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가연은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한 사람의 기사로 봐달라는 마음을 세르미네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어지간한 놈이라면 허락하겠지만, 저건 고위 마족이야. 그것도 두 마리나 있어. 각성도 못 한 너를 데려갈 수는 없다.”
그러자 가연은 보기 드물게 화가 난 얼굴로 세르미네를 향해 쏘아붙였다.
“세르미네는 늘 각성, 각성하면서 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죠! 반대의 입장이라면 세르미네는 가만히 있겠어요? 저는 혼자 안전한 곳에서 숨어 있고 싶지 않아요!”
세르미네는 놀랐다. 그리고 밀려오는 옛 기억에 가슴이 쿡쿡 쑤셨다.
자신이 예비 기사였던 시절에도 늘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때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력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요 맹랑한 꼬맹이. 많이 컸어.”
세르미네가 그리 말하며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가연은 볼을 부풀렸다.
“누가 꼬맹이예요!”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가연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겹쳐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널 걱정하는 마음 또한 알아줬으면 한다. 같이 가자. 하지만 우선 거리의 사람들을 대피하는 데 주력해줘. 그것도 중요한 일이야.”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이 더해졌다. 가연은 세르미네의 진심이 담긴 말에 결국 자신의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세르미네도 절대 혼자서 무리하면 안 돼요, 알았죠?”
그 말에 세르미네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마이데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과 협력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고위 마족을 혼자 처치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가연은 얼른 수호석의 힘을 사용해 리슈아로 모습을 바꿨다. 더욱 높아진 신체 능력으로 담을 넘어 건물 아래까지 뛰어내린 그는 혹시나 남은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거리를 향해 달렸다.
세르미네는 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는 잠시 접어둔 날개를 다시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점점 마족에게 다가갈수록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렸다. 심한 두통은 아니었지만, 그 아픔 사이로 마족의 사념파가 밀물처럼 파고들어 왔다.
[나는 카스토르….]
[나는 폴룩스이니라.]
[이 별도 우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질 것이니라. 사라질 것이니라. 전부 없애버릴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하얀 공과 같은 마족의 몸에 눈이 생겨났다. 하나, 둘…. 셀 수도 없이 많은 눈이 생겨나 일제히 세르미네를 향했다.
‘온다…!’
세르미네는 재빨리 손을 앞으로 뻗어 방어막을 펼쳤다. 그리고 뒤이어 그 많은 눈동자에서 푸른색 광선이 세르미네에게로 쏟아졌다.
“큭…!”
중급 마족의 공격도 무리 없이 막아내는 세르미네의 방어막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위 마족의 공격은 실로 엄청났다. 방어막에는 금이 가고, 세르미네의 팔에 돋아난 핏줄은 여기저기 터져 검푸른 상처가 되었다.
“세르미네!”
그때 갑자기 검은 파편이 하얀 마족을 향해 날아갔다. 큰 타격은 주지 못했지만, 마족은 공격을 멈추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저건… 리슈아!”
주택가 골목 모퉁이에서 가연이 주변에 검은 파편을 잔뜩 띄운 채 마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에 질렸지만, 그래도 세르미네를 구해야 한다는 의지가 보이는 표정으로 가연은 마족에게 소리쳤다.
“세르미네는 내가 지키겠어!”
‘저, 저 바보가…!’
마족의 눈이 돌아간 것을 본 세르미네는 얼른 가연에게 다가가려 했다. 광선 공격이 가연을 향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하얀 마족, 폴룩스가 움직이기 전에 검은 마족인 카스토르의 손에 촉수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뭉툭한 팔 끝이 가연을 내려치려는 것처럼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안 돼!”
세르미네가 다가가기엔 너무 늦었다. 가연 또한 공격을 직감하고 방어막을 폈지만, 공격을 도저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팔이 가연을 짓누르려는 순간,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튀어오더니 가연의 허리를 붙잡고 바로 옆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다음 순간, 팔은 가연이 서 있던 거리를 박살 냈다. 실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세르미네는 지붕으로 피한 가연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다름 아닌 마이데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고마움보다도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또 저 녀석에게 선수를 빼앗기다니…!’
하지만 마이데를 훑어본 세르미네는 깜짝 놀랐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한쪽 팔은 이상하게 휘어 제대로 쓸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늘 자랑처럼 입고 다니던 청재킷은 붉게 물들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쩌다 저 지경까지 될 정도로 싸운 거야?!’
물론 고위 마족은 절대로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정예 기사라도 혼자서 대적하는 것은 무리이며, 기사단 내에서도 금지 사항이었다.
그런 마족이 둘이나 나타난 만큼, 세르미네는 아주 조금 마음속에서 후회가 올라왔다.
자신이 감정에 휩쓸려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이데에게 동정이나 미안함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마터면 가연까지 위험해질 뻔한 것과, 마이데가 가연에게 또다시 점수를 딴 것이 화가 났다.
강한 적 앞에서도 이런 생각이나 들다니…. 세르미네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저 녀석을 해치우면 이런 생각도 사라지겠지.’
세르미네는 한 손에 쥔 검에 힘을 꽉 실었다. 그 때문에 팔이 시큰거렸지만, 약한 소리나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는 우선 폴룩스를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의 공기를 서서히 낮추는 카스토르보다 직접적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폴룩스가 훨씬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족에게 가까이 붙는 데 성공한 세르미네는 검기를 실은 검으로 폴룩스를 공격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광선을 피하며 세르미네는 폴룩스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이렇다 할 공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그의 날개와 검이 발하는 하얀 빛과 폴룩스가 쏘는 푸른 광선이 하늘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꽤나 장관이었지만, 그것을 여유롭게 감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아래의 주택가는 이미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폴룩스의 광선과 카스토르의 주먹을 이리저리 피하며 공격을 가하길 수십 차례, 세르미네는 드디어 빈틈을 발견했다.
“저기다!”
허점이 보인 폴룩스의 눈 하나를 향해 세르미네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내리꽂아 눈 하나를 봉인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제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폴룩스의 뒤로 작은 인영이 튀어 오르더니 섬광이 번쩍였다. 폴룩스의 눈은 빙글빙글 돌며 그쪽을 향했고, 자연히 빈틈도 사라졌다.
“뭐, 뭐야!”
뒤이어 사방으로 다시 한번 쏟아지는 광선을 막아내며 세르미네가 신경질을 냈다. 인영의 주인은 바로 마이데였다.
“이런, 역시 도무지 빈틈이 없군.”
날지 못하는 마이데는 지붕을 지지대 삼아 도약하며 폴룩스와 카스토르를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판을 읽을 여유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세르미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방해할 거면 저리 가!”
그러나 마이데 또한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입은 부상과 더불어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은 세르미네에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또 혼자서 다 해결하고, 혼자서 잘난 척하려는 거지!”
“시끄러워!”
그들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마족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수준 높은 사고가 가능한 고위 마족은 이때가 기회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대들에게 끝을 내리겠다!]
갑자기 폴룩스의 눈이 빙글빙글 돌더니 한 점에 모여 거대한 눈이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한 광선이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향해 쏘아졌다.
“이런…!”
만신창이인 마이데, 그리고 세르미네의 힘으로는 온전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불쑥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내가, 내가 지킬 거야!”
가연이었다. 그는 검고 반투명한 방어막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 세르미네와 마이데, 그리고 거리까지 전부 지키려는 마음을 세르미네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안 돼, 리슈아! 피해!”
그리고 다음 순간, 광선이 방어막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방어막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가연의 입에서 얇은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몇 초간의 방어는 성공했지만, 역시 각성하지 않은 가연에게는 무리였다. 방어막이 완전히 깨져 광선이 세 사람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산산조각이 난 방어막 파편이 갑자기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남색의 기운이 방어막을 한층 강화해 세 사람을 보호했다.
“이 힘은?!”
갑자기 나타난 강한 힘을 마족도 느꼈는지 광선 공격을 멈추고 세 사람의 등 뒤 너머로 푸른 눈이 굴러갔다.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리는 가연과 세르미네, 마이데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군요.”
소녀의 목소리가 낮게 세르미네의 귀에 울렸다. 리레시아와 폴라로이아를 뒤에 두고 선두에 선 루아가 질책하는 표정으로 세르미네, 그리고 마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마이데의 물음에도 루아는 대답하지 않고 들고 있던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저 또한 수호석의 선택을 받은 자, 나설 때가 되었군요.”
지팡이에서 남색의 수호석이 빛나고, 하늘에서 기계로 이루어진 용이 구름을 뚫고 내려왔다.
“기계 수호룡이여, 이제 우리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