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41화 (41/87)

41화

[치르티티샤 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문장은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충격으로 좀체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문장 첫 마디, 그곳에 쓰인 다섯 글자의 이름에 가 있었다.

‘치르티티샤? 내가 아는 그가 맞는 건가?’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동명이인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치르티티샤는 이 대륙 출신이었으며, 이름 또한 당시 시대에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깊이 생각에 빠졌다. 치르티티샤, 그는 대체 누구였던 것일까.

“명령 대기 중.”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뒤를 돌아보니 폴라로이아가 늘 그랬던 것처럼 회색 로브를 입고, 태블릿 PC를 든 채 서 있었다.

“아, 미안하다. 혹시 이곳에 정신 계열 마족이 있나?”

세르미네는 조금 전 들었던 기이한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폴라로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족 개체 탐색 완료. 개체 수 제로.”

“뭐?”

세르미네는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조금 전 들었던 그 목소리와 울음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정신 계열 마족의 소행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개체 수 제로. 근처에 마족 반응 없음.”

그러나 폴라로이아는 다시 한번 말을 반복하며 사실을 단단히 못 박았다.

“그, 그렇군. 피곤해서 잘못 들은 거겠지. 미안하다, 괜히 오게 만들었군.”

세르미네는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는 가능성조차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피곤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폴라로이아에게 사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세르미네는 다시 질문했다.

“혹시 이 근처에 마을이 있나?”

그는 아직 치르티티샤에 대한 것은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심쩍은 부분은 많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괜한 분열을 만들고싶지는 않았다. 대신 마을에 가 조사를 해 볼 생각이었다.

“북동쪽 2km 떨어진 곳에 민가 다수 있음.”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 세르미네는 그곳부터 찾아가 이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고, 대도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래. 고맙다.”

“임무 완료. 귀환을 실행.”

폴라로이아는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세르미네의 인사를 듣고는 바로 아틀란티스에 돌아갔다.

세르미네는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지하의 입구로 다가가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단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나.”

그는 단념하고 유적 밖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마을에 가면 아마 누군가 하나쯤은 잠에서 깨어 활동을 시작했을지 몰랐다.

지평선 위로 올라온 희미한 빛을 따라 세르미네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마을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았으니 무작정 힘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폴라로이아의 말대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민가가 십 수채 모여 있는 그곳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마침 불이 켜진 집에서 누군가 머리에 물병을 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르미네는 그 사람이 놀라지 않도록 집 뒤에 착지한 다음,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안녕하시오. 묻고 싶은 게 있소이다.”

화려한 무늬의 얇은 판초를 입은 여자는 물병을 내려놓고 세르미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치르티티샤와 꼭 닮은 까만 눈동자가 세르미네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우리는 외지인을 환영하지 않지만, 당신에겐 악의가 없군요. 묻고 싶은 게 뭐죠?”

세르미네는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질문을 신중하게 골라 말을 꺼냈다.

“저 숲에 있는 유적에 대해 알고 싶소.”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와는 달리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외지인에게 알려줄 만한 것은 없군요.”

“어느 시대의 것인지 만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소?”

“당신이 도굴꾼인지 고고학자인지 알 길이 없으니까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여자는 다시 물병을 이고 세르미네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르미네는 따라가려 했지만, 경계심을 산 와중에 더 말을 꺼냈다간 소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마을 외곽으로 나와 평평한 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석진 곳이라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띌 일은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폴라로이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 전 유적에서 가까운 대도시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나?]

그러자 약 1분 후 답장이 도착했다.

[좌표 전송.]

짧은 말과 함께 숫자가 몇 개 찍혀 있었다. 그곳으로 순간 이동을 하라는 뜻이었다.

세르미네는 폴라로이아가 준 좌표를 설정하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눈앞이 하얀빛으로 잠깐 번쩍이더니 이내 높은 건물이 모여 있는 거리가 드러났다.

그는 그늘진 골목 모퉁이에서 큰길로 나왔다. 이제 해가 뜨려 하는 거리에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붙잡고 멀리 떨어진 숲속 유적에 대해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도서관으로 가서 역사서를 찾아보는 게 낫겠다고 그는 판단했다.

날이 완전히 밝아 거리의 가게들이 문을 열자, 세르미네는 근처 서점에서 관광 안내서를 하나 샀다. 우연인지, 아니면 폴라로이아가 신경을 써준 것인지 세르미네가 도착한 곳은 이 나라의 수도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국립도서관이 있었고, 세르미네는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도서관은 굉장히 한산했다. 간단히 출입 명부를 작성한 뒤, 세르미네는 역사서가 모여있는 열람실의 한구석을 향했다.

기사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개인차는 있지만 대부분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어느 정도 읽고 구사할 수 있었다. 세르미네 또한 긴 세월을 살아온 데다가 독서를 즐겨 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말로 쓰인 책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대체 그 유적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유적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금세 사라지곤 하던 시기였다.

‘단서가 있을 텐데….’

치르티티샤 님이라고 칭한 걸로 보아 왕족이거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세르미네는 아예 역사를 전부 살펴보기로 하고 연표부터 꺼내 들었다.

하지만 꼬박 하루를 도서관에서 지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그는 신분을 증명한 뒤, 책 몇 권을 대출하고는 인근의 호텔에 방을 잡고 계속 탐독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두 시간 정도를 책과 씨름하던 세르미네는 잠시 책을 덮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보가 이렇게 없을 수도 있군.”

사실 치르티티샤에 대해서 지금 당장 조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유적에서의 문장들, 그리고 어디에도 치르티티샤에 관한 다른 정보가 없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왠지 당장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생각에 골몰해있던 세르미네의 귀에 짧은 신호음이 들렸다. 들고 있던 책을 덮은 뒤 휴대폰을 열어 보니 가연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세르미네. 괜찮아요? 벌써 떠난 지 한나절이나 지났는데….]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세르미네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다정함이 전해지도록 긴 문장을 입력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는 잘 있다. 너야말로 괜찮나? 어디 아픈 데는 없지? 혹시라도 마족이 나타나면 얘기해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달려가마.]

그는 여전히 마이데에 관해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세계를 돌다 적당한 곳을 발견하면 가연과 함께 단둘이서 지내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어요. 세르미네, 빨리 마음이 풀어지길 바랄게요. 마이데도 방에서 통 나오질 않는다고요.]

가연의 답장에서 마이데의 이름을 보자 세르미네는 눈을 찌푸렸다. 기분이 스멀스멀 안 좋아지려는 것을 억누르던 세르미네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치르티티샤는 뭘 하고 있지?]

[치르티티샤 씨라면 살 것이 많다면서 가게 문이 열릴 쯤에 나가셨어요. 아직 안 오셨는데….]

어젯밤부터 대소동이었지만, 치르티티샤 만큼은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일상이었다. 자신이 얽힌 일이 아니면 선을 긋는 그의 성격에 세르미네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랬다. 다른 세 사람은 기사가 되기 전, 불행했던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기에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이데는 거의 숨김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고, 리레시아 또한 상처를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폴라로이아는 원래 말수가 없었지만, 과거에 대한 질문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달랐다. 그의 과거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남의 과거사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닌 거 모르시나 봐요?]

기분은 안 좋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세르미네는 그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적에서 그런 글귀를 발견하고 나니 어째서 과거를 말하지 않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세르미네는 룸서비스로 주문한 과일 증류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먼 옛날의 기억, 치르티티샤를 처음 만났을 때가 영화를 재생하는 것처럼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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