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루아의 주문 같은 말과 함께 내려온 기계 수호룡을 세르미네는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루아 또한 수호석을 가진 자임은 알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강림하듯 내려오는 수호룡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크기도 여타 수호룡보다 훨씬 컸지만, 온몸이 아틀란티스에서만 나는 매끈한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신비함과 더불어 기묘한 두려움까지 자아냈다.
수호룡은 루아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갑자기 검푸른 빛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팔과 다리, 목 등 기계 관절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루아의 몸에 달라붙자 기계는 갑옷이 되었다. 하늘하늘한 하얀 드레스는 사라지고, 가죽으로 된 딱 달라붙는 갑옷 위에 보호대처럼 수호룡의 파편이 붙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은 하나로 높이 묶였고, 들고 있던 지팡이는 반으로 갈라져 그녀의 양손에서 단검이 되었다.
“루아, 괜찮겠어?”
단검을 들고 기계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친 루아를 향해 리레시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루아는 우선 힘이 다소 약해진 폴룩스를 노리고 날아갔다. 날카로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바람을 조절하고, 때로는 바람을 뿜어내기도 하며 루아의 의지대로 날아갔다.
루아는 힘보다는 속도 위주의 공격으로 폴룩스의 수많은 눈동자들을 노렸다. 한 번 치고 다시 빠지는 공격 방식은 세르미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루아의 차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서쪽 35도 각도에서 공격.”
후방에서 폴라로이아가 헤드셋에 달린 마이크로 루아에게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루아는 그 말대로 적절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 공격을 피했다.
“북동쪽 13도에 빈틈, 3초 뒤 적의 공격.”
“알겠습니다.”
적이 공격을 개시할 그 3초가 흐르기 전, 루아는 단검으로 폴룩스의 눈동자를 강하게 찌른 뒤 다시 빠져나왔다. 세르미네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루아가 해내니, 그는 놀람과 당황이 뒤섞인 감정을 안고 루아의 전투를 바라볼 뿐이었다.
단검에 찔린 폴룩스의 눈동자는 검게 수축되어 이내 팟, 하고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폴라로이아의 도움을 받아 가며 루아는 눈동자를 두 개, 세 개 연이어 해치워나갔다.
당연히 폴룩스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카스토르가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그는 주위를 더욱 차갑게 식혀가며 검고 무거운 팔을 치켜들었다.
“그렇겐 안 되지!”
가까운 지붕에서 기회만 노리던 리레시아가 얼른 수호룡의 힘을 주먹에 실었다. 그리고는 뛰어올라 카스토르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정면으로 가져다 댔다.
바람이 찢기는 소리가 나며 충격파가 사방에 퍼졌다. 하지만 리레시아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계속 내지른 뒤, 지붕으로 하강했다. 그리고 발돋움을 하며 계속 카스토르와 주먹을 몇십 합 이상 맞댔다.
“어떻게 저런 힘이….”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분명 능력이나 힘만 놓고 본다면 자신과 마이데가 저 세 사람보다 훨씬 우위였다. 그러나 그와 마이데는 부상으로 너덜너덜해져선 겨우 막아내는 데 급급했었다.
하지만 저 세 사람은 달랐다. 개개인은 약해도 셋이 힘을 합치자 고위 마족 둘과도 호각으로 전투가 가능했다.
세르미네는 그제야 루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남색과 붉은빛, 서로 섞일 일이 없이 뚜렷한 개성을 가졌지만, 한데 어우러지니 그 잔광조차 아름다웠다. 그리고 힘 또한 곱절로 강해졌다.
벌써 눈동자의 반가량을 잃은 폴룩스는 갑자기 공격을 멈추더니 카스토르 쪽을 향해 천천히 떠올랐다. 서로 융합해 더욱 강대한 개체가 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되면 싸우는 기사들도 힘들어지지만, 주변이 더욱 심하게 파괴될 터였다.
“지금입니다, 폴라로이아.”
루아의 말에 폴라로이아는 태블릿 PC의 전원을 끄더니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금실과 붉은 실을 꼬아 만든 목걸이의 중앙에는 넘실거리는 물결을 표현한 S자 모양의 녹색 보석이 달려있었다.
“바람의 수호룡이여, 우리를 인도해주기 바랍니다.”
녹색 보석이 폴라로이아의 말에 맞춰 반짝, 하고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에 마치 큰 별의 반짝임처럼 빛이 나타나더니 그 아래로 녹색의 길고 날개 없는 용이 나타났다. 반들거리는 비늘을 가지고, 긴 등에는 회색의 털이 나 있으며 머리 위로 두 개의 뿔이 달린, 좀처럼 보기 힘든 폴라로이아의 수호룡이었다.
“당신 차례입니다. 리레시아.”
그 모습을 본 루아가 이번에는 리레시아를 향했다. 아직도 카스토르를 노려보며 기회를 재던 리레시아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힘차게 외쳤다.
“불의 수호룡이여! 뜨겁게 불타올라라!”
이번에는 리레시아의 주먹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린 방향을 따라 검붉은색의, 피막 날개를 가진 용이 포효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서양에 내려오는 전형적인 용 모습을 하고 있는 리레시아의 수호룡이었다. 크기는 세르미네의 수호룡보다 다소 작았지만, 맹렬함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두 수호룡이 어우러지며 하늘을 돌자, 루아는 자신의 단검을 교차해 수호룡이 맴도는 한가운데로 던졌다.
“나의 수호룡이여, 가십시오! 삼위일체의 힘을!”
루아의 갑옷을 이루고 있던 수호룡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다시 하얀 드레스를 입고 무방비 상태가 된 루아를 남색의 반투명한 막이 감싸 보호했다.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날아간 기계 수호룡은 하늘에서 다시 용의 모습으로 합쳐졌다. 바람의 수호룡, 불의 수호룡과 만난 기계 수호룡은 한데 어우러져 큰 빛을 터뜨렸다.
“저건…. 정말로 삼위일체의 힘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번성하던 시절에도 그리 자주 볼 수 있던 힘은 아니었다. 하물며 멸망한 지금은 명맥이 완전히 끊긴 힘이라고 믿었다.
마족을 중심으로 일대 전체에 하얀 마법진이 깔렸다. 수십 개의 하얀 원이 겹겹이 포개지고, 그 중앙에 금색의 룬 문자가 어지럽게 그려진, 마치 꽃을 닮은 아름다운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감탄과 경이로움을 섞은 얼굴로 바라보는 리슈아 옆에서 세르미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삼위일체의 힘, 그것은 고위 마족 하나 정도는 우습게 해치울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마족, 그중에서도 폴룩스를 노린 마법진의 꼭대기에는 수호룡 세 마리가 시기를 노리고 빙빙 맴돌고 있었다.
힘이 어느 정도 모인 것 같자, 루아와 리레시아, 그리고 폴라로이아는 수호룡을 향해 외쳤다.
“어둠은 빛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니, 공허를 뚫고 나온 불사조여, 적을 멸하라!”
그 말과 함께 갑자기 하늘을 가린 구름이 모두 사라졌다. 맑은 겨울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아래쪽부터 달의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양은 완전히 가려지지 않고, 달의 뒤로 환히 빛나는 금색의 테두리를 만들어냈다. 바로 금환일식이었다.
금빛 테두리는 지상으로 하강해 폴룩스를 꽉 옭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려진 태양에서 불사조 한 마리가 날아와 폴룩스를 덮쳤다. 엄청난 금색의 불기둥이었다.
찬란히 빛나던 불기둥은 서서히 밝아지더니 청백색의 끓어오르는 빛이 되었다. 그 안에서 마족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폴룩스는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졌고, 그 뒤에 마법진이 사라지자 허공에 떠 있던 수호룡의 잔상도 차츰 흐릿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힘이군….”
부상이 너무 심해 어느 집 옥상의 창고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이데가 중얼거렸다. 그는 삼위일체의 힘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다른 후대의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이야~ 삼위일체의 힘이란 거, 두 번은 못 쓰겠네.”
때마침 마이데의 옆에 내려온 리레시아가 너스레를 떨며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엄청난 힘을 쏟아부었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세 사람 모두 당분간은 큰 힘을 발휘하며 전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할 여력은 있었는지, 리레시아는 마이데를 힐끗 보며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이봐, 마이데. 나도 쓴 힘을 설마 네가 못 쓴다고 하진 않겠지? 겨우 그 정도 부상에 주저앉지 말고, 가!”
“이게 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냐….”
마이데는 쓰게 웃었다. 회복력이 빨라 조금 전보다는 움직이기 편해도, 여전히 전투에 나서긴 힘들었다.
그런 마이데를 갑자기 하얗고 은은한 빛이 감쌌다. 두 사람이 돌아보니, 뒤에는 폴라로이아의 보호를 받는 루아가 서 있었다.
“그랜드 크로스의 힘은 아직 쓸 수 없지만, 이 정도 치유는 가능합니다. 자, 당신들 차례입니다.”
“전투 불가, 하지만 비호 가능. 공격 보조 프로그램 가동률 100%.”
꺼져 있던 태블릿 PC의 전원을 켠 폴라로이아가 루아를 거들었다. 두 사람이 붙어있는 데다 리레시아까지 있다면 후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치유의 힘 덕분에 마이데의 부상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다.
“좋아. 그럼 이젠 내 차롄가?”
그는 애용하는 전투 도끼를 불러내 손에 꽉 쥐었다. 언제든 틈이 생기면 바로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세르미네는 자신도 검을 빼 들었다. 놀라운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절대 마이데에게는 질 수 없었다.
그는 옆에서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인 리슈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가자, 리슈아. 우리도 질 수는 없지 않겠어?”
여전히 고위 마족 카스토르는 남아 있었다. 이제는 세르미네가 나설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