그 모습을 보고 한층 신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 죽인 걸로는 모자라서 되살아나고, 거기다가 갈기갈기 사이를 찢어놓으려 했더니 삼위일체의 힘까지 발휘해? 너희 때문에 마신께서 나를 저버리시고, 나는 갈 곳이 사라졌어!”
“무슨 소리지? 네가 리슈아를 죽였다고?”
이번에는 세르미네가 금세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이제야 안 거예요? 참, 당신도 어쩔 수 없다니까. 당신의 작전을 교란하고, 허위 정보를 퍼뜨려 일부러 리슈아를 다른 성에 보낸 것. 그게 바로 나라는 걸 이제야 알다니 말이야!”
“치르티티샤!”
세르미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이데처럼 달려들었다. 그에게 검을 내리치려 했지만, 다시 한 번 똑같은 방어막이 생겨나 치르티티샤와 세르미네 사이를 막았다.
그나마 세르미네는 뒤로 밀려나지 않고 검을 계속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죄책감, 모든 괴로움이 전부 치르티티샤 탓이었다니. 세르미네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전부 검에 담았다.
‘이 정도면 이따위 방어막도 뚫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어째서!’
“세르미네! 돌아와요! 뭔가 이상해요!”
가연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세르미네는 듣지 않았다. 눈앞의 치르티티샤는 이제 동료가 아니었다.
그의 철천지원수였다.
정작 치르티티샤가 지목한 리슈아, 즉 가연은 기억이 없어 마음에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점을 치르티티샤 또한 알고 있는지 한이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 없는 널 없애봐야 무의미한 살인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 네 각성을 기다리느니, 반쪽짜리 복수라도 해야겠어!”
치르티티샤의 몸은 이제 어둠에 덮여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그제야 가연이 말한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러나려 했지만, 치르티티샤가 선수를 쳤다.
마이데처럼 강한 기운에 나가떨어진 세르미네는 그나마 나동그라지지는 않고, 검을 바닥에 꽂아 균형을 잡았다.
“네가 무슨 복수를 한다고 그러나! 저 착한 리슈아가 무얼 했다고! 내가 함께 있었으니 안다!”
그러자 귀가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어둠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한층 짙어진 어둠 속에서 샛노란 빛이 번뜩였다.
“착하다고?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위선이 불러온 결과를 네가 안다고? 나의 나라, 내가 지배할 나라가 누구 때문에 멸망했는지 안다고?”
다시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드리웠다. 두꺼운 구름에서 검은 물방울이 내려와 치르티티샤의 머리 위에 톡, 떨어졌다. 어둠을 질펀하게 뒤집어쓴 치르티티샤의 몸에 파문이 생기며 그가 바닥에 슥, 녹아들었다.
그리고 숨 하나만큼의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세르미네는 얼른 가연의 허리를 안더니 옆 건물의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그리고는 발판 삼아 안전한 골목으로 착지했다.
“저 녀석, 뭘 어쩔 셈이지?”
“세르미네….”
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르미네를 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일로 치르티티샤가 자신을 질책했으니 아마 많이 혼란스러울 터였다.
“괜찮아. 치르티티샤는 우리가 맡을 테니 가연이는 일단 물러서 있어.”
뒤따라 내려온 마이데가 말하자, 세르미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등을 돌렸다는 걸 안 이상,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맡으마.”
아직도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지만, 공통의 적을 놓고 마이데와 세르미네는 암묵적인 화해를 했다. 리슈아에게 악의를 품고, 심지어 죽게 만든 원흉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은 둘 다 똑같았다.
그들은 상황을 주시했다. 기습을 할 수 없으니, 모습을 감춘 적이 어떻게 나올지 재빠르게 잡아내야 했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르티티샤가 사라진 자리에서 폭발하는 것처럼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하늘을 가르고 높이 솟은 불꽃 속에서 치르티티샤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치르티티샤 타무타타르시 차쿤탈. 차쿤탈 왕국의 제1왕자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 곧 왕이 되었어야 할 몸이다!”
“뭐라고?”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그제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차쿤탈 왕국. 확실히 가 본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계속 직소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듯 앞뒤 기억이 이어졌다. 리슈아와 세르미네는 차쿤탈 왕국에서 제2왕자인 우후츨로 왕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치르티티샤는 분명 그 형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인근에 나타난 중급 마족들을 처치하기 위해 잠시 머문 것뿐이었다. 우후츨로 왕자와 만난 시간도 채 나흘이 되지 않는 데다가, 치르티티샤는 아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왕국의 멸망과 리슈아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진실은 치르티티샤만이 알고 있었고, 세르미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리슈아를 지키는 일뿐이었다.
‘두 번은 잃을 수 없어!’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치르티티샤가 만들어낸 불꽃 기둥을 주시했다.
검은 불꽃 기둥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옅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위대한 창조자 후라칸이여, 구쿠마트여! 불온하고 악한 자들을 멸하고, 다시금 내 왕국을 이 땅에 재림하게 하소서!]
검은 덩어리는 목을 길게 빼냈다. 질척하게 녹아내리는 검은 액체와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두 개의 노란 눈이 번뜩이는 그 형상은 틀림없는 뱀이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짓누르고 일어선 검은 뱀이 세르미네와 마이데 너머, 가연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