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기억 속의 그날은 구름이 짙게 깔린 우중충한 날이었다. 마치 금세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약간의 한기까지 더해진 날씨였다. 그날, 세르미네는 리슈아와 단둘이서 넓디넓은 황야를 횡단하고 있었다.
목표는 두 가지였다. 어딘가에 있을 ‘대지의 기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과, 마족을 찾아내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루아의 능력으로는 정확한 좌표까지 집어낼 수 없었다. 얼추 이 지역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알려주니 찾는 것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차라리 마이데나 리레시아를 데려왔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들은 다른 지역의 마족을 퇴치하러 가 있었다. 결국 세르미네는 리슈아와 단둘이서 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리슈아와 둘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근래에 기사들이 늘어나면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좀처럼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골치 아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세르미네, 여기 봐. 꽃이 피었어. 황야지만 물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가? 굉장하다!”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리슈아에게 세르미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굉장하네.”
이제 좀 그만 종알거리려나, 세르미네는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리슈아는 세르미네의 한쪽 팔을 끌어안더니 눈을 빛냈다.
“세르미네. 우리 뭐 좀 먹자. 배고프다.”
“과일을 그렇게 많이 먹어놓고 또 배가 고파? 식량은 아껴야 해.”
세르미네가 단번에 거절하자 리슈아는 그의 팔을 놓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힝…. 딸기타르트 먹고 싶다….”
보통 때라면 이런 리슈아가 귀여워 뭐든 다 해줬을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리슈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근처에 쉴만한 곳을 찾아 숨을 돌리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마침 발 닿은 곳은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었다. 세르미네는 바위 위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고는 리슈아에게 앉도록 했다.
“세르미네는 안 쉬어도 돼?”
세르미네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있던 수통을 풀어 리슈아에게 건넸다. 그가 두 손으로 수통을 받아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던 세르미네는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나 여기저기 있는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자가 있나 싶어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왜 그래?”
수통을 반이나 비운 리슈아가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후방을 주시하던 세르미네는 몸을 돌려 리슈아를 바라보았다.
“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미행인가?”
“아. 그거? 아까 전부터 우리 뒤 800미터 뒤를 유지하며 한 사람이 따라오고 있긴 해.”
“뭐?”
세르미네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리슈아는 특히 동물적인 감이 좋았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눈치는 기가 막히게 없었다.
“왜 말을 안 했어!”
“그야 세르미네가 안 물어봤잖아. 그리고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는걸.”
“어휴….”
세르미네는 깊이 한숨을 쉬고는 리슈아가 말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리슈아의 판단과는 달리 행여 적대심을 가지고 미행하는 자이면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감이 좋은 건 리슈아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상대도 들켰다는 걸 알았는지 바위 뒤에서 몸을 드러내 조금씩 두 사람에게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은…?”
차츰 뚜렷하게 보이는 모습에 세르미네는 약간 놀라 눈꼬리를 꿈틀거렸다. 어두운색의 피부와 짧게 땋은 금발 머리, 그리 크지는 않은 체구는 이 근처에선 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리를 알고 있나? 아니면 그저 가는 길이 같은 여행자인가?’
세르미네는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검 손잡이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상대는 리슈아의 말대로 적의가 없었다. 마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미안해요. 내가 따라오는 걸 알아챘나 보군요. 길을 몰라서 당신들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가온 남자가 세르미네를 보며 말했다. 상당한 미성이었다.
“거봐, 세르미네. 악의가 없잖아.”
쳇, 하고 세르미네는 혀를 차며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냐. 당신과 가는 길이 같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말야.”
“괜찮아요. 나도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적당히 말벗하며 여행하다 마을이 나타나면 헤어지는 걸로 하죠. 어때요?”
세르미네는 몹시 난처했다. 상대는 물 흐르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런 사람이 가장 완고한 법이었다. 게다가 그를 망설이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세르미네, 괜찮지 않아? 세르미네는 강하니까 마족이 나타나도 저 사람을 지키며 싸울 수 있잖아.”
“뒤에 있는 일행분은 그렇다는데요? 저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이고야, 하면서 세르미네는 뒷목을 잡으려다 참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그였다.
결국 세르미네는 처음 보는 남자와의 동행을 허락해야 했다. 리슈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초면인 사람과도 재잘재잘 떠들었고, 앞장선 세르미네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의 이름은 치르티티샤. 성은 딱히 없는 모양이었다. 생김새와 이름으로 보아 남아메리카 부근에서 온 듯한 그는 보기보다 체력이 강하고, 낯도 가리지 않았다.
다만 리슈아 본인은 모르겠지만, 치르티티샤는 리슈아와 웃으며 대화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날이 서 있었다. 세르미네는 느낌이 이상했지만, 무어라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함께 하루 종일 황야를 건넜다. 날이 저물어 밤이 깊어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물가 근처에 모닥불을 피우고 자리를 잡았다.
넉넉한 식량은 아니었지만, 나눠주지 못할 것도 없었기에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에게 소고기를 잘 말린 육포와 마른 과일을 한 움큼 건넸다.
“고마워요. 답례로 내가 불침번이라도 설 테니 푹 쉬어요.”
잘 썰어 말려 바삭바삭한 바나나를 하나 집어먹은 치르티티샤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손을 내저으며 턱짓으로 리슈아를 가리켰다.
“난 괜찮으니 저 꼬맹이만이라도 푹 자게 해 주면 고맙겠군.”
“누가 꼬맹이야! 나도 불침번 설 수 있거든?!”
리슈아가 발끈하자 세르미네와 치르티티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르미네의 경계심도 상당히 누그러졌다.
*
별다른 일 없이 밤을 보낸 그들은 해가 뜨자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불침번을 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세르미네와 치르티티샤는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세르미네가 볼 때 치르티티샤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치르티티샤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세르미네는 어서 그와 작별하고 싶었다. 그들에게는 임무가 있었거니와, 행여나 마족이라도 나타나면 치르티티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도 무색하게,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마족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세르미네는 불길한 예감을 확실히 하기 위해 리슈아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리슈아, 혹시 근처에 마족이 있어?”
그러나 리슈아의 대답을 듣기 전에 세르미네는 이미 알 것 같았다. 리슈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 전방에도 있고, 측면에도 몇 있어. 여기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리슈아는 전투를 겁낸다기보다는 마족을 퇴치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사명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니기에 세르미네도 큰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이 리슈아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리슈아보다도 보통 인간인 치르티티샤가 더욱 태연했다. 분명 마족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이 캐묻지도 않았다.
세르미네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다가올 위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족에 대한 자세한 것은 빼놓을 생각이었다.
“치르티티샤. 이 앞에 맹수가 있는 모양인데, 뒤로 물러서 있겠나?”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가 안전한 바위 뒤에 숨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치르티티샤는 그의 바람대로 물러나는 대신 허리춤에 돌돌 말아 매고 있던 채찍을 풀어 집어 들었다.
“맹수 정도야 나도 상대할 수 있어요. 걱정 마요.”
“아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당황한 세르미네가 한 번 더 치르티티샤를 설득하려는데, 리슈아의 낮고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세르미네, 뒤에! 온다!”
리슈아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는 손가락으로 세르미네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세르미네가 몸을 홱 돌리니 검은 늑대를 닮은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슈아의 말대로 앞과 옆에서 다가오는 그들은 틀림없는 마족이었다.
“들개가 수십 마리나 나타났네요. 가볍게 혼을 내주도록 할까요?”
“아니, 저건 들개가 아니야.”
채찍을 탁탁, 땅에 치며 앞으로 나서는 치르티티샤를 세르미네는 말리려 했다. 하지만 호전적인 치르티티샤는 세르미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세르미네와 리슈아를 보호하려는 모양새였다.
“당신은 거기 겁먹은 연인이나 잘 봐줘요.”
“안 돼, 돌아와!”
세르미네의 외침이 무색하게 치르티티샤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마족 무리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